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 한국에 사실상 경고... 이례적일 정도로 수위가 높다

작성일

"정보 및 방첩 사안에서 동맹 기준 준수하길 기대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한국을 향해 정보와 방첩 분야에서 한미동맹의 기준을 지켜 달라고 요구했다. 최근 북한 해킹 대응 회의에서 국가정보원이 빠지는 등 한미 정보 협력에 금이 간 정황이 잇따라 드러난 가운데 나온 미국 정부의 첫 공개 메시지다.

이종석 국정원장이 9월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보위원회 전체회의를 마치고 퇴장하고 있다. / 뉴스1
이종석 국정원장이 9월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보위원회 전체회의를 마치고 퇴장하고 있다. / 뉴스1

트럼프 행정부 고위 관계자가 한미 정보 협력의 현 상황을 묻는 물음에 "우리는 한국이 수십 년간 이어져 온 양국 동맹의 기준을 준수하길 기대한다"며 "특히 정보 및 방첩 관련 사안과 관련해 그렇다"고 밝혔다고 SBS가 10일 보도했다.

미 국무부 고위 관계자도 SBS에 "우리는 모든 동맹국이 정보 및 방첩 사안을 적절히 처리하기를 기대한다"고 답했다. 국무부는 미국의소리(VOA) 방송의 같은 취지 질의에도 9일(현지시각) 같은 내용으로 답했다. 한미 정보 협력 균열 논란과 관련해 미국 정부 차원의 입장이 공개적으로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SBS는 "오해가 풀렸다"는 국정원의 설명과 결이 다른 미국 측 입장이 나오면서 논란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방첩은 다른 나라의 정보 활동이나 기밀 유출을 막는 일을 말한다. 미국 측은 구체적인 사안을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한국 정부와 국정원의 정보·방첩 사안 처리 방식에 불만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고 SBS는 분석했다. 동맹국을 상대로 한 외교적 표현치고는 수위가 높다는 점에서 경고의 뜻이 담긴 것으로도 해석된다고 매체는 전했다.

미국의 이번 메시지는 국정원이 한미일 회의에서 배제된 사실이 알려진 직후 나왔다. 국정원은 지난 6월 말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제5차 북한 사이버 위협 대응 한·미·일 외교당국 간 실무그룹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미국이 한국 정부에 국정원을 빼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지난 8일 국내 언론 보도로 처음 알려졌다. 보도는 전·현직 정부 고위 소식통을 인용해 미국이 회의를 앞두고 이 같은 요청을 했다고 전했다.

이 실무그룹은 2023년 8월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의 합의에 따라 같은 해 12월 출범했다. 북한의 가상자산 탈취와 해킹, 자금세탁 수법, 해외 IT 인력 활동 등을 분석하고 대응책을 논의하는 협의체다. 국정원이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것은 출범 이후 처음이다. 미국 측이 국정원의 기밀정보 관리를 우려했다는 관측도 나왔다.

이종석 국정원장이 9월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보위원회 전체회의를 마치고 퇴장하고 있다. / 뉴스1
이종석 국정원장이 9월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보위원회 전체회의를 마치고 퇴장하고 있다. / 뉴스1

논란이 커지자 국정원은 지난 8일 "수개월 전 일부 오해가 있었으나 이미 지난 일"이라고 밝혔다. 이어 "현재 한미 정보당국 간 오해는 없다"며 "사이버와 북한 문제 등 안보 전반에서 미국과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국정원 관계자는 여기서 말한 '오해'가 회의 배제를 가리킨다고 설명했다. 다만 미국이 왜 배제를 요청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국정원은 이종석 국정원장의 3월 방미가 미국의 거부로 무산됐다는 보도 내용도 부인했다. 국정원은 이 원장이 당시 중동 전쟁 대응에 집중하느라 해외 출장을 갈 상황이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쿠팡 사태를 조사한 국정원 직원 수십 명이 미국 입국을 거부당했다는 보도에 대해서도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한미 간 정보 공유 갈등은 지난 3월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국회 발언에서 본격적으로 불거졌다. 정 장관은 북한 평안북도 구성시에 우라늄 농축 시설이 있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한국 정부 고위 인사가 이 시설을 공개적으로 거론한 것은 처음이었다.

미국 측은 정 장관이 미국이 수집한 민감한 정보를 공개했다며 반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미국은 한국과 공유하던 대북 위성정보 가운데 북한 핵시설 관련 정밀 정보를 일부 제한한 것으로 전해졌다. 구성시를 비롯한 북한 주요 핵 단지의 변화를 장기간 추적한 기술 정보다. 한국 정부는 정 장관의 발언이 이미 공개된 정보에 근거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미국은 기밀 유출 우려를 거두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국민의힘은 당시 미국이 4월 초부터 정보 공유를 제한했다고 주장하며 정 장관의 경질을 요구했다.

정보 제한이 길어지면 북한 핵 활동을 감시하는 데 빈틈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북한 핵연료봉 생산이나 폐연료봉 저장 시설의 변화 같은 세부 정보는 미국의 고해상도 위성에 크게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군은 독자 정찰위성을 띄우는 ‘425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5호기를 쏘아 올리면서 정찰위성 5기 체계를 갖췄다. 이를 통해 북한 표적을 2시간 단위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됐지만 정밀도와 종합 분석 능력에선 여전히 미국과 격차가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군도 미국의 정보 제한을 인정했다. 진영승 합동참모본부 의장은 지난 8일 국회 국방위원회의 합참 국정감사에서 한미 정보 공유가 제한되고 있느냐는 성일종 국민의힘 의원의 질의에 "일부는 제한되지만 대비태세에 임하는 데에는 문제없다"고 답했다.

진 의장은 "결과적으로 이 상황은 빨리 해소가 되는 게 저는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또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 징후처럼 급박한 정보까지 공유가 전면 차단된 것은 아니라는 취지로 설명했다. 북한 미사일 발사의 사전 징후 정보를 미국으로부터 받고 있느냐는 박선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질의에도 그렇다고 답했다. 유용원 국민의힘 의원의 질의에는 "핵·미사일 관련 임무를 수령하는 데 있어 문제점은 없고 제한은 없다"고 강조했다.

진 의장은 한미일 군사 협력에 대해서도 긴밀하게 조율되고 있어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