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로 찜질방에 도착하면 1시간이 주어져요. 잠깐 눈을 붙이거나 씻고 나오면 또 촬영이 시작돼요”
1년차 연출부 FD 문준현(가명・남・27) 씨는 "방송 현장이 얼마나 열악하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문 씨는 지난해 인기리에 종영된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연출부 FD로 일했다. 드라마 촬영 3개월 동안 문 씨는 주 6일 근무했다. 오전 7시 촬영 현장으로 출발하면 다음날 오전 1시가 넘어야 끝났다.
주 1~2회는 밤샘 촬영이 이어졌다. 그런 날은 찜질방에서 잠시 눈을 붙이거나 씻고 나왔다. 문 씨는 "드라마 찍어본 사람 중에 여의도나 상암에 있는 찜질방에서 안 자본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tvN 드라마 '혼술남녀' 조연출로 일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이한빛 PD 사건이 지난달 세상에 알려지자 방송 종사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들은 '관행'으로 쉬쉬하며 넘어갔던 것들이 이제야 터졌다고 얘기했다. "방송계 노동 환경이 더 이상 이래선 안된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높았다.
'tvN 혼술남녀 신입 조연출 사망사건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는 방송 종사자들이 처한 어려움을 고발할 수 있도록 온라인 제보 센터를 만들었다. 제보가 쏟아졌다. 지난달 18일부터 24일까지 들어온 제보만 106건이다.
제보 내용은 주로 장시간 노동, 저임금, 폭력적인 현장 분위기, 불안정한 고용형태 등에 대한 내용이었다. 비정규직 스태프부터 정규직 PD까지 모두 살인적인 노동 강도에 시달리고 있다고 이들은 증언했다. 현장에서 언어폭력, 성폭력이 다반사로 일어나며, 비정규직 스태프는 터무니없이 낮은 임금을 받고 있다고 폭로했다.
◈ 살인적인 노동 강도
한 예능프로그램 조연출을 맡았던 김다영(가명・여・26) 씨는 "예능이 드라마보단 낫다"고 말했다. "충분한 수면 시간을 보장받았냐"는 질문에 김 씨는 크게 웃으며 "드라마보다 '낫다'는 게 잠을 잘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김 씨는 하루 15시간씩 일을 했고 일주일에 한 번은 밤샘 촬영을 했다. 밤샘 촬영이 끝나고 아침에 퇴근하면 다음날 출근할 때까지 '텀'이 생긴다. 그 시간이 유일한 휴일이다.
김다영 씨는 "집에 가서 잘 시간도 없어 방송국에서 자는 날도 많다"고 했다. 연차가 높은 PD는 소파에서 잠을 잔다. 막내들은 컴퓨터 모니터를 바닥에 내려놓고 책상에서 뒤엉켜 잔다.
김 씨는 방송업계에서 월 400시간 이하로 일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연출부 FD인 문준현 씨도 "한 달 기준으로 계산하면 약 430시간 정도 일했다"고 말했다. 대책위가 제보를 토대로 계산한 결과, 방송계 종사자들의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19.18시간에 달했고 평균 휴일은 주 0.9일이었다. 월 단위로 계산하면 평균 노동시간은 약 460시간이나 된다.
근로기준법 제50조에 따르면 1주 근로시간은 40시간을, 1일 근로시간은 8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 제53조에 따르면, 당사자가 합의하면 1주간에 12시간 한도로 연장근로를 할 수 있다.
방송 노동시간은 그럼 불법일까? 아니다. 제59조는 '특례'를 두고 있다. 특례업종에 해당하는 경우 사용자와 근로자대표가 서면합의하면 주 12시간 초과해 연장근로가 가능하다. 고용노동부는 방송업을 '특례 업종'으로 분류해놓았다.
원래 특례조항은 공익 또는 국방상 필요한 경우 예외적으로 연장근로를 늘릴 수 있게 하기 위해 1961년 신설된 조항이다.
조연민 공공운수노조 법률원 변호사는 "방송업도 공익성을 지니는 이상 특례업종으로 지정될만한 사정은 있다"면서도 "문제는 특례조항이 방송계 종사자들의 연장 근로를 무한정 늘리는 근거로 악용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 변호사는 "방송계 종사자들 목숨을 담보로 무한정 연장근로를 강요할 것이 아니라 교대제 도입, 인력 충원 등 방식을 통해 방송의 공익성과 근로자들 건강권 모두를 챙겨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방송 종사자들은 살인적인 노동 강도로 건강을 위협받고 있다. 한 종사자는 "동료들 중에 생리가 끊기거나 화장실을 너무 참아 방광염에 걸린 분들도 있다"고 말했다. 2002년엔 KBS 파견계약직 조연출이 제작현장에서 과로사한 사건도 있었다.
이혜은 경희의료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장시간 노동은 과로사로 대표되는 뇌심혈관질환뿐 아니라 안전사고, 정신 건강, 근골격계 질환 등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3개월간 평균 주당 근로시간이 60시간 이상일 경우에 뇌심혈관질환이 발생하면 산업재해로 인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돈, 돈, 돈
'장시간 노동'이 뿌리 깊은 관행으로 자리 잡은 배경에는 '돈'이 있다. 드라마는 '회차(촬영 일수)'가 제작 비용을 좌우한다. 장비 대여비, 인건비 등이 회차를 기준으로 책정된다. 밤을 새워가며 촬영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다음날로 넘기면 회차가 늘어나고, 늘어난 회차는 고스란히 제작비 상승으로 이어진다. 한 방송 종사자는 "결국 돈을 아끼기 위해 사람을 쥐어짜는 것"이라고 했다.
