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송파구 잠실동 잠실새내역 인근엔 튀김 맛집으로 유명한 분식집이 있다. 매일 가게에서 튀김을 튀기는 사장의 이력을 전해 들으면 깜짝 놀랄 법하다. 재계 서열 12위인 KT(한국통신)에서 부사장을 지낸 적이 있기 때문이다.
KT의 마케팅을 진두지휘했던 남규택 전 KTcs 부사장의 마케팅 분투기를 담은 책이 나왔다. ‘가장 낮은 마케팅 이야기’(파이돈 발행).
남 전 사장은 1986년 입사 후 퇴직할 때까지 KT의 브랜드 일관성을 책임진 마케팅 전문가다.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카이스트에서 경영과학 석사 학위를 받은 그는 1986년 KT 경영연구소 근무를 시작으로 무선사업추진본부 시장개발부장, KTF 마케팅기획실장, 경영기획담당, 비서실장, 브랜드전략실장, 시너지경영실장, 마케팅부문장, KTCS 사장을 거쳤다. 20년 가까이 마케팅을 담당하면서 빅 브랜드 런칭, 디자인 경영, 영화 마케팅, 월드컵 마케팅 등 여러 마케팅 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마케터다.
부제목이 '쇼, 쿡, 올레 그리고 아이폰 마케팅 실전 사례'인 책은 휴대전화 마케팅을 둘러싼 혁신적인 시도들과 통신업계 내부의 경쟁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아울러 향후 마케팅에서 주목해야 할 이슈들을 점검하고 디지털 마케팅 및 브랜딩과 관련한 핵심적인 이론들을 소개한다.
KT의 뿌리는 1885년 설립된 한성전보총국이다. 1981년 체신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통신 분야가 분리돼 정부가 지분을 100% 보유한 KT(당시 사명은 한국전기통신공사)가 설립됐다. 1990년대 초반과 중반에 KT가 독점권을 가졌던 국제전화와 시외전화에 드디어 경쟁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통신사업자들에 마케팅이란 단어는 경영학의 한 분야에 불과했다. 그도 그럴 것이 1885년 전신(電信)을 시작으로 통신업을 영위해온 KT는 100년 넘게 경쟁다운 경쟁을 한 적이 없었다.
저자에 따르면, 대한민국 통신 시장에서의 본격적인 경쟁은 무선 시장에서 시작됐다. 1990년대 초반 KT는 한국이동통신이라는 자회사를 통해 이동통신 사업을 영위하다가 1994년 타사에 넘겨주게 되고 그때부터 KT 내부에선 이동통신사업의 재개를 외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경쟁에 따른 스트레스가 없었던 저자는 1997년 10월 1일 5개 사업자가 이동통신 시장에서 혈투를 시작하면서 피 말리는 마케팅 현장에 뛰어들었다. ‘가장 낮은 마케팅’의 시작이 그렇게 시작됐다.
저자는 시장에 대한 감각과 통신 서비스에 대한 지식을 보유한 마케팅 전문가이지만 언론엔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따라서 책엔 저자가 소개하는 처음으로 공개하는 내용이 상당수 포함돼 있다. 마케팅 전쟁에서 직접 경험한 사례를 통해 독자들은 시행착오 없이 마케팅의 본질과 핵심에 도달할 수 있다.
마케팅 분야 대가들의 교과서적인 이론에서 벗어난 점은 책의 가장 큰 특징이다. 현실 세계를 정확하게 그리는 데 한계가 있는 이론 대신 머리 위로 포탄이 날아다니는 마케팅 전쟁 현장이 담겨 있기 때문. 저자의 경험과 깨달음을 따라가다 보면 마케터가 반드시 갖춰야 할 자질과 역량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1장에서 저자는 마케팅 일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이 고객 마음을 읽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어떻게 해야 고객의 진심을 읽어 낼 수 있을까? 필자는 특정 상품 또는 서비스에 대한 고객의 생각, 느낌, 연상, 태도 등을 상대적으로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도구로써 고객들에게 제공하고자 하는 상품 또는 서비스에 대한 코드(code)를 읽는 방법과 소셜 미디어상의 비정형화된 소셜 데이터를 분석해 대중의 심리적 동향이나 사회적 흐름 등을 파악하는 소셜 분석(socialytics) 등 두 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저자는 2장에서 마케터를 꿈꾸는 이들에게 마케터로 살며 겪어야 하는 업무 외적 어려움을 실제 사례와 함께 기술한다. 마케팅 청탁과 타 부서와의 갈등, 광고를 집행하면서 겪은 에피소드를 포함해 CEO 등 경영책임자들이 성과지향형 조직문화를 만들기 위해 무엇을 신경 써야 하는지도 소개한다. 특히 KT의 올레(olleh), 쿡(QOOK) 같은 광고 시리즈의 성공 비결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언급해 주목을 모은다.
3장엔 마케팅 현장에서 벌어졌던 저자의 생생한 체험이 담겨 있다. 필자가 직접 경험한 마케팅 사례별로 무슨 고민을 했고,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방안을 마련해 어떻게 실행에 옮겼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어떤 시사점이나 교훈을 얻을 수 있었는가를 중점적으로 서술한다.
신비주의에 가까운 CF로 젊은 층의 이목을 끌었던 KT 경쟁사의 위력적인 TTL 브랜드 마케팅에 맞서 2000년 여성 전용 브랜드 ‘드라마(Drama)’를 출시한 이야기, 2002년 월드컵 마케팅의 실패를 2006년 월드컵 마케팅에서 6개월간 설욕하는 과정 등이 한 편의 드라마를 방불케 한다.
저자는 2018년 KT의 고객서비스 플랫폼 기업인 KTcs의 대표로 재직할 무렵 여름 휴가철을 맞아 생활밀착형 앱을 개발해 ‘전국 가성비 맛집지도’ 서비스를 제공한 바 있다. 사용자들은 당시 앱을 통해 맛, 가격, 양을 기준으로 맛있는 음식을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하는 ‘가성비 식당’의 정보를 활용할 수 있었다. 저자가 퇴직 후 분식당을 운영하는 것도 어쩌면 책에서 그토록 강조한 ‘가장 낮은 마케팅’을 실천하는 것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