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잡지'를 안 지는 꽤 됐다. '젖은잡지' 1호는 2013년 편집장 정두리 씨 자비로 100권 인쇄됐다. 이른바 '여자가 만드는 도색잡지'로 불리며 뭇 남녀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편집장 정두리 씨는 '맥심걸'로 선정됐다가, 지난해 "여성 대상 범죄 화보를 싣는 맥심에 반대한다"며 돌연 '맥심' 표지 모델 자리를 반납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자기 전에 봐"라며 독자들에게 넌지시 권하길 어느덧 다섯 권. 정 씨를 만나 허심탄회하게 물어볼 때가 됐다고 느꼈다. '젖은잡지'가 어떻게 다른 야한 잡지와 다르죠?
지난 8일 오후 서울 문래동 한 카페에서 정 씨와 만났다. 푸르스름한 빛이 되는 털 겉옷에 긴 검은 부츠를 신은 정 씨는 멀리서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우리의 대화에 성 관련 전문용어와 (누군가에겐) 야한 이미지가 불쑥불쑥 등장한다는 점 미리 알려드린다.
'젖은잡지'가 왜 색다른 섹시화보인지 궁금해서 만나자고 했다. 일단 ‘젖은잡지’는 왜 만든 건가.
우선 내가 재밌게 볼 야한 콘텐츠가 없어서다. 초등학생 때 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야설을 쓰며 즐거웠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나이가 든 다음 기존 야한 잡지들을 보니 재미가 없었다. 야한 이야기에 들어가는 클리쉐(자주 사용돼 진부한 표현)도 거의 남자 위주였다. 즐겁지 않았다. 나도, 여자들도 성적 호기심이 많고 페티시(fetish·숭배의 대상. 특히 성적 욕구를 강하게 느끼는 대상)도 다채로운데 그런 걸 담는 콘텐츠가 없었다. 아쉬웠다.
아르바이트로 모델 일을 했던 경험도 '젖은잡지'를 만드는 계기가 됐다. 카메라 앞에 서는 건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다. 그런데 모델 일을 하면서 기분이 좋지 않을 때가 많았다. 카메라 앞에서 나는 시키는 대로 표정 짓고, 포즈를 취했다. ‘내가 예쁘게 나올까? 날씬하게 나오려나?’ 그런 걱정이 계속 들었다.
프랑스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있다. 정작 작가로서 내가 관심있는 작업은 ‘여자는 이래야 한다’, ‘남성은 이래야 한다’는 통념적인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작가로서 하고 싶은 것과 생계를 위한 모델 아르바이트에서 괴리감을 느끼며 직접 화보를 기획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왼쪽 위부터 오른쪽으로 '젖은잡지' 1~3권, 아래 4, 5권
미술학도로서 개인 작업의 연장선이자, 즐길 수 있는 야한 콘텐츠가 없다는 갈급함에서 나온 게 ‘젖은잡지’라는 설명이다. 이렇게 탄생한 ‘젖은잡지’ 1호는 2013년 나왔다. 정두리 씨 포트폴리오에 있던 작업물이 표지가 됐다.
'젖은잡지'는 남성이 원하는 야한잡지(맥심, 플레이보이)와도 다르고, 남성이 원하는 여성이 만든 야한잡지(레즈비언과의 쓰리썸을 소재로한 포르노같은)와도 다르다는 콘셉트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가?
우선 여자가 만드는 야한 콘텐츠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다. 여자들은 감성적이고 관계지향적이라는 편견 같은 것 말이다.
한국에서 잘 다루지 않아온 ‘본디지(bondage·결박) 페티시’, ‘라텍스 페티시’를 다뤘고, 한국적 SM플레이가 뭔지 고민하면서 ‘김치 스팽킹(김치로 후려치기 정도로 번역 가능하다)’이라는 화보가 나오기도 했다.
기획부터 모델까지 내가 직접 참여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시선’이다. 콘셉트가 ‘백합(여성 간 사랑을 다룬 콘텐츠)’이면 왜 ‘백합’이어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레즈비언을 모델로 쓰고, 게이를 모델로 쓰면서 그래야 하는 이유도 생각한다.
‘젖은잡지’ 5호에 게이 모델을 쓴 이유에서 정두리 씨의 말 뜻을 이해할 수 있다. 정두리 씨는 ‘로리타=미소녀, 수동적인 성적대상’이라는 통설을 뒤집고 싶었기 때문에 일부러 게이 모델을 섭외해 꽃처럼 예쁜 화보를 찍었다고 설명했다.
