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애니 좋아하는 오타쿠가 이렇게 성공할 줄 몰랐겠지 너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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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힙합에 제이팝을 버무린 독보적 뮤지션, 디핵
바닥에서 정상으로 치고 올라가는 디핵을 인터뷰했다

[권상민의 파 프롬 차트(Far From Chart)] <6> 디핵

음원 차트 진입이 노래의 성공을 의미하는 시대는 저물고 있습니다. 스트리밍 총공과 음원 사재기는 차치하더라도 TV에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차트에 진입하는 노래가 많습니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새로운 성공을 만들어 가는 노래도 있습니다. 음악적 완성도와 듣는 재미를 바탕으로 리스너들의 입소문을 타는 경우죠. '파 프롬 차트'는 그런 노래와 가수를 알리는 연재 기사입니다.

디핵 인스타그램
디핵 인스타그램

디핵은 호감가는 인터뷰이였다.

인터뷰에서 가장 어려운 순간은 인터뷰이를 만난 직후다. 피차 처음 보는 사이지만 분위기가 어색하면 기사에 쓸만한 대화가 나오지 않는다. 기자가 뻔한 날씨와 시덥잖은 농담을 건네는 이유다.

디핵은 달랐다.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해서 나중에 들어오는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자리에 앉자 '오느라 고생하셨죠?'라며 인사를 건넸다. 미리 주문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며 뭐든 물어보라고 웃음을 보였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여기까지 보면 디핵을 타고난 인싸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 않다. 학창 시절, 그는 일본 애니를 좋아하는 내성적인 아이였다. 아싸에 가까웠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먹이사슬의 최하층, 포식자들의 가장 좋은 먹잇감'이었다.

기자는 바닥에서 정상으로 치고 올라가는 디핵 이동훈의 인생과 음악 세계를 들여다봤다.

이하 뮤비 '너와 나의 아르카디아' 중 / 유튜브 '서울뮤직'
이하 뮤비 '너와 나의 아르카디아' 중 / 유튜브 '서울뮤직'

"중학생 때는 학교 가는 게 두려웠어요. 남자애들은 저한테 만화책을 집어던지고 여자애들은 그거 보고 손가락질했어요. 많이 힘들었죠. '오늘 옥상에서 떨어지면 내일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을 정도니까요"

그런 동훈에게도 특별한 친구는 있었다. 이진수. 진수는 아이들이 동훈을 괴롭히지 않도록 막아줬다. 동훈은 진수와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힙합도 그중 하나였다. 진수가 다이나믹듀오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중3 축제 때는 학생들 앞에서 진수와 '링 마이 벨'을 부르기도 했다. 일진들은 놀렸지만 동훈에게는 상징적인 순간이었다.

"(공연 끝나고) 전부 비웃더라고요. 그때 학교 운동장에서 울면서 제가 진수한테 말했어요. '진짜 저기서 나 비웃었던 애들 나중에 무릎 꿇게 한다'라고. 뭔가 일본 드라마 1화 마지막 장면 대사 같았죠(웃음)"

그렇게 동훈은 힙합에 빠져들었다. 'Drop the Hack'을 뜻하는 디핵이라는 랩 네임을 짓고 가사를 쓰기 시작했다. 영웨이브, 제이씨유카, 제이키 등 훗날 '디핵사단'의 멤버가 될 친구들도 사귀었다. 힙합 좀 한다는 사람들도 찾아다녔다. 매드클라운, 라임어택도 그렇게 만났다. 디핵은 두 사람을 스승으로 여겼다.

"매드클라운은 고3 때 만났어요. 동네 교회에서 힙합을 가르쳐준다고 해서 갔는데 매드클라운이 있어서 놀랐었죠. 라임어택은 스무 살에 제가 다니던 음악학교 교수님으로 만났어요. 두 분 다 특별히 강조했던 게 '네가 겪었던 이야기를 가사에 담으라' 였어요"

뮤비 '현실탈환작전' 중 / 유튜브 '서울뮤직'
뮤비 '현실탈환작전' 중 / 유튜브 '서울뮤직'
뮤비 '오하요 마이 나이트' 중 / 유튜브 '서울뮤직'
뮤비 '오하요 마이 나이트' 중 / 유튜브 '서울뮤직'

실제로 디핵의 가사에는 허세와 여자, 명품 자랑을 보기 어렵다. 그는 대신 자신이 겪은 사랑과 성장 이야기를 시적인 언어로 가사에 녹여냈다. 디핵 음악의 특징인 감미로운 가사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는 "살아오면서 여러 중요한 순간에 저를 움직인 게 사랑이었다""매번 그 순간을 잊지 않으려고 가사에 담았다"고 말했다.

노래 곳곳에 배인 일본 문화도 특징이다. 한국어와 일본어 가사가 섞여 있고 뮤직비디오 배경도 주로 일본이다. 디핵이 재일교포나 일본 유학파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그는 일본어를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다. "일본 애니 중에 자막 없는 것도 많았다. 답답해서 직접 사전 찾아보며 배우게 됐다"고 말했다.

그렇게 디핵은 케이힙합에 제이팝을 버무린 독특한 영역을 개척했다. 좋게 보면 새로운 시도지만 비주류에 가까운 것도 사실이다. 디핵은 그런 평가에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비주류의 최전선에서 사명감을 느끼고 있다.

"요즘 후시랑 작업 중인데 저희 모토가 '비주류의 끝'이에요(웃음). 2021년 대한민국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울 음악, 모두가 아닌 일부를 위한 음악을 하는 거죠. 그 일부가 지금보다 커지도록 하는 게 저희 목표인 거고요"

일부가 커지는 과정은 착실하게 이뤄지고 있다. 디핵은 최근 한국과 일본에서 팬이 늘었는데 힙합 리스너가 아닌 보통 사람들이 많다며 놀라워했다.

이하 디핵의 새 자동차 / 디핵 인스타그램
이하 디핵의 새 자동차 / 디핵 인스타그램

디핵의 음악은 비주류일지 모르나 수익은 주류에 들어섰다. 그는 얼마 전 빨간색 스포츠카를 구입했다. 취득세 포함 7000만 원이 넘는 BMW Z4 20i다. 자동차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많이 왔다. 학창 시절 동훈을 놀리던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자동차를 부러워했고 디핵을 만나길 원했다. 먹이사슬의 바닥에 있던 동훈은 그렇게 관계를 역전했다.

하지만 자동차 포스팅 이후 디핵을 가장 기쁘게 하는 것은 10년 전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있는 학생들이 보낸 디엠이다. 일본 애니를 좋아해서 오타쿠라고 놀림당할 아이들이 디핵 덕분에 취향을 드러낼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제가 잘 됨으로 인해서 그러한 취향을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는 게 감동이에요. 애니 보는 게 부끄럽지 않다, 애니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요"

바닥에서 정상으로 치고 올라가는 디핵의 스토리는 현재진행형이다.

지난해 6월 발표한 '오하요 마이 나이트'는 유튜브에서의 인기를 바탕으로 최근 멜론 차트와 노래방 인기 순위에 이름을 올렸다. 지난 5월에는 '너와 나의 아르카디아' 뮤직비디오도 공개했다. 역대 가장 많은 제작비를 쏟은 디핵 뮤비로 후반부 트럭 주행 씬의 독특한 영상미가 압권이다. '비주류의 끝'이라는 후시와의 작업도 순조롭다. 디핵은 "최고를 만들어보자"라는 심정으로 작업 중이라고 말했다.

디핵의 다음 앨범은 빠르면 오는 7월 만날 수 있다.

뮤비 '너와 나의 아르카디아' / 유튜브 ‘서울뮤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