'이익' 대부분은 몇몇 스타급 배우나 유명 작가, PD들이 가져간다. 나머지 '파이'를 무수한 제작 스태프들이 나눠갖는다. 제작자 입장에선 최대한 스태프들에게 들어가는 돈을 줄이려 한다. 때문에 제작 현장 노동자 대부분이 비정규직이다. 연출팀은 대부분 정규직이었지만 최근 들어 조연출까지 비정규직인 경우가 많아졌다.
그렇다 해도 비정규직 스태프들이 받는 임금은 터무니없이 낮다. 문준현 씨는 월 430시간 일하며 130만 원을 받았다. 김다영 씨는 월 400시간씩 일하면서 50만 원을 받은 적도 있다. '경력'이 쌓이면서 월급이 올라 120만 원까지 받아봤다. 이들 월급을 시급으로 환산하면 1250~3250원 정도가 나온다. 최저시급인 6470원에 한참 못 미친다. 문 씨는 "생계를 이어가기가 어려운 수준"이라고 말했다.
◈ "남성들이 여성 스태프 엉덩이 두드리는 건 일상"
방송 스태프가 겪는 고충은 이 뿐만이 아니다. 대중에게 공개되는 촬영 현장은 항상 화기애애하지만 실제 현장 분위기는 사실 매우 폭력적이다. 업계 종사자들은 노동 강도를 생각하면 당연하다고 했다.
문준현 씨는 "최소한 수면 시간이 보장되지 않으니 집중력이 떨어져 언제 사고를 쳐도 이상하지 않다"고 말했다. 문 씨는 "모두가 예민해 있고 '예민함'은 폭력적인 현장 분위기로 이어진다"고 했다.
욕설, 폭언이 없는 현장은 거의 없다. 일부 현장에서는 신체적 '폭행'이 벌어지기도 한다. 한 방송국 조연출 현동환(가명・남・32) 씨는 "위계 질서가 강하다. 선배는 후배를 갈구며 스트레스를 푼다. 사소한 잘못을 해도 공개적으로 망신을 준다. 따돌림 문제도 심각하다"고 토로했다. 김다영 씨는 "가장 큰 문제는 장시간 언어폭력이나 가벼운 물리적 폭력에 시달리면 문제의식이 사라진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들은 성폭력에도 시달린다. 김다영 씨는 "남성들이 여성 스태프 엉덩이를 두드리는 건 일상이다. 처음에는 수치스럽고 불쾌하지만 이 업계에 오래 있으면 이게 성추행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고 말했다.
또, "CP(책임 프로듀서) 같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회식 자리에서 여성 스태프나 여성 작가들을 대놓고 성희롱한다"며 "항의를 하면 '장난인데 분위기를 심각하게 만든다'는 면박이 돌아온다"고 폭로했다. 김씨는 이런 일상화한 폭력 때문에 많은 방송 종사자들이 우울증을 겪고 있다고 했다.
◈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찍힐까봐..."
제작사와 스태프와의 계약은 대부분 작품별로 이뤄진다. 이전 작품에서 평판이 안 좋으면 다음 작품 계약이 어렵다. 실제로 촬영 현장에서는 PD 등이 "방송 업계에 발을 못 붙이게 하겠다"고 협박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비정규직 스태프들이 부당한 대우, 언어폭력 성폭력 등을 당해도 적극적으로 항의하지 못 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괜히 목소리를 냈다가 업계에서 매장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린다.
또 다른 이유론 '계약서' 문제가 있다. 방송 업계에서는 정식 계약서 대신 '구두 계약'을 하는 경우가 많다. 문화체육관광부가 2013년 '방송영상프로그램 제작 스태프 표준계약서'를 만들었지만 현장에선 이 계약서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조연민 변호사는 "근로기준법은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을 경우 처벌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을의 위치에 있는 방송 근로자들은 이를 신고하는 데 주저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조 변호사는 "고용노동부가 특별근로감독 등 적극적인 조치를 해야 한다"며 "그래야 '근로계약서 미작성 행위'가 형사처벌 대상이라는 것을 방송업계에 확실히 인식시킬 수 있다"고 덧붙였다.
스태프를 관리하는 건 보통 조연출 일이다. 김다영 씨는 "조연출은 스태프를 관리하고 공백이 생기면 그 자리를 메워야 한다"고 말했다. 고 이한빛 PD도 비정규직 스태프를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tvN 측이 변화의 계기를 찾는다며 촬영 중간에 비정규직 스태프를 해고하자 이 PD는 괴로워했다. 이한빛 PD 어머니는 "(아들이) 촬영 중간 교체된 비정규직 스태프들 계약금을 환수할 때 특히 괴로워했다"고 밝혔다.
이한빛 PD 유서에는 "하루에 20시간 넘는 노동을 부과하고 두세 시간 재운 뒤 다시 현장으로 노동자를 불러내고 우리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지쳐있는 노동자들을 독촉하고 등 떠밀고 제가 가장 경멸했던 삶이기에 더 이어가긴 어려웠어요"라고 적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