영화는 실제 같은 세트장에서 진짜 같은 연기를 펼치는 허구의 예술이다. 영화는 아무리 감쪽 같아도 어느 영화 제목처럼 영화에 불과하다. 물론 실제를 담은 영화도 있다. 다큐멘터리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에도 연출이 없는 건 아니다. 작품 의도에 맞게 장면이 재배치된다. 즉 편집을 거친다.
영화는 언제나 실제를 꿈꾼다. 실제 같은 CG, 실제 같은 연기, 실제 같은 세트... 영화 포스터나 감상평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문구다. 어른이 될수록 애니메이션은 재미가 없다. 어쩌다 추억 삼아 봐도, 금세 지루함을 느낀다. 왜 그럴까? 듣고 본 게 많아서다. 가상 세계에 빠질 만큼 세상이 녹록치 않다는 걸 깨달아서다. 늙었다는 얘기다.
머리 굵은 관객을 만족시킬 방법은 하나다. 가상 세계나 쇼(Show)가 아닌 진짜를 보여주는 것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어떤 상황에 누군가를 예고 없이 몰아넣고 반응을 지켜보거나, 촬영이 아닌 실제 소품을 동원하면 된다.
요즘 대세인 '리얼 버라이어티'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출연자를 속여 군대나 오지로 끌고 가는 프로그램이 TV에 차고 넘친다. 연예인 집이나 가족을 24시간 촬영하는 이른바 '관찰 예능'이 인기인 것도 브라운관을 벗어난 연예인 진면목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진짜를 탐하는 건 인간 본능이다. 연출이나 연기가 아닌, 실제 상황이 담겼다고 알려진 영화 6편을 소개한다.
1. 거미의 성 (蜘蛛巢城, 1957)
일본 영화계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1910~1998)가 연출한 '거미의 집(1957)'에서는 주인공 미후네 도시로(三船敏郎·1920~1997)가 눈앞에 날아든 화살을 보고 놀라는 장면이 나온다(영상 1분 15초부터). 그런데 이 장면은 연기가 아니다. 전문 궁사가 도시로를 향해 진짜 화살을 쐈다.
이런 장면은 대개 화살이 박힐 공간 뒷편에 작은 구멍을 뚫고, 신호에 맞춰 화살을 구멍에 밀어넣는 식으로 촬영한다. 전문 궁사가 아무리 능숙하게 쏴도, 사람인지라 늘 실수할 가능성이 있다. 반면 구멍에 넣는 방법은 실제로 활을 쏘지 않기 때문에 100% 안전하다.
하지만 아키라는 욕심쟁이였다. 연기가 아닌 도시로의 표정을 영화에 담고 싶었다. 그래서 도시로에게 예고 없이 진짜 활을 쐈다. 다행히 화살은 궁사가 노린 곳에 정확하게 꽂혔다. 도시로는 실제로 크게 놀랐다.
후문에 따르면, 도시로는 촬영이 끝나고 아키라에게 진노했다고 한다. 반면 아키라는 "뭐가 대수냐"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2.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Last Tango In Paris, 1972)
이탈리아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Bertolucci·76)는 2013년 한 행사에서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2)'를 촬영하면서 "여배우 마리아 슈나이더 허락 없이 성폭행 장면을 촬영했다"고 고백해 물의를 빚었다.
배우가 아닌 수치심을 느끼는 여자로서의 슈나이더를 화면에 담고 싶었다는 게 이유였다. 그런데 슈나이더는 당시 만 19세로 이제 막 미성년자 딱지를 뗀 참이었다. 상대 남배우인 말론 브란도(Brando·1924~2004)는 48세였다.
영화에서 겁에 질린 슈나이더는 연기가 아닌 진짜였다. 슈나이더는 2007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촬영 당시) 성폭행 당했다고 생각했으며, 촬영 후 누구도 내게 사과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뒤 트라우마에 시달려 약물에까지 손을 댔다. 슈나이더는 2011년 약물 중독으로 세상을 떠났다.
논란이 커지자, 베르톨루치는 "성폭행 장면 촬영 자체는 슈나이더도 알고 있었다. 다만 어떻게 찍느냐 세부적 부분을 알려주지 않았을 뿐"이라며 "내 말이 와전됐다. 그런(성폭행) 장면을 합의 없이 찍는 건 불가능하다"고 해명했다.
3. 핑크 플라밍고 (Pink Flamingos, 1972)
미국 영화계 이단아 존 워터스(Waters·71)가 1972년 연출한 '핑크 플라밍고'에는 영화 역사상 가장 더러운 장면이 등장한다.
'드래그 퀸(여장)' 전문 배우로 유명한 디바인(1945~1988)은 영화 마지막, 길거리에 방금 싸놓은 강아지 배설물을 주워 먹는다. 그러다 역겨움을 참지 못 하고 헛구역질한다. 놀랍게도 이 장면에 나오는 배설물은 실제 강아지 배설물로 소품이 아니다.
사실 핑크 플라밍고는 이 장면 말고도 스토리로 보나, 연출로 보나 제 정신이 아닌 영화다. "세상에서 가장 역겨운 사람들"이란 호칭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막장 가족 이야기를 그렸다.
역설적이게도, 이 점 때문에 핑크 플라밍고는 당시 미국 젊은 층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엄숙주의에 물들어 있던 미국을 '막장 가족'에 빗대어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이 상대적으로 진보 색채가 강한 젊은 층의 반향을 이끌어낸 것이다.
핑크 플라밍고는 상업적으로도 성공했다. 제작비 대비 500배가 넘는 수익을 거뒀다. 문화계에 끼친 영향도 크다. '컬트(Cult) 영화'라는 단어가 알려진 게 바로 이 영화부터다.
