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대본'은 평범해서 오히려 특별한 웹드라마다. 전세 사기를 당해 동거를 시작하거나 계약 연애를 하다 사랑에 빠지는 과도한 설정이 흔한 웹드 업계에서 자극적인 설정 없이 대학생들 일상을 소소하게 그려낸다.
'이나'는 짧은대본에 등장하는 캐릭터 중에서도 가장 평범하다. 소심한 성격 탓에 하루 종일 생각에 빠져 있고 사소한 오해로 남자친구와 하루 건너 하루 다툰다. 우리네 일상을 보는 듯하다.
그러나 이나 역을 맡은 배우 윤상정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많은 신인 배우들이 혹시 있을지 모를 SNS 캐스팅을 기대하며 인스타그램에 보정 범벅 셀카를 올리는 요즘 윤상정은 인스타를 비공개로 둔다. 대신 블로그에 글을 올린다. 다녀온 여행지, 주말에 읽은 책, 직접 쓴 시를 섬세한 언어로 전시한다. 내 얼굴보다 내 생각을 봐주세요, 라고 말하듯이.
연극영화과를 다니다 법학과로 편입한 이력도 눈에 띈다. 가장 치열하게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전공에서 가장 치열하게 이성을 겨루는 전공으로 바꿨다. 대학에서 다양한 학문을 공부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은 배우 윤상정을 만나봤다.
Q. 짧은대본은 어떻게 출연하게 됐어요?
A. 정국 역의 중규 오빠랑 원래 알던 사이에요. 하루는 친구랑 셋이서 같이 밥을 먹는데 중규 오빠가 짧은대본에서 여자 연기자를 구하고 있다고 알려줬어요. 오디션을 봤고 운 좋게 합격했어요.
Q. 극 중 이나는 소심한 성격이에요. 상정 씨랑 비슷한가요?
A. 이나랑 비슷한 부분이 있어요. 말 한마디 듣고 상대방이 무슨 의도로 말했을까 하루종일 고민해요.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말은 하지 않는데 표정에서는 드러나고... 혈액형도 이나랑 같은 A형이에요(웃음).
다른 점도 있어요. 이나는 의심스러운 뭔가가 있으면 상대방에게 집요하게 물어봐요. 저는 그러지 않아요. 의심이라는 게 꼬리에 꼬리를 물잖아요. 그러다 보면 결국 제가 힘들거든요. 의심스러운 상황이 반복되면 상대를 향한 마음을 정리해요.
Q. 요즘 이나를 언급하는 댓글이 많이 늘었어요. 어떤 댓글을 많이 받나요?
A. 짧은대본을 처음 보신 분들은 '연기인 걸 알지만 숨이 막힌다', '전 여친이 떠오른다'며 답답해하세요. 오래 보신 분들은 '이나의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 '이나도 그동안 많이 참았다'며 이해해 주세요.
Q.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뭔가요?
A. 첫 촬영이었던 '남친 소개 금지 여우 종특'이요. 피디님 말씀이 너무 기억에 남아요. "상정아 너는 항상 웃고 있어. 그런데 눈빛이 의미하는 바는 다 달라. 그걸 연기에 살리고 싶어" 저도 몰랐는데 듣고 보니 그렇더라고요. 저는 좋아도 웃고 화나도 웃는데 눈빛은 다 달라요(웃음). 그동안 제가 전형적인 연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 고민이었는데 피디님 덕분에 저만의 연기를 찾은 것 같아 너무 감사해요.
Q. 새로운 웹드가 쏟아지는데 짧은대본 인기는 흔들림이 없어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A. 평범하기 때문 아닐까요. 대학생들이라면 누구나 겪을 법한 현실적인 내용이잖아요. 백마 탄 왕자님이 등장해서 사랑에 빠지는 게 아니라 친구로 지내다가 호감이 생기는 것처럼요. 주인공 한 명이 아니라 등장인물 여러 명이 각자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도 보는 분들로 하여금 공감을 사는 것 같아요.
실제로 본 윤상정은 이나와 달랐다. 남자친구에게 애교를 부리거나 찡찡거리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자세는 곧았고 말투는 차분했다. 목소리에서는 울림이 느껴졌다. 질문을 받으면 신중하게 단어를 골라 오롯한 문장을 구사했다. 생각이 깊어 보였다.
나이를 묻자 98년생, 아직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전공이 특이했다. 예술고등학교에서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그는 대학도 자연스레 연극영화과로 진학했다. 그러다 마음을 바꿔 법학과로 편입했다. "업으로 하는 연기와 대학에서의 전공이 꼭 같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다양한 학문을 배워보고 싶었고 법학은 현실에서 필요가 많을 것 같았어요"
이러한 생각은 윤상정의 인스타그램에서도 엿볼 수 있다. 신인 배우들이 자신을 홍보하기 위해 프로필 사진을 잔뜩 올리는 것과 다르게 윤상정은 인스타를 비공개로 둔다. 팔로우를 신청해서 들어가도 철 지난 사진 몇 장이 전부다.
그는 대신 블로그를 한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꾸민 블로그에는 그가 읽은 책, 여행한 나라, 특별한 경험을 기록한 글이 가득하다. 다이어리에 쓴 글을 옮겨 적다가 블로그를 시작했다는 그는 언젠가 책을 써보고 싶다는 바람도 수줍게 꺼냈다.
짧은대본으로 얼굴을 알렸지만 사실 윤상정은 여러 작품에 출연했다. 단편영화 '까치까치 설날은(2018)', '그녀의 씬(2019)', 독립영화 '나만 없어 고양이(2019)' 등이다. 올해 초에는 배우 지망생들 사이에서 유명한 '더블케이 연극학교'도 수료했다. 내공을 착실하게 쌓고 있다.
고민을 묻자 배우로서 자신의 경쟁력을 조심스레 언급했다. 외모가 출중하거나 연기가 뛰어난 배우들이 많은데 자신은 뭘로 승부할 수 있을지 고민이라고 말했다.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면서도 조급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서두르지 않고 단단하게 자신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지금까지도 그래왔듯이 오디션을 꾸준히 보면서 제가 배우로서 뭘 내세울 수 있을지 찾을 거예요. 그리고 다양한 공부를 하며 내적으로 성장하고 싶어요. 저는 좋은 배우가 되려면 건강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업으로 배우를 택했을 때도 연기에 건강함이 묻어날 거 같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