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가 '합의를 하지 그러냐? 재판이 계속 진행되면 너한테 좋을 것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판사가 어떻게 피해자에게 합의하라고 말할 수 있나요?"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가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인 직장인 이예린(가명)씨와 지난해 2월 6일 진행한 인터뷰의 일부다.
휴먼라이츠워치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로부터 '생존'한 여성 12명과 정부·민간 전문가 등을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심층 면담한 보고서 '내 인생은 당신의 포르노가 아니다: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를 16일 공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어느 날 이씨는 자신에게 추근대곤 했던 유부남 직장 상사에게서 탁상형 시계를 선물 받았다.
그는 별생각 없이 귀가 후 침실에 던져뒀는데, 깜빡거리는 빨간 불빛이 신경 쓰여 며칠 뒤 다른 방으로 옮겨놨다.
그런데 시계를 옮긴 바로 다음 날, 상사는 '시계를 원치 않으면 돌려달라'고 말했다.
수상한 느낌에 이씨는 시계의 기종을 인터넷에 검색했고, 해당 시계가 '어둠 속에서도 완벽한 영상을 제공'하는 시계로 팔리고 있는 걸 알아챘다.
한 달 동안 침실에 두었던 시계는 바로 카메라가 달린 몰카용 시계였다. 상사는 이씨의 방을 몰래 촬영한 영상을 휴대폰으로 몰래 스트리밍해 온 것이다.
이씨가 전화해 이를 따지자 상사는 "그거 검색하느라고 밤에 잠을 안 자고 있던 거야?"라고 말해 섬뜩함을 자아냈다.
이씨의 상사는 1심에서 징역 10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항소심을 밟고 있는 이씨는 1년이 지난 아직까지 우울증과 불안증약을 복용 중이다.
이씨는 "밤마다 울었다. 잠도 못 자고 진정제를 먹어야 했다"면서 "때로는 아무 일 없는데도 내 방에서 이유 없이 너무 무서울 때가 있다"고 고통을 호소했다.
보고서는 "형사상 대응에서 근본적인 문제는 가해자가 받는 처벌이 생존자가 겪는 피해 수준에 상응하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대부분의 가해자에게 선고되는 형량이 지나치게 낮아 생존자들이 신고를 포기하게 만들고 가해자가 처벌을 받는 경우에도 이 범죄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다"고 분석했다.
보고서는 사법기관이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을 바르게 판단할 수 있도록 피해자들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해 교육하라고 경찰청, 대검찰청, 대법원에 권고했다
한편 경찰이 가해자를 체포해 검찰로 넘긴 사건 중 절반 가까이는 불기소 처분으로 끝난다. 2019년 검찰은 성범죄 사건의 46.8%에 대해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같은 기간 불법 촬영과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불법 촬영물 제작·유포 사건에 대한 불기소 처분율은 43.5%로 집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