4. 감각의 제국 (愛のコリーダ, 1976)
오시마 나기사(大島渚·1932~2013)의 문제작 '감각의 제국(1976)'은 1930년대 일본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을 영화화했다.
매춘부 출신인 아베 사다(阿部定)는 지인 소개로 취업한 도쿄 한 음식점에서 주인 이시다 키치조(石田吉藏)와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법적으로도, 성(姓)적으로도 비정상이었다. 키치조는 아내가 있는 유부남이었다. 사다는 새디즘(Sadism) 성향과 소유욕이 심했다. 사다는 키치조의 은밀한 곳에 칼을 대고 "다른 여자와 놀아나면 잘라버릴 것"이라고 협박하기도 했다. 키치조는 이런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1936년 5월 18일, 사다는 키치조의 목을 졸라 살해하고, 성기를 잘라낸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 사다는 경찰 조사에서 "그를 너무 사랑해 그의 모든 걸 원했다"고 진술했다. 법원은 사다에게 정신질환을 이유로 징역 6년을 선고했다.
사다는 출소 후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다가 1971년 지인에게 "온천에 다녀오겠다"는 쪽지를 남긴 뒤 실종됐다.
'감각의 제국'에는 사다와 키치조를 연기한 배우들이 실제 성관계를 맺는 장면이 수차례 등장한다. 현재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일본 정부는 영상물에서의 성기 노출, 실제 삽입 등을 강력히 규제하고 있었다. 때문에 감각의 제국은 문제가 된 장면 20분 가량이 편집된 '반쪽자리' 버전으로 일본 극장에 걸려야 했다. 현재는 무삭제판이 출시된 상태다.
5. 카니발 홀로코스트 (Cannibal Holocaust, 1980)
신체 훼손이 수시로 등장하는 장르를 '고어(Gore)'라고 한다. 이탈리아 감독 루제로 데오다토(Deodato·78)가 연출한 영화 '카니발 홀로코스트(1980)'는 아마 이 장르 끝판왕에 속할 것이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원시 부족을 만나러 아마존 밀림에 간 미국 방송사 취재팀이 갑자기 현지에서 실종된다. 취재에 도움을 준 해롤드 먼로 교수는 자초지종을 파악하러 아마존으로 날아간다. 이곳에서 먼로는 취재팀이 원시 부족에게 살해됐으며, 취재팀이 남긴 마지막 녹화 테이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먼로는 어렵게 테이프를 입수해 미국으로 돌아온다.
먼로는 방송사에 넘기기 전 테이프 내용을 먼저 확인한다. 그리고 충격에 빠진다. 알고 보니 취재팀은 다큐멘터리에 쓸 장면을 찍는답시고 현지 부족원들에게 성폭행, 살인 등 온갖 만행을 저지르다가 끔찍하게 살해됐던 것이다.
카니발 홀로코스트는 원시 부족의 야만성과 이를 능가하는 서구 문명의 추악함을 고발하는 영화다. 그러다 보니 끔찍한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특히 원시 부족이 거북이를 토막내 먹거나, 산 채로 원숭이 머리를 자르는 장면은 악명 높다. 그런데 이 장면은 연출이 아닌 실제다. 진짜로 거북이와 원숭이를 죽였다.
데오다토에 따르면, 동물 7마리가 이 영화를 위해 실제로 희생됐다. 죽은 동물은 촬영에 협조한 부족에게 공짜로 줬다고 한다. 데오다토가 실제로 동물을 죽인 건 실감 나는 장면을 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는 깊이 후회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과거 한 인터뷰에서 "카니발 홀로코스트는 만들어지지 말았어야 할 영화"라고 자책했다.
6. 마루타 (黑太陽 731, 1988)
2차대전 일본군 731부대의 잔혹한 생체실험을 다룬 중국 영화 '마루타(1988)'는 90년대만 해도 국내에서 대중영화로 취급됐다. 명절, 공휴일마다 TV에서 방영돼 재밌게 본 기억이 난다. 그래서 필자는 한 때 마루타가 교훈적 영화라고 생각했다.
생각이 바뀐 건, 머리가 크고 무삭제판을 봤을 때였다. 옛 시절 마루타는 끔찍한 장면이 모두 잘려나간 편집판이었다. 무삭제판은 웬만한 고어에 끄덕 없는 필자가 보기에도 잔인한 장면이 가득했다. 일본군 만행을 고발하려는 건 알겠는데, 이렇게까지 끔찍하게 만들어야 하나 싶었다.
특히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소년 해부' 장면은 맨 정신으로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충격을 받은 필자는 인터넷을 뒤지다가 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다. 바로 해부 장면이 연출이 아닌 실제라는 것이었다.
( ※ 영화 예고편입니다. 다소 잔인한 장면이 포함돼 있습니다 )
일설에 따르면, 마루타를 연출한 모돈불(牟敦芾) 감독은 해부 장면 촬영을 준비하다가 우연히 인근에 교통사고로 사망한 소년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에 모돈불은 소년 부모를 찾아가 영화 취지를 설명하고, 소년의 시신을 촬영용으로 쓸 수 있는지 물었다. 놀랍게도 부모는 감독의 취지에 공감해 선뜻 시신을 건네줬다. 지금 기준으론 상상조차 힘든 일이다.
마루타는 1편 이후 시리즈화돼 총 3편(2편 - 살인공창, 3편 - 사망열차, 4편 남경대학살)이 더 세상에 나왔다. 작중 배경은 다르지만, 모두 일본군 731부대가 저지른 만행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모든불 감독은 4편도 직접 연출했는데, 평은 썩 좋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