누군가들은 ‘로타’ 작가 화보와 비슷한 느낌이라는 말도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
사실 ‘젖은잡지’ 1권을 로타 씨와 함께 작업했다. 여고생 시선으로 쓴 내 야설 ‘아이들의 시간’을 화보로 표현했다. 로타 작가가 먼저 연락을 해왔지만 기획은 내가 했다.
로타 씨 작업물과 ‘젖은잡지’가 일견 비슷해보일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완전 다르다고 생각한다. 로타 씨 사진에 담긴 소녀들은 흔히 떠올리는 ‘미소녀’다. 풋풋한 느낌, 풋풋한 신체, 비슷한 표정이다.
‘젖은잡지’에 담긴 소녀들은 그렇지 않다. 자기 욕망을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이어 정 씨는 '젖은잡지' 5호에서 다뤘던 또다른 로리타 화보를 언급했다. 이 화보는 낡은 모텔에서 촬영됐다고 한다. 화보 콘셉트는 야한 옷, 야한 화장을 한 채 파티를 벌이는 ‘발랑 까진 소녀들’이다.
정 씨는 사람들이 보고싶어하는 미소녀를 담는 데엔 별로 관심이 없다며, 오히려 자신의 욕구를 능동적으로 표현하고 성적 매력을 적극 드러내는 '까진 소녀'를 '로리타' 화보로 담았다고 말했다.
남성 중심 야한 잡지에 반기를 든 두리 씨가 ‘맥심 모델’에 나갔다. 충격받은 팬들도 꽤 있다.
영미권에 비해 프랑스는 여성주의 작가 시선을 고민하면서 동시에 여성이 스스로 성적 대상화 되는 작업도 많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시선에 대한 고민과 성적 대상화가 되는 것이 이분법적으로 분리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상화 자체를 없앨 수는 없다. 하지만 능동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대상으로만 다루는 건 싫다.
‘맥심’에 실리는 화보와 ‘젖은잡지’ 화보는 어떻게 다른가.
일단 나는 ‘맥심’ 화보가 예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센스나 미감이 무슨 콘셉트인지 모르겠다. 고민의 흔적이 별로 없다. 흔한 섹시다. 노출 많고.
예를 들면 ‘맥심’과 우리가 라텍스를 다뤘는데 우리가 ‘라텍스 페티시’를 심도 깊게 다뤘다면 ‘맥심’은 라텍스 옷 사이로 보이는 속옷을 보여준다. 1차원적이다.
우리 경우는 ‘라텍스=거친 섹시’라는 통설을 깨고 ‘귀여움’이라는 코드와 연결했다. 일부러 라텍스 수트와 소재가 다른 소품을 써서 화보 촬영을 했다.
상대적으로 ‘머리’를 더 써야하는 야한잡지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통설·편견·고정관념을 비틀기 위해 고민하는 건 사실이다. 예쁜 결과물도 중요하지만 그걸로 그치는 건 싫다. 통념을 깨는 것, 논란을 만드는 것, 그렇게 해서 사회를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변화하는 것이 내가 하고 싶은 거다.
‘젖은잡지’ 1권 주제는 ‘타부(taboo)’였다. 당시 ‘아동청소년보호법’이 이슈였다. 일부러 교복을 더 입었다.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청소년들이 성욕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너무 쉽게 무시한 법안이라 생각한다. 청소년들을 보호하는 건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이들의 성욕을 그저 금지시키는 게 답은 아니다.
다른 호도 마찬가지다 ‘젖은잡지’ 4권 주제는 ‘백합’이다. LGBT 내에서도 레즈비언의 욕망과 사랑은 소수자적 위치다. 그래서 레즈비언이 재밌게 볼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었다.
여기까지 말한 정두리 씨는 내 마음을 읽었는지 "별로 야하지 않다, 안 예쁘다"며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며 말을 이었다. 마침 나도 이 질문을 하려던 참이었다.
정 씨는 차분한 태도로 단호히 말했다.
"얼토당토 않은 비판이라 생각한다. 대체 그 ‘야함’이 뭔지 모르겠다. ‘젖은잡지’가 야하지 않아서 싫다면 다른 야한 걸 보면 되는 것 같다. 야한 것을 보여주는 게 ‘젖은잡지’의 유일한 목표는 아니다. 상상력을 보여주고 싶다는 목표도 있다"
이어 그가 예를 들 건 큰 화제가 됐던 ‘젖은잡지’ 4호 ‘한복 SM플레이’ 화보였다. 정 씨는 이 화보가 한복과 레즈비언, SM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연결한 결과물이라 말했다.
