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번 거절, 9년 만의 복귀...86세 배우 김혜자가 '영화'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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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자 9년 만의 영화 복귀작…일제강점기 소녀들의 빼앗긴 청춘 그렸다

배우 김혜자가 9년 만에 영화로 돌아왔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소재로 한 영화 ‘여전히 찬란하게’는 역사의 비극 속에서 꿈과 일상을 빼앗긴 소녀들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영화는 지난 8일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됐으며, 오는 21일 개봉한다.

1942년 소녀들의 삶과 노년의 재회

‘여전히 찬란하게’는 1942년 일제강점기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열일곱 살에 헤어진 순옥과 정임은 노년이 된 뒤 다시 만나 과거의 기억을 되짚는다. 순옥 역은 김혜자가, 정임 역은 차미경이 맡았다. 두 사람의 재회는 오래전 겪은 사건을 되살리는 동시에, 당시 제대로 누리지 못했던 청춘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영화 속 두 소녀는 일본군이 처녀들을 잡아간다는 소문이 퍼지자 시체를 태우는 화장막에 숨어 지낸다. 불안한 현실 속에서도 두 사람은 한글을 익히고 악보를 읽는 법을 배운다. 첫사랑에 눈뜨고 미래를 상상하는 순간도 이어진다. 이런 장면은 전쟁과 폭력의 공포에 가려졌던 소녀들의 일상을 보여준다. 역사적 비극을 다루면서 피해 경험만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그들이 원래 누렸어야 할 삶과 감정에도 초점을 맞춘다.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진행된다. 정임에게 치매 증세가 나타나면서 두 사람이 기억하는 사건과 감정이 조금씩 드러나고, 관객은 앞서 본 장면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게 된다. 기억의 빈틈과 되살아나는 장면이 맞물리면서 인물들이 지나온 세월의 무게도 드러난다. 노년의 재회는 과거를 회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랫동안 말하지 못했던 경험을 마주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배우 김혜자 / 뉴스1
배우 김혜자 / 뉴스1

김혜자의 눈빛으로 드러나는 인물의 내면

이 작품에서 김혜자의 연기는 대사뿐 아니라 표정과 눈빛을 통해 전달된다. 과거를 떠올리며 미소 짓던 순옥의 얼굴은 어느 순간 굳어지고, 상대를 말없이 바라보는 장면에서는 오래 묻어둔 감정이 드러난다. 얼굴을 가까이 비추는 장면은 인물의 미세한 변화를 보여준다. 감정을 직접 설명하기보다 표정의 변화와 침묵을 통해 관객이 인물의 시간을 따라가도록 구성했다.

순옥은 시대를 지나 살아남은 사람인 동시에, 역사 속에서 희생된 이들을 떠올리며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자신의 삶이 이어졌다는 사실만으로 안도하지 못하고, 살아남지 못한 이들을 기억하며 아픔을 끌어안는다. 김혜자가 오랜 연기 활동을 통해 보여준 여러 인물의 모습이 순옥에게 겹쳐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작품은 한 사람의 내면을 통해 역사적 비극이 생존자의 삶에 남긴 흔적을 보여준다.

김혜자는 지난 8일 부산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야외 무대인사에서 출연을 결정하기까지 망설였다고 밝혔다. 그는 “영화를 자주 하는 사람도 아니고 엄청 망설이다가 했다”며 “이 영화가 여러분들 마음을 어루만져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시나리오를 읽으며 텔레비전으로 방영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도 했다. 좋은 대본과 감독을 믿고 용기를 냈다는 말도 덧붙였다.

부산국제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은 배우 김혜자 / 뉴스1
부산국제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은 배우 김혜자 / 뉴스1

여섯 차례 찾아간 감독의 설득

1961년 KBS 1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김혜자는 65년 동안 연기 활동을 이어왔다. 드라마 출연작은 60여 편에 이르지만 영화 출연작은 상대적으로 적다. ‘눈물의 여인’(1969), ‘만추’(1982), ‘마요네즈’(1999), 봉준호 감독의 ‘마더’(2009),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2014), ‘길’(2017)에 이어 ‘여전히 찬란하게’가 일곱 번째 영화다. 이번 작품은 2017년 ‘길’ 이후 약 9년 만의 스크린 복귀작이다.

김혜자의 출연을 이끌어낸 사람은 송일곤 감독이다. 그는 여러 차례 김혜자의 집을 찾아가 작품을 제안했다. 김혜자가 “들꽃처럼, 이름 없는 꽃처럼 있고 싶다”며 거절하자 손편지를 보내 다시 설득했다. 이른바 ‘육고초려’로 불릴 만큼 거듭된 요청 끝에 김혜자는 시나리오를 읽었다.

김혜자는 대본을 읽고 “참 울림이 큰 영화, 슬픈 역사”라고 느꼈다고 밝혔다. 아름답게 살아야 할 아이들이 겪은 일을 아름답고도 가슴 아프게 표현한 점이 마음에 남았으며, 자신의 연기로 여러 사람과 작품의 의미를 나누고 싶었다고 전했다. 송일곤 감독은 김혜자를 캐스팅하는 일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다며, 배우가 작품에 참여하도록 설득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송 감독은 ‘꽃섬’(2001), ‘미안해, 고마워’(2011), ‘오직 그대만’(2011) 등을 연출하며 상실과 관계, 위로를 다뤄왔다. ‘꽃섬’은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젊은 비평가상을 받았다. 송 감독은 이번 작품을 한 사람에 대한 연민과 그리움, 사랑에 관한 영화라고 소개하며 김혜자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 김혜자 / 뉴스1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 김혜자 / 뉴스1

부산국제영화제 첫 상영…관객 반응 이어져

‘여전히 찬란하게’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됐다. 이날 상영은 일찌감치 매진됐으며, 야외 무대인사에는 약 1000명이 모였다. 김혜자는 관객들에게 작품을 보고 좋은 평가를 해달라며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영화를 관람한 관객들 사이에서는 김혜자의 눈빛에 상실과 기다림을 견뎌온 세월이 담겼다는 반응이 나왔다. 왓챠피디아에는 배우의 따뜻한 연기와 작품에 출연해 준 데 대한 고마움을 표현한 관람평도 올라왔다.

김혜자는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레드카펫에서 연분홍색 한복을 입고 모습을 드러냈다. 행사 당시 기침을 하고 부축을 받는 모습이 알려지면서 건강 이상설이 제기됐지만, 영화사 측은 단순한 감기 기운이라고 밝혔다. 이후 무대인사에서는 관객에게 직접 인사를 건네고 작품에 참여한 소감을 전했다.

김혜자의 연기 활동을 돌아보는 방송도 마련됐다. SBS는 데뷔 65년을 기념해 지난 4일 특집 다큐멘터리 ‘김혜자의 안부-죽지 마세요’를 방송했다. 김혜자는 방송에서 남동생이 한강에 빠져 세상을 떠난 뒤 깊은 우울감을 겪었고, 여러 차례 한강을 찾아 죽음을 생각하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이후 아프리카 봉사와 후원 활동을 하면서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밝혔다. 그는 좋은 배우로 인정받아야 다른 사람을 돕는 데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전했다.

‘여전히 찬란하게’는 오는 21일 극장에서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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