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시를 비롯한 경기 북부지역은 K-콘텐츠 산실로 불린다.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한국 드라마와 영화의 상당수가 이곳의 스튜디오에서 촬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K-콘텐츠의 제작 중심지라는 칭찬은 그저 허울 좋은 말일 뿐이다. 대부분의 스튜디오가 불법 건물이란 음습한 이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 드라마와 영화들이 불법 스튜디오에서 촬영됐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구조가 고착화하면서 K-콘텐츠 경쟁력이 흔들리고 있단 말이 나온다. 왜 이런 문제가 벌어졌는지, 지금이라도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짚고자 한다. <편집자 주>
경기 북부지역에 불법 스튜디오가 만연한 데는 정부 책임도 있다. 정부가 K-콘텐츠 확산에만 관심을 쏟는 나머지 K-콘텐츠 제작 환경에서 눈을 돌렸고, 결과적으로 기형적인 K-콘텐츠 제작 환경이 고착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들은 상황이 이어지면 필연적으로 K-콘텐츠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의 성공에 고무된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2월 테드 서랜도스 넷플릭스 공동대표를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했다. 서랜도스 대표가 한국에 대한 투자 진행 상황을 공유하자 윤 대통령은 빠르게 많은 투자를 진행하는 데 대해 감사를 표시하며 K-콘텐츠에 대해 지속적으로 투자를 늘려달라고 당부했다.
당시 윤 대통령의 관심에 고무된 넷플릭스는 ‘한국을 향한 넷플릭스의 지속적인 투자, 25억 달러로 한국산업 전반에 퍼질 나비효과’, ‘윤 대통령과 만남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 이야기의 힘을 믿는 넷플릭스 리더십 면면’, ‘넷플릭스와 한국 창작 생태계가 함께 써내려가는 K-콘텐츠의 새로운 역사’, ‘시차 없는 한류를 이끄는 넷플릭스의 K-콘텐츠 수출 전략’, ‘한국의 젊은 신인 창작자와 배우, 더 나아가 한국의 아름다움을 전 세계로 알리는 넷플릭스’란 제목으로 보도자료를 배포하기도 했다.
이렇게 위에서 크게 판을 깔자 전 부처가 나서 K-콘텐츠 활성화 방안을 고안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지난달 한덕수 국무총리 주재로 '제8차 콘텐츠산업진흥위원회'를 열고 '한국경제의 새로운 경제 성장엔진, K-콘텐츠 글로벌 4대 강국 도약전략'을 발표했다. 이 전략엔 K-콘텐츠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복합문화단지를 조성한다는 방안이 포함돼 있다. 중소·지역 콘텐츠 기업을 육성하기 위해 법·제도를 개선하겠다는 방침도 들어 있다.
안정적인 콘텐츠 생산 환경을 갖춰 제작비를 절감함으로써 지적재산(IP)으로서의 콘텐츠의 경쟁력을 확보한다는 정부 계획 자체엔 문제가 없다.
다만 전문가들 사이에선 기반 시설 자체가 불법이 태반인 환경에서 K-콘텐츠를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느냐는 지적이 나온다. 현재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밀어붙이기식 K-콘텐츠 활성화가 불법 스튜디오 난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OTT 시장이 팽창할 대로 팽창하면서 사업자들 간 경쟁이 심화하고 있다. OTT 사업자들이 더 나은 콘텐츠를 확보하는 데 사활을 걸면서 콘텐츠 생산량도 방대해지고 있다. 그만큼 스튜디오 수요가 급증하고 있지만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상당수 방송 제작사가 자체 스튜디오가 없어 스튜디오를 임대해 촬영에 쓰고 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도 합법 스튜디오 운영사는 가격경쟁력을 갖추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단 점이다.
실제로 파주시에 대규모 스튜디오를 세운 한 대기업 계열사는 불법 스튜디오와의 경쟁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
기반 시설을 갖추는 데 큰돈을 들이지 않은 불법 스튜디오는 이용 요금 덤핑으로 합법적인 스튜디오를 고사시키고 있다. 이 회사 관계자는 “K-콘텐츠 생산 환경이 건전하지 않다”라면서 “지자체와 정부의 관심이 절실하다. 우리조차 이렇게 어려운데 우리보다 열악한 스튜디오가 살아남을 수 있겠나”라고 말했다.
한 스튜디오 관계자는 이용 요금만 놓고 보면 불법 스튜디오와 아예 경쟁할 수 없는 구조라고 털어놨다. 그는 “불법 스튜디오 이용 요금이 우리의 절반에 불과하다. 어떻게 경쟁할 수 있겠나”라면서 “정부나 지자체가 당장의 성과나 홍보 효과에 연연해 불법 스튜디오를 양산하고 있다. K-콘텐츠 생산 환경을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지자체와 정부, 소방당국이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콘텐츠 제작사에도 제작 환경을 건전하게 만드는 데 협조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K-콘텐츠의 대표주자인 드라마와 영화를 불법 스튜디오에서 촬영한다는 게 말이 되나”라면서 영화 ‘기생충’과 OTT 드라마 ‘킹덤’, ‘오징어게임’, ‘지옥’을 언급했다. 그는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K-영화와 K-드라마가 빈부격차로 대표되는 불평등과 불공정 등 사회경제적 문제를 조명했다”면서 “정작 상당수 K-콘텐츠가 불평등·불공정 환경에서 제작되고 있는 것은 커다란 아이러니”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