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교도소에서 탈출한 '김미영 팀장' 보이스피싱 조직 총책 박모(54)씨를 현지 당국과 한국 정부가 추적 중인 가운데 박씨가 잡혀도 국내 송환은 난망할 전망이다.
탈옥 행위로 현지 법을 중대하게 위반한 만큼 현지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박씨는 일부러 송환을 지연시키는 '꼼수'를 쓴 것으로 알려졌는데, 도피사범 엄벌을 위해 형사사법공조를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 두 차례 경고했지만 탈옥 못 막아…적색수배 집중추적
12일 관계당국에 따르면 경찰청은 필리핀 경찰 및 법무부 이민국과 협력해 박씨를 집중 추적 중이다. 박씨는 검거 이전부터 발령됐던 적색수배가 아직 유지되고 있다.
경찰은 박씨의 본거지와 생활 반경을 고려할 때 아직 필리핀에 머물고 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밀항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경찰청 관계자는 "필리핀 법무부 이민국까지 나선 것은 이번 사안을 중대하게 보고 있다는 의미"라며 "최대한 신속하게 검거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관계당국의 설명을 종합하면 필리핀 나가시(市) 카마린스 수르 교도소에 수감됐던 박씨는 현지시각으로 이달 1일에서 2일 새벽 사이 측근인 신모(41)씨와 함께 탈옥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불법고용과 인신매매 혐의로 기소돼 현지에서 재판받기 위해 지난해 11월 이곳으로 이감된 상태였다.
필리핀 교정당국은 2일 인원 점검 때에야 박씨 일당이 사라진 사실을 파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체적인 도주 및 범행 수법은 필리핀 당국이 조사 중이다.
필리핀 교정당국은 해당 교도소에 CCTV가 설치돼있지 않아 탈옥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일부 훼손된 철조망을 찾아냈다고 한국 정부에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는 박씨 일당의 움직임이 수상하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작년 12월과 지난달 두차례에 걸쳐 교도소 측에 탈옥 가능성을 경고하며 철저한 관리·감독을 당부했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국내 보이스피싱 범죄의 창시자 격으로 여겨지는 박씨는 2012년부터 김미영 팀장 명의 문자메시지를 불특정 다수에게 보낸 뒤 자동응답전화(ARS)를 통해 대출 상담을 하는 척하며 피해자 개인정보를 빼내는 방식으로 수백억원을 빼돌렸다.
이들의 사기 행각에 당해 1억원이란 큰돈을 잃은 한 여성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등 서민 피해가 막대했지만, 정작 박씨는 여전히 법의 심판대에 오르지 않았다.
◇ 잡아놓고 2년간 속수무책…"신속 송환 사법공조 강화해야"
다른 조직원들이 2013년 대거 검거·구속된 뒤에도 박씨는 도피 생활을 이어오다 2021년 10월 필리핀 현지에서 붙잡혔다.
경찰은 이후 다각도로 박씨의 강제 송환을 추진했으나 2년 넘도록 진전이 없었다. 박씨가 필리핀 현지에서 죄를 짓고 형을 선고받으면 국내 송환이 지연된다는 점을 노려 추가 범죄를 저지르는 꼼수를 썼기 때문이다.
경찰은 박씨에게 적용된 혐의 중 인신매매는 허위로 만들어낸 범죄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이런 꼼수는 국내에서 유명 작가로 행세하며 수천만원의 사기를 저지른 뒤 필리핀으로 도피했던 윤모씨가 고안해내 현지 도피사범들에게 전파했다고 한다. 수사망을 피해 다니던 윤씨는 결국 작년 8월 필리핀에서 검거돼 강제 송환됐다.
한 국제법 전문가는 "필리핀은 국가소추 외에 사인소추가 가능해 범죄 피해자에게 가해자를 직접 기소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며 "그렇다 보니 도피사범들이 여러 건의 범죄를 허위로 지어내기 쉽고 재판까지 가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씨가 이번에 탈옥까지 감행하면서 국내 송환은 더 지연될 전망이다. 현지 법을 중대하게 위반한 행위에 해당해 필리핀 수사당국이 한국행을 결정하지 않고 자국 법정에 세워 징역형을 선고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박씨가 쓴 꼼수는 이미 필리핀 도피사범들 사이에 만연해있다는 게 경찰 판단이다. 현재 필리핀 도피사범은 5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끈질긴 추적 끝에 도피사범을 검거해놓고 데려오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지 않도록 정부가 외교적 노력을 더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형사주권의 문제이므로 필리핀 당국이 자발적·적극적으로 협조해 국내 송환할 수 있게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는 것이 핵심"이라며 "국제조약 등으로 명문화하는 것은 주권 침해 소지가 있어 물밑에서 형사사법공조를 강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