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유호, 16년의 무의식을 펼친 드로잉집 ‘꿈꿀 권리’
작성일 수정일
감정·기억·욕망을 드로잉과 시로 엮어낸 331쪽 창작 기록

이번 출판물은 작가가 2010년부터 2026년까지 그려온 드로잉을 한데 모은 것으로, 작품이 완성되기 전 작가의 의식과 무의식이 어떻게 이미지로 형성되는지를 보여주는 창작 기록이다.
총 331쪽으로 구성된 이 책은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예술인창작지원 사업의 후원을 받아 제작됐으며, 우수디자인에서 출판됐다. 정가는 3만 원이다. 단순히 작품 이미지를 나열한 도록과 달리, 그림과 시가 서로 호흡하도록 구성해 독자가 장유호 작가의 사유와 창작 세계를 보다 가까이 들여다볼 수 있도록 했다.
◆ 문명의 이면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
장유호 작가는 현대사회의 문명과 불안정한 구조를 의식의 명료함으로 관찰하고, 그 안에서 발생하는 모순과 욕망을 회화와 드로잉으로 표현해왔다. 대표 주제인 ‘문명의 역습’, ‘소비와 욕망’, ‘사냥꾼 이야기’, ‘TOMORROW’ 등은 개인의 삶과 사회적 현상이 맞물리는 지점을 다룬다.
그의 작품은 무거운 주제를 정면으로 다루면서도 풍자적인 유머와 해학적 표현을 적극 활용한다. 익숙한 장면을 비틀거나 과장된 형상과 기묘한 상황을 배치해 관람객이 웃음 뒤에 숨은 불편한 현실을 마주하게 하는 방식이다. 작가는 이를 통해 문명이 인간에게 제공한 편리함만이 아니라, 그 이면에 자리한 불안과 소외, 과도한 소비와 욕망까지 드러낸다.
『꿈꿀 권리』에 실린 드로잉 역시 이러한 작가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다만 완성된 회화 작품보다 더욱 직접적이고 즉흥적인 선과 형태를 통해 작가의 내면이 가공되지 않은 상태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 드로잉, 완성작 이전의 흔적을 넘어
드로잉은 회화 작업의 기초적인 단계로 설명되곤 한다. 하지만 장유호 작가에게 드로잉은 단순한 밑그림이나 구상 노트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떠오른 장면과 감정, 기억의 파편을 즉흥적으로 기록하고, 그 흔적을 이후 작품 제작으로 연결한다.
작가의 드로잉에는 계획된 이미지와 우연히 나타난 형상이 함께 존재한다. 선은 때로 빠르게 움직이고, 때로는 망설이듯 멈춘다. 화면에는 현실에서 경험한 장면과 상상 속 이미지, 오래된 기억과 현재의 감정이 뒤섞인다. 이 과정에서 드로잉은 하나의 독립적인 작품이자, 회화가 만들어지는 내면의 통로가 된다.
책 속 작품들은 일기와도 닮아 있다. 날짜와 사건을 문장으로 기록하는 대신, 작가는 선과 형상, 기호와 짧은 시를 통해 자신이 지나온 시간을 남겼다. 그래서 각각의 드로잉은 특정한 순간의 감정뿐 아니라 작가의 삶과 기억이 축적된 흔적으로 읽힌다.
◆ 감정·기억·욕망으로 구성한 내면의 지도
꿈꿀 권리는 ‘감정’, ‘기억’, ‘욕망’이라는 세 가지 축을 중심으로 작가의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이 세 요소는 명확하게 분리되기보다 서로 얽히며 하나의 장면과 이미지 안에서 작동한다.
감정은 즉각적인 선과 움직임으로 나타나고, 기억은 반복되는 형상과 변형된 장면으로 되돌아온다. 욕망은 현실에 대한 갈망이자 사회가 끊임없이 생산하는 소비의 이미지로 드러난다. 작가는 이들을 하나의 질서 안에 고정하기보다 자유롭게 충돌시키며 독자가 각자의 경험을 투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 꿈과 현실이 겹쳐지는 창작의 공간
장유호 작가는 책의 시작하는 글에서 그림 속에 상상력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는 무의식에서 만들어진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음악이나 시처럼 흘러나오며, 그 과정에서 꿈과 현실이 뒤섞인 세계가 펼쳐진다고 설명한다.
작가에게 무심코 그린 드로잉은 자신의 일기이며,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무의식의 세계다. 의도적으로 정리하거나 완성한 장면이 아니라, 손의 움직임을 따라 나타난 이미지들이 오히려 자신을 더 솔직하게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무의식으로 이어지는 긴 통로에 비유한다. 그 통로에는 살아온 시간의 기억과 경험이 잠재적으로 축적돼 있으며, 드로잉은 이를 현재의 감각으로 다시 끌어내는 역할을 한다. 과거의 기억은 그대로 복원되지 않고, 새로운 감정과 상상력을 만나 변형된다.
◆ 자동기술법으로 되새긴 기억의 조각
작가는 자신의 창작 방식을 미술에서 말하는 오토메틱, 즉 자동기술의 효과와 연결한다. 자동기술은 작가의 의식적인 통제를 최소화하고 손의 움직임과 무의식의 흐름을 따라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방식이다.
장유호의 드로잉에서는 이러한 즉흥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작가는 현실에서 관찰한 사회의 모순과 불안정한 구조를 직접적으로 재현하기보다, 기억의 조각과 순간적인 감각을 재편집해 새로운 장면으로 제시한다. 그 결과 화면에는 실제와 허구, 과거와 현재, 개인적인 경험과 사회적 풍경이 한데 포개진다.
이번 드로잉집에 담긴 작품들은 작가가 살아온 모든 기억의 실마리와 연결돼 있다. 현대사회의 모습은 거대한 담론으로만 등장하지 않는다. 아주 작은 표정과 사물, 반복되는 기호와 불안한 움직임 속에 사회의 단면이 스며든다. 개인적인 기록처럼 보이는 드로잉이 동시대의 감각과 맞닿는 이유다.
◆ 개인의 기록에서 동시대의 질문으로
'꿈꿀 권리'는 장유호 작가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책인 동시에,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무엇을 느끼고 기억하며 욕망하는지 질문하는 출판물이다. 작가의 드로잉은 해답을 제시하기보다 불완전한 현실을 바라보는 여러 감각의 통로를 열어둔다.
책 제목에 담긴 ‘꿈꿀 권리’는 단순히 미래에 대한 희망을 뜻하지 않는다. 현실의 불안과 사회의 모순 속에서도 상상하고, 질문하고, 자신만의 내면을 지킬 수 있는 권리에 가깝다. 작가는 드로잉을 통해 그 권리를 확인하며, 독자에게도 각자의 기억과 상상력을 되살릴 것을 요청한다.
2010년부터 2026년까지 이어진 장유호의 드로잉은 한 작가의 작업 변화를 보여주는 자료이면서, 창작이 어떻게 삶의 기록으로 확장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꿈꿀 권리』는 완성된 작품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창작의 과정과 내면의 움직임을 선과 시로 기록한 331쪽의 시각적 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