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올림픽을 개최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을 만큼 엉망이던 한국의 응급의료는 1994년 응급의료법 제정을 계기로 비약적으로 발전, 권역별 외상센터와 닥터헬기를 갖추기에 이르렀다. 이 응급의료법 초안을 만드는데 헌신한 박윤형(朴允馨) 순천향대 의대 석좌교수가 14일 오전 10시40분께 서울 노원구 자택에서 담도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18일 전했다. 향년 69세.
1954년 대구에서 태어난 고인은 1983년 경희대 의대를 졸업한 뒤 경북 상주군 보건소장을 시작으로 1984년 한국인구보건연구원(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책임연구원, 1988∼1991년 국립소록도병원 진료과장을 거쳐 1991∼1997년 보건사회부(1994년부터 보건복지부) 지역의료과장으로 일했다.
고인은 1990년부터 응급의료체계 기본계획을 세우는 데 관여했다. 당시 한국의 응급의료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1988년 서울올림픽 대회를 앞두고 점검한 결과 "대회 도중 응급환자가 생길 경우 대비책이 없다"고 지적했을 만큼 참담한 수준이었다. 아예 '응급의학'이라는 학문이 없었고, 병원 응급실에는 전공 교수 한명 없이 인턴만 근무할 때였다. 고인과 함께 응급의료법 초안을 작성한 임경수 정읍아산병원장은 "응급실에 들어온 환자 중 절반은 죽어 나갈 때였죠. 하마터면 88 올림픽을 개최하지 못할 뻔했다니까요"라고 회상했다.
정부는 급한 대로 미국에서 대형 구급차 5대를 긴급 수입, 잠실올림픽경기장과 가장 가까운 강남세브란스병원에 배치해 올림픽을 치른 뒤 보건사회부 지역의료과(과장 오대규) 주도로 국내 응급의료의 현황을 파악했고, 고인도 오 과장을 도왔다. 대한응급의학회는 1989년 12월에 창립했다.
오 과장에 이어 지역의료과장이 된 고인은 임경수, 이한식 교수와 함께 '응급실 운영 지침'을 처음으로 만들어 1991년 6월 전국 병원 응급실에 배포했고, 응급의료법 초안 작성에 착수했다. 임 원장은 "셋이서 틈틈이 작업을 하느라 전국 호텔 방을 전전해가며 미국·일본 법을 참고해서 초안을 만들었다"며 "고인은 이렇게 만든 초안을 가지고 국회와 소비자단체 등을 돌며 열정적으로 설득했다"고 기억했다. 모법에 이어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만들 때는 수유리 4·19 묘역 근처의 한 모텔에서 합숙하기도 했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등 대형 사고가 잇따르자 정부는 대한의학회에 "응급의학과를 전문과(科)로 인정하라"라고 매일 독촉했다. 지역의료과장이던 고인이 각 임상과의 전공의 정원을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을 압박 수단으로 활용했다. 결국 대한의학회는 1995년 8월 응급의학과를 전문과로 인정했고, 1996년 1월부터 응급의학과 전문의 시험을 볼 수 있게 했다.
이후 고인은 1998∼1999년 WHO 자문관을 거쳐 대한병원협회 사무총장, 대한의사협회 기획이사 등으로 일했고, 2002∼2020년에는 순천향대 예방의학교실 교수로 강단에 섰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2005∼2006년에는 경기도립의료원장으로 일했고, 2008∼2014년 보건복지부 규제심사위원장을 지냈다.
'응급의료정책과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1998), '2001 보건의료법전'(2001), '의료정책 현장에서 답을 찾다'(2012), '한국의학사'(2012), '현대의료의 발자취'(2012), '보건의료법규'(2015) 등 저서와 '보건의료경제학'(2010), '의료윤리규약과 윤리적 쟁점 사례'(2012) 등 번역서를 남겼다. 올해 초 대한응급의학회가 주는 '윤한덕 응급의료발전 공로상'을 받았다.
임 원장은 "나보다 연배인데도 결코 폼을 잡지 않았고, 털털한 동네 아저씨 같은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부인 주유경씨는 "일을 너무 많이 했고, 그만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며 "자신이 아프다는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마음 아프다"고 울먹였다.
유족은 부인 주유경씨와 사이에 딸 박경화씨와 아들 박중휘씨 등이 있다. 지난 17일 오전 발인을 거쳐 일산 공감 수목원나무 밑에 안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