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고 가난한 연애를 하는 사람입니다... 이 상황이 그리 싫지 않습니다”

2022-09-02 16:29

“남친에게 백석의 시를 읽어줬어요”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이혼 후 사귄 남자친구와의 소소하고 행복한 일상을 털어놓은 한 중년 여성의 글이 훈훈함을 자아낸다.

위 사진은 이해를 돕기 위한 것으로 해당 기사 내용과 무관합니다. /Sinseeho·Nutlegal Photographer-shutterstock.com
위 사진은 이해를 돕기 위한 것으로 해당 기사 내용과 무관합니다. /Sinseeho·Nutlegal Photographer-shutterstock.com

누리꾼 A씨는 지난 1월 국내 온라인 커뮤니티 82쿡에 '나이 들고 가난한 이들의 연애'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현재 원문은 삭제된 상태지만, 타 커뮤니티를 통해 공유돼 재조명받고 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몇주 전에 눈이 펑펑 내린 날, 막노동하고 와서 온몸이 쑤신다는 중년의 남친 등을 밟아주며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를 읽어줬어요.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남친은 끙끙 앓는 소리를 내고 눈은 푹푹 내리고 저는 조곤조곤 밟고...

제가 예전에 결혼생활을 했을 때, 신혼을 낡은 아파트에서 시작했었죠.

겨울이면 추워서 창문에 비닐을 둘렀는데 창틀이 워낙 낡아서 바람이 불면 비닐이 붕붕 부풀어 올랐어요.

둘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그걸 보고 있음 한숨이 나왔죠. 전남편은 평생 이런 집에서 살면 어쩌냐고 우울해했지만 제가 그랬어요.

'걱정 마. 우린 아주 좋은 집에 살게 될 거야. 그때가 되면 지금이 그리울지 몰라.'

훗날 우린 정말 좋은 집에서 살게 됐지만 제일 좋은 집에 살 때 우리 결혼은 끝이 났어요.

이혼을 하고 만난 남친은 사업이 안 풀려 요즘 형편이 어려운데, 그냥 있는 그대로의 이 사람과 이 상황이 그리 싫지 않습니다.

일이 잘돼서 돈이 많아지면 또 변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럴듯하게 좋아 보이는 것들이 그리 간절하지도 않고요.

그냥 나이 들면 둘이 어디 한적한 곳에 가서 작은 집을 사서 고쳐 살면 어떨까 싶어요.

백석의 시처럼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서... 그런데 남친은 도시가 좋다네요.

그 나이에 해도 잘 안 들어오는 집으로 이사를 가 놓고는 그래도 도시가 좋다네요.

어쨌든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나이 들면 나이 든 대로, 어떤 삶이든 다 저대로의 즐거움이 있고 낭만도 있더라고요.

그냥 다 살아지는 거 아닌가 싶어요. 눈이 푹푹 내리는 날 백석의 시를 읽는 정도의 마음이 있으면요. 산골엔들 왜 못 살겠어요.

A씨는 해당 글을 읽은 누리꾼들의 공감·격려 댓글에 다음과 같은 댓글을 남겼다.

삽시간에 이만큼 댓글이 달려 깜짝 놀랐어요. 자녀는 없고 동거 아니고 저는 제집이 있어요. 남친 집에 갔다가 좀 밟아달라길래 밢아줬어요. 남친은 백석을 모르고 지극히 현실주의자입니다. 어떻게든 상황을 개선하려고 애쓰고 있고요.

남친을 생각할 때 한숨이 나올 때도 있지만, 우린 결국 찰나를 사는 존재라 생각하기에 오늘 좋으면 됐다고 생각하며 넘어갑니다. 달관한 건 아니고 달관했다 한들 그것조차 삶의 수많은 지점 중 한지점일 뿐이겠죠. 이게 또 깨달음의 끝도 아니고요.

저도 백석 평전 읽어서 그의 현실이 어땠는지 알아요. 근데 제가 지금 북에서 재산 몰수당하고 강제 노역 중인 건 아니니까요.

사실 게시판을 보다가 저 아래 60대 들어선 분이 '50살은 괜찮은 나이니 너무 절망하지 마라'는 글을 읽고 '나이 들어가는 데 가진 것 없는 삶이 그냥 추레하기만 한가'라는 생각을 했어요. 눈 오던 밤에 제가 느꼈던 행복을 공유하고파서 써 봤어요.

제가 여기에 글을 종종 썼는데, 돌아보니 주제가 한결같아요. '이혼해도 괜찮더라' '망해봐도 괜찮다더라' 저마다 괜찮아요.

우리가 가난에 대해 늙음에 대해 실패에 대해 조금만 더 예의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어쨌든 저는 지금 괜찮습니다. 모두 그러시길.

home 방정훈 기자 story@wikitre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