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회의 12·12 군사반란을 소재로 한 영화 ‘서울의 봄’이 1000만 관객을 목전에 두면서 김영삼 전 대통령(YS)에게 누리꾼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이 면전에서 독설을 날릴 정도로 하나회 수장이었던 전두환을 혐오했기 때문이다.
1929년 태어나 2015년 향년 86세로 서거한 YS는 거침없는 말과 행동으로 여러 에피소드를 남겼다. YS는 1992년 민주자유당(민자당) 후보로 대선에서 승리해 1993년 2월 취임했다. 민자당은 ‘전두환 정당’으로 불린 민주정의당(민정당)의 맥을 이어받은 정당이었지만, YS는 전두환이 주도했던 하나회를 탐탁잖게 여겨 취임하자마자 숙청 작업에 돌입했다. 취임 13일 만에 육군참모총장과 국군기무사령관을 전격 경질한 것을 시작으로 하나회를 모조리 숙청함으로써 30여년간 한국 사회를 쥐락펴락한 군부를 퇴조시키고 군내 특정 인맥을 청산했다.
YS는 늘 직진했다. 취임 첫해부터 '역사 바로 세우기'를 내세우며 반일 행보를 했다. 1995년 에토 다카미 당시 일본 총무청장관이 일본의 식민통치가 조선에 좋은 측면도 있었다고 말하자 YS는 “이번 망언을 포함해 건국 이래 일본의 망언이 서른 번은 될 것 같다. 그래서 이번에 버르장머리를 기어이 고쳐놓아야 되겠다. 문민정부는 군사정부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각에선 김 전 대통령 임기 말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때 일본이 한국을 돕지 않은 것을 YS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YS는 12·12 주역들을 처벌하는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통해 전두환을 포함한 신군부의 재판 회부를 이끌어냈다. 전두환은 1996년 8월 서울지방법원 1심 재판부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해 12월 서울고등법원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으며,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형량이 최종 확정됐다. 다만 YS는 1997년 12월 전두환을 특별 사면했다.
YS는 퇴임 후에도 면전에 대고 대놓고 면박할 정도로 전두환을 혐오했다.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YS는 2010년 8월 이명박 당시 대통령 초청으로 청와대에 갔을 때 전두환이 함께 초대된 것을 알고 "‘전두환이는 왜 불렀노’ (내가 처벌했기 때문에) 대통령도 아니데이. 죽어도 국립묘지도 못 간다”라고 전두환 면전에서 말했다. 당시 청와대 관계자들이 당혹스러워할 정도로 발언 수위가 셌다.
이어진 오찬에서 전두환이 “와인 더 없느냐”고 하자 YS는 “청와대에 술 먹으러 왔나”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화가 난 전두환이 일찍 만찬 자리를 떴다고 한다.
1931년생인 전두환은 2021년 향년 90세로 사망했다.
둘의 악연은 10·26 사태 직후인 1980년 전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12·12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은 쿠데타 이듬해인 1980년 5·17 조치(정권 장악을 위해 주도한 비상계엄 확대 조치)로 YS를 가택 연금하고 정계 은퇴를 강요했다. 전두환은 YS가 아들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게 했으며, YS 측근들은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숱한 고문을 당했다. 툭하면 자신을 가택 연금한 전두환에게 맞서 YS는 목숨을 내걸고 23일간 단식 투쟁을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