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장애(지적·자폐)인의 투표 참여 방식을 개선해달라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낸 장애인들이 1심에서 패소했다. 원고 측은 항소를 예고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6부(부장판사 이원석)는 16일 발달장애인인 박경인·임종운씨가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차별 구제 청구 소송에서 원고들의 소를 각하했다.
각하란 소송의 요건을 제대로 갖추지 않으면 본안을 판단하지 않고 재판 절차를 끝내는 것을 말한다. 재판부는 박씨 등의 청구가 현행법상 법원 심리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원고들의 청구처럼 이해하기 쉬운 형태의 공보물 등이 배포되기 위해서는 선거후보자가 발달장애인을 위해 점자형 공보물 등을 별도로 제작해야 하는데 이는 선거법에 위반된다"고 판단했다.
이어 "결국 법률적 근거를 마련한 뒤에야 가능한 조치를 입법 없이 청구하는 것"이라며 "법원이 구제 조치를 명하더라도 피고가 이행할 수 없으므로 부적법한 소송"이라고 설명했다.
공직선거법 65조·66조에 따르면 책자형 선거공보물은 1종으로 제한된다. 같은법 58조는 자유로운 선거활동을 보장하면서도 법에 저촉되는 경우는 허용하지 않고 있다.
후보자 사진이 들어간 그림투표용지를 제공해야 한다는 원고 측 주장에 대해서도 "투표용지의 기재사항과 방법을 규정한 공직선거법에 위배되어 허용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발달장애인을 위한 이해하기 쉬운 형태의 정보 제작 가이드라인은 이미 상당한 수준이므로 선관위가 별도로 마련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고 판시했다.
박씨 측은 법원 판단이 부당하다며 항소할 것을 시사했다.
박씨 측 소송대리인 김윤진 변호사는 선고 직후 기자회견에서 "발달장애인 참정권 보장이라는 명제에 동의하면서도 사법부는 행정부 재량 사항이라고 하고, 행정부는 입법부 결단이 필요하다고 하며, 입법부는 법적 의무가 없다고 주장하는 상황"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이날 판결을 두고 "법원에서 장애인 차별 청구 구제 소송의 기초 의의도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며 "청구가 받아들여지는 그날까지 함께하겠다"며 항소를 예고했다.
원고 박경인씨는 "시각장애인에게는 전자정보를, 청각장애인에게는 수어를 제공해 주는데 왜 발달장애인에게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느냐"며 "민주주의 사회에서 누구나 누려야 하는 참정권을 보장받고 싶다"고 토로했다.
김성연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사무국장은 "법원조차 장애인의 권리를 무참히 짓밟았다"며 "제대로 된 권리를 찾고 보장받을 때까지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말했다.
공직선거법 157조6항에 따르면 시각·신체 장애로 직접 투표할 수 없는 사람은 가족이나 직접 지명한 2명을 동반해 투표할 수 있다. 하지만 해당 조항에 발달장애인에 대한 내용이 없어 중앙선관위는 선거지침으로 발달장애인의 투표를 보조해 왔다.
그러나 중앙선관위는 2020년 4월 21대 총선을 앞두고 선거지침에서 발달장애인 투표 보조 내용을 별도 공지없이 삭제했고 이에 두 사람은 발달장애인의 선거 참여를 지원하는 국가 의무를 져버렸다며 지난해 1월 소송을 제기했다.
원고 측은 앞서 열린 5차례 변론에서 발달장애인들을 위해 선거공보물과 공약서를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작성하고 후보자의 사진이 포함된 그림투표용지를 제공하라고 요구했다.
장애인차별금지법 27조는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와 공직선거후보자·정당은 장애인이 선거권, 피선거권, 청원권 등을 포함한 참정권을 행사함에 있어서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선관위는 이에 현행법에 발달장애인에 대한 편의 제공 내용이 없어 법 개정이 선행되어야 의무를 이행할 수 있다고 맞서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