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난당한 문화재를 십수 년간 창고에 숨겨둔 전직 사립박물관장이 법원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 34부(부장판사 강규태)가 문화재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A(82·남) 씨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고 연합뉴스가 14일 보도했다.
매체에 따르면 A 씨는 2001년 7월부터 2013년 8월까지 약 12년간 서울 종로구에 있는 무허가 주택(창고)에 도난당한 일반동산문화재 불화 4점을 은닉한 혐의로 올해 4월 재판에 넘겨졌다.
일반동산문화재는 제작된 지 50년 이상 지난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 중 상태가 양호하고 희소성, 명확성, 특이성, 시대성이 있다고 판단된 것을 의미한다.
A 씨가 은닉한 불화 4점 중엔 1993년 7월 대구 달성군 유가사 대웅전에서 도난당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도 있었다. 유가사 영산회상도는 가로 3.5m, 세로 4m가 넘는 대형 불화로, 문화재청은 2009년 이를 도난 문화재로 등록했다.
A 씨는 이 문화재들을 신문지나 비닐 등으로 포장한 뒤 창고에 보관, 관리를 전혀 하지 않았다. 경찰이 현장을 수색한 결과 창고엔 따로 습기나 온도를 조절하는 장치가 없었을뿐더러 사방에 곰팡이가 피고 먼지가 쌓여 있었다고 한다.
또 불화 하단에 기재하는 화기(畵記·제작 시기와 봉안처, 화공 이름 등을 적어둔 기록)도 모두 훼손된 상태였다.
은닉 사실이 적발되며 재판을 받게 된 A 씨는 "1990년대에 이를 판매한 고미술상이 도난 문화재라는 사실을 숨겨서 몰랐다"는 취지의 주장을 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사학을 전공한 A 씨가 오랜 기간 불교 문화재를 수집해 왔고, 1993년부터 2017년까지 서울 종로구의 한 사립박물관을 운영한 점에 미뤄볼 때 그가 도난 문화재란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고 봤다.
재판부는 "A 씨는 학력과 경력상 그 누구보다 불교 문화재 전반에 관해 전문적인 식견을 갖추고 있다. 각 불화의 상태를 보고 도난 문화재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을 것임에도 '도난품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등의 변명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다만 박물관을 운영하며 불교문화 대중화에 기여한 점, 고령인 점, 불화를 보관하기 시작한 시점엔 일반동산문화재 은닉을 처벌하는 규정이 없던 점 등을 고려했다"며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한편 A 씨는 이전에도 비슷한 범행을 저지른 적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그는 2009~2014년 경기 성남시의 한 건물 지하에 불교 미술품 16점과 지석(誌石) 316점을 은닉, 2001~2014년엔 종로구 창고에 불교 문화재 39점을 숨겨둔 것으로 드러났다. 2001~2014년에도 같은 창고에 다른 불교 문화재 34점을 보관했다. 그가 보관한 것들 중엔 17~18세기에 제작된 불화 등 국가지정 문화재(국보·보물)로 지정될 가능성이 높은 문화재가 꽤 있었다고 한다.
이 일로 A 씨는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세 차례 모두 집행유예에 그쳤다.
문화재보호법 제92조(손상 또는 은닉 등의 죄)에 따르면 국가지정문화재(국가무형문화재는 제외)를 손상하거나 절취 또는 은닉, 그 밖의 방법으로 그 효용을 해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이외 지정문화재 또는 임시지정문화재(건조물 제외)이거나 일반동산문화재의 경우 2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할 수 있다.
또 화기가 훼손된 문화재를 취득한 경우엔 고의성이 없더라도 처벌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