"한국적인 SM 플레이가 무엇일지 고민했다. 우리나라는 딱히 이 코드로 떠올릴 수 있는 게 없지 않나. 그러다 동서지간 SM 플레이를 떠올렸다. 가부장제는 가족내에서 여자들이 서로를 미워하게 한다. 그걸 꼬고 싶었다".
반면 남자들이 좋아하는 레즈비언 콘텐츠와 다를 게 뭐냐는 평도 있다.
‘젖은잡지’ 4호에 실린 ‘맥심 걸’ 레즈비언 화보를 두고 그런 말이 있었다. 하지만 난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굳이 남자들 싫어하라고 찍은 화보가 아니다.
오히려 ‘맥심’ 대신 우리 걸 보면 더 좋다. 맥심 걸로 활동했던 두 모델이 함께 백합물을 찍었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뒀다.
물론 우리 화보의 주 타깃은 레즈비언이었고, 이 화보는 레즈비언 독자들에게 반응이 무척 좋았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젖은잡지’는 작가 정두리의 작업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가 만든 도색잡지'라는 수식어는 '젖은잡지'의 일부만 설명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정 씨도 동의했다.
"그런 면이 있다. 애초에 ‘젖은잡지’는 상업적 포르노물로 기획된 게 아니다. 도색잡지 콘셉트를 가진 아트북을 만들고 싶었다. 나는 작가로서 어떻게 작업하고 어떻게 성장할지가 제일 큰 관심사다. 일단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려고 하는 거고. 올 봄에는 개인전도 열 계획이다. ‘젖은잡지’와 직접 연관된 작업은 아니다. 하지만 ‘시선’의 문제를 다뤘다는 점에서 연결된다".
야한 사진 모델이 된다는 게 부담스럽진 않나?
나를 그저 성적 대상으로만 촬영하는 건 기분이 안 좋았다. 내 몸이 어떻게 보일지 걱정도 많이 됐다.
하지만 내가 직접 기획해 촬영하는 건 다르다. 매 호 독자 모델과 촬영을 하는데 ‘젖은잡지’가 추구하는 건 모델이 즐거운 화보여야 한다는 점이다. 스스로 예뻐보이고 섹시해보이는 모습을 담는 건 즐겁다.
인형 찍듯 수동적으로 찍는 게 아니라 모델의 내면을 끌어내는 사진을 찍으려고 한다. 외모만이 아니라 안에 있는 다른 것을 끌어내 어필하는 화보다.
독자들이 모델 지원을 많이 하나?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3호 때는 10~20명, 4호 때는 30~40명, 5호 때는 거의 50명이 지원했다. 연극영화과 전공생, 피팅 모델처럼 카메라 앞에 익숙한 사람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꽤 있다. 20~30대가 주고, 10대도 있다. 하지만 법 때문에 10대를 모델로 쓸 수는 없다.
독자들은 어떤 이유로 지원하나?
다양하다. 기본적으로는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어떤 독자는 성기에 꽃을 꽂은 사진을 보내기도 한다.
성형도 그렇고 스타일도 그렇고 거리에서 만나는 한국 여성들은 비슷비슷한 모습이다. 하지만 독자 모델 지원을 받아보면 개성 있는 분들이 많아 놀랄 때가 있다.
앞으로 점점 독자 모델을 늘릴 계획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욕망을 발견하고 표현하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
'젖은잡지' 다섯 권을 펼쳐보고 있는 정두리 씨 / 이하 위키트리
'젖은잡지' 다섯 권을 하나씩 펴가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부산스럽던 카페는 어느새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뒤였다.
정 씨에게 마지막 질문을 했다. '젖은잡지'가 욕망에 대한 이야기고, 욕망을 이야기해보자는 제안이라면 이런 행위는 왜 필요한 걸까.
"많은 경우 문제는 몰라서 생긴다. 자신의 욕망을 모르거나, ‘변태’라고만 생각할 때 오히려 문제가 생긴다. 많은 성 범죄도 이런 이유로 생기는 것 같다. 다양한 성욕, 페티시를 금기시하지만 말고, 꺼내놓고 이야기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비판도 수용도 가능하다.
각자 자기 취향을 말할 수 있었으면 한다. 욕망의 주인이 본인이면 좋겠다. 특히 여성들이 말이다. 남이 만든 페티시에 자기를 맞추는 게 아니라 내 페티시를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다.
그래서 ‘언니, 저도 제 욕망의 주인이 되어 살고 싶어요’라는 어린 여학생들의 팬레터가 가장 반갑다".
"'언니, 저도 제 욕망의 주인이 되고 살고 싶어요'라는 어린 여학생들의 팬레터가 가장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