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생존자들의 근황이 일부 전해졌다.
15일 JTBC는 세월호 참사 현장에 있었던 김동수 씨 인터뷰를 보도했다.
김 씨는 '파란 바지 의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2014년 4월 16일 마지막까지 배에 남아 승객을 구했다.
김 씨는 10년간 트라우마와 싸우느라 고통스러웠다는 얘기를 했다.
그는 "이렇게 다 뿌옜어요 전체가. (앞이) 1㎞도 안 보이고 몇백 미터 보이는데 출항을 할 거래요"라며 그날을 또 회상했다.
김 씨는 "갑자기 배가 휙 돌면서 그냥 나는 바다 쪽으로 굴러떨어져서…"라고 덧붙였다.
나가야 산다는 걸 직감했다는 김 씨는 "형님, 빨리 가라고. 우리 나가 있어야 구조될 거니까"라고 했다.
배는 빠른 속도로 기울었고 수 미터 절벽이 생겼을 때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라는 말을 믿은 아이들은 미끄러지고 떨어졌다고 한다.
김 씨는 "자판기가 하늘에 매달려 있고. 3층 바닥에는 다친 사람들이 나뒹굴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배 밖으로 기어 나왔지만 혼자 떠날 수 없었다고도 했다. 아이들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김 씨는 "학생들이 '아저씨 물 차오르면 나갈 수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당시 김 씨는 소방 호스로 몸을 묶고 아이들을 끌어올렸다. 그렇게 정신없이 구한 아이들이 스무 명이었다.
김 씨는 "산 사람들이 배 아래, 유리창 아래 가라앉은 것을 다 봤고. 학생은 책장 막 깨면서 나오려고 하지…"라고 회상했다.
구조선과 헬기가 다가왔지만, 수색 대원은 배 안으로 진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 씨는 "옮겨주지도 않고 위에서 손만 잡는 거예요"라고 주장했다.
김 씨는 뭍으로 나오고 나서야 어깨와 손가락 신경이 망가졌단 걸 느꼈다.
살아서 기쁘기보다 죄책감에 시달린다는 김 씨는 "학생들 그 눈망울까지도 다 기억해요. 일반인 어르신 중 나이 드신 분이 '먼저 나가라'고. 그 메아리까지 있어"라고 말했다.
그는 세월호 참사 이후 고향인 제주도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고통 속에 있다. 경찰서를 왔다갔다하고 구급차에도 실려갔다. 정신병원 폐쇄병동에도 스스로 들어갔었다.
아내 김형숙 씨는 "남편을 범죄자 취급 안 했으면 좋겠어요. 아, 저 사람이 아파서 저렇구나. 얼마나 마음이 아프면 저럴까..."라고 하소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