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남산 '기억의 터'에 있는 일부 조형물이 결국 철거됐다.
철거를 두고 일부 시민단체 반발이 컸으나, 서울시는 전날 오전 작업에 착수, 민중미술가 임옥상 화백의 작품 '대지의 눈'과 '세상의 배꼽' 등 철거를 5일 완료했다.
2016년 서울시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과 피해기록, 일제의 만행 등을 기록한 내용을 중심으로 조성한 기억의 터에 설치된 조형물 2점이 이날 사라졌다고 연합뉴스가 보도했다.
철거된 작품은 사람의 눈을 뜬 모습을 형상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증언록과 피해 기록 등이 새겨져 있던 '대지의 눈'과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글귀가 새겨진 '세상의 배꼽'이다.
시는 두 조형물을 만든 임옥상 화백이 최근 성추행 유죄 판결을 받자, '성추행 유죄 판결을 받은 작가의 작품을 존치하는 것은 위안부를 모욕하는 일'이라며 철거를 결정했다.
시에 따르면 지난달 8~9일 서울시민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 65%가 철거에 동의했다. 일부는 '조형물에 표기된 작가 이름만 삭제하자'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기억의 터가 시민 모금 등을 거쳐 조성된 공간인 점을 고려해 터는 유지하되 그 안에 설치된 임 화백의 조형물만 철거하는 걸로 가닥을 잡은 시는 본격적인 철거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작업은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일부 시민이 철거에 반대하며 작업을 저지했기 때문이다.
정의기억연대를 포함한 일부 여성 단체 회원 50여 명은 철거 첫날인 지난 4일 오전 6시쯤 작업이 시작되자, 현장에서 반대 집회를 열었다.
'기억의 터 훼손 당장 중단하라', '위안부 지우기 중단하라'는 등의 문구가 적힌 팻말을 든 시민단체 회원들은 철거 예정인 조형물을 보라색 천으로 덮고 철거작업자들의 출입을 막았다.
이들은 임 화백의 성추행은 규탄하지만, 작품 철거엔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작품이 철거돼 피해자의 이름과 증언이 사라지면 일본의 과오가 지워질 거란 우려에서다.
한경희 정의기억연대 사무총장은 "기억의 터 철거는 성폭력 저항의 역사를 지우려는 서울시의 기만적 행태"라고 주장, 임옥상을 핑계로 일본군 위안부 역사를 통째로 지우려는 서울시를 규탄한다"고 했다. "시는 성폭력 근절 대책을 먼저 세우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집회는 2시간 넘게 이어졌고, 시민단체 회원들은 자진해산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일부는 현장에 남아 늦은 밤까지 자리를 지켰고, 당일 작업을 끝내려던 시는 일단 철거를 중단하고 철수한 것으로 전해졌다.
상황이 이렇자, 오세훈 서울시장은 페이스북에 '시민단체는 죽었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이들의 행동을 지적했다.
오 시장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단체가 성추행을 인정한 작가의 작품 철거를 막아섰다"며 "존재 이유를 스스로 부정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이어 "많은 시민 단체가 같은 사안을 두고도 '우리 편'이 하면 허물을 감싸주고 '상대편'이 하면 무자비한 비판의 날을 들이댄다"며 "사회 정의를 세우자고 시작한 일이었을 텐 데 설립 목적에서 한참 벗어났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철거 작업이 마무리된 후 위안부 피해자들을 제대로 기릴 수 있도록 조형물을 재조성하겠다"고 밝혔다.
남은 작업은 5일 오전 마무리됐다. 시는 기억의 터 조성 당시 관계자, 전문가 등의 제안을 받아 공공미술위원회의 자문 등을 거쳐 조형물이 철거된 자리에 새로운 콘텐츠를 채우는 등 방안을 마련해 나갈 방침이다.
1세대 민중 화가로 활동, 50여 년간 다양한 작품을 선보인 임 화백은 최근 '미투' 사건이 터지며 논란의 중심에 섰다.
10년 전인 2013년 자신의 미술 연구소에서 일하던 직원을 강제 추행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난 것이다. 직원을 강제로 껴안고 입을 맞추는 등 추행한 혐의로 지난 6월 불구속기소 된 그는 지난달 17일 열린 1심에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40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도 명령받았다. 이에 불복한 임 화백은 이후 항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선고 결과와 관계 없이 시는 임 화백이 강제추행 혐의로 재판받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시립 시설 내에 설치된 그의 작품을 철거하겠다고 밝혔다. 첫 재판이 열린 뒤 국회도서관 복도에 걸린 작품은 곧장 뗐다.
철거 대상이 된 작품은 △기억의 터 추모공원에 설치된 '대지의 눈' '세상의 배꼽' △서울시 서소문청사 앞 '서울을 그리다' △하늘공원 '하늘을 담는 그릇' △서울숲 '무장애놀이터' △광화문역 '광화문의 역사' 등 총 6점으로, 이중 시민 1만 9755명의 모금을 거쳐 설치된 기억의 터 내 조형물만 철거 의견 청취 절차를 거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