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입학 직전인 2001년, 생애 첫 헌혈을 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나눔을 실천했다는 보람도 잠시, 생각지도 못한 소식을 듣게 됐다. 'Rh- 희소 혈액형' 보유자라는 사실이었다.
혈액형은 A·B·O·AB형을 판단하는 ABO 식 혈액형과 Rh+형·Rh-형을 구별하는 Rh 식 혈액형 등 크게 2가지로 나뉜다. 초등학교 때 ABO 식 혈액형 검사는 했지만 Rh 식 혈액형은 이때 헌혈을 하면서 처음 알게 됐다.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Rh- 혈액형 보유자는 전체 헌혈자(286만6330명) 중 약 0.4%(약 1만 1400여 명)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됐다. 동·서양인을 비교하면 한국인 등 동양인(약 0.3%~0.5%)이 서양인(약 15%)보다 보유자가 희귀한 편이다.
Rh-는 혈액에 있는 특정 항원이 부족해서 생긴다. Rh+에 대한 항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Rh+형의 혈액을 수혈받을 수 없다. 즉, Rh- 수혈은 오직 소수의 Rh- 혈액 보유자끼리 해야 한다. 여기에 ABO 식 혈액형도 일치해야 한다. 그만큼 Rh- 수혈은 성사되기 쉽지 않다. Rh- 희소 혈액형 보유자는 '사고나 질병으로 수술해야 할 때 수혈을 제때 받지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들 수 밖에 없다.
필자도 '오래 살지 못하는 게 아닐까' 혼자 고민하다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털어놨다. 어머니는 당황하면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제 30대 중반 성인이지만 그날 이후 어머니는 희소 혈액형을 가진 필자를 늘 걱정한다.
어머니는 운전면허를 따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 '혹시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을까'라는 걱정 때문이었다. 어머니를 겨우 설득해 군 입대 직전인 2003년 운전면허를 땄다. 2012년 결혼한 뒤에는 자동차도 구입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는 화들짝 놀라 화를 냈다. 요즘도 운전대를 잡으면 '걱정 많은' 어머니 얼굴이 떠오른다.
아내 역시 희소 혈액형 남편을 늘 걱정한다. "밖에 나가서 싸우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화가 나도 아내 생각에 일단 참게 된다. 희소 혈액형으로 살면서 늘 조심하고 참고 인내하는 게 습관이 됐다. 응급실에서 제때 수혈을 받지 못하는 악몽 같은 상황이 종종 떠오르기 때문이다.
필자처럼 희소 혈액형 보유자인 최모(51·여) 씨도 출산을 하면서 뒤늦게 자신의 Rh 식 혈액형을 알게 됐다고 했다. 최 씨는 "출산할 때 하혈을 많이 했다. 그때 병원에서 혈액형 검사를 했는데 Rh-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깜짝 놀랐다"며 "그날 이후 건강 문제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Rh- 희소 혈액형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사건은 지난 2010년 전유운(19) 씨 사망 사건이다.
Rh- 희소 혈액형 보유자 전 씨는 혈액암을 앓다 혈소판 수혈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결국 2010년 4월 세상을 떠나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같은 해 10월 SBS '그것이 알고싶다'는 'RH-혈액형의 외로운 전쟁' 편에서 전유운 씨 사건과 희소 혈액형 문제를 보도했다. 방송이 나간 뒤 응급수혈에 대비해 Rh- 혈액 적정 재고를 유지하고, Rh- 희소 혈액형 보유자를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후 관련 기관인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를 중심으로 Rh- 희소 혈액 응급수혈 체계를 본격적으로 구축하기 시작했다. 2007년 Rh- 희소 혈액형 보유자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대한적십자사 CRM센터(고객지원팀)가 만들어졌고 2010년 이후부터 본격 운영됐다. 2015년부터는 전국 15개 대한적십자사 혈액원에서 Rh- 혈액 일정분을 비축하고 있다.
이런 시스템이 구축되기 전에는 Rh- 희소 혈액형 보유자 가족이 수혈자를 직접 찾아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현재 Rh- 희소 혈액형 보유자가 수혈을 받아야 하는 경우, 의료기관은 해당 지역 혈액원에 응급수혈용 혈액을 요청한다. 이곳에 재고가 없으면 다른 지역 혈액원에서 혈액을 찾는다.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 관계자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기 위해 안정적인 Rh- 희소 혈액 확보에 노력하고 있다"며 "지난해 Rh- 혈액 응급수혈 상황을 고려해, 현재 Rh- O형 혈액은 5일분, Rh- A·B·AB형 등 나머지 혈액형 혈액은 4일분을 전국 혈액원에 비축하고 있다"고 말했다.
관계자는 이어 "Rh- 혈액형 보유자는 평소 헌혈을 주기적으로 하는 게 바람직하다"며 "다른 Rh- 혈액형 보유자뿐만 아니라 본인의 응급수혈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라고 밝혔다.
각 혈액원에도 응급수혈에 필요한 혈액이 없을 경우, CRM센터가 Rh- 혈액형 보유자들에게 전화·문자메시지로 응급수혈에 동참해달라는 연락을 돌린다. CRM센터는 Rh- 혈액형을 가진 헌혈자 리스트를 관리하고 있다. 사전에 이들에게 응급수혈 관련 연락을 해도 될지 동의를 구한다.
최근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는 Rh- O형 혈액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Rh- O형은 Rh- O형뿐만 아니라 Rh- A·B·AB형에게도 수혈이 가능하다.
또 다른 본부 관계자는 "현재 Rh- 희소 혈액 응급수혈 시스템은 어느 정도 갖춰진 상태"라며 "다만 안정적인 희소 혈액 확보가 중요해, 수혈 가능성이 높은 Rh- O형 혈액을 비축하는데 역량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관계자는 이어 "이를 위해 Rh- O형 보유자에게 헌혈을 독려하는 캠페인 등을 지속적으로 벌이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와 별개로 Rh- 희소 혈액형 보유자 봉사단체인 'Rh-봉사회전국협의회'에 연락해 응급수혈을 요청할 수도 있다.
1996년 만들어진 이 단체는 현재 Rh- 희소 혈액형 보유자 약 1800여 명이 정회원으로 가입돼 있다. 회원들은 다른 희소 혈액형 보유자 응급수혈이 필요하면 전국 어디든지 달려간다. 희소 혈액 관련 응급수혈 체계가 갖춰진 최근에는 예전보다 수혈 요청이 상대적으로 적게 들어온다고 했다.
Rh-봉사회전국협의회 감사 이용섭(52) 씨는 "예전에 많을 때는 1년에 약 50~60번 응급수혈을 했다. 폐 이식 수술 환자에게 Rh- 혈액 응급수혈을 하러 한밤중에 달려간 일도 있다"며 "최근에는 1년에 응급수혈을 10번 정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씨는 이어 "우리 단체가 하는 일은 소중한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그래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며 "우리가 게을러지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