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노벨평화상' 꿈 또 불발…올해 상 받은 인물은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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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범죄 추궁의 선구자, 필라이가 받은 평화상의 의미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국제법 전문가 나비 필라이(85)가 202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국제형사재판소(ICC)와 유엔에서 전쟁범죄·인권침해 문제를 다뤄온 인물로, 국제법과 법치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번 수상은 국제 사법기구를 압박해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행정부의 행보와 맞물려 주목받고 있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9일(현지시각) 필라이를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발표했다. 선정 이유는 평화와 국제법 원칙을 증진하기 위한 노력이다. 노벨위원회는 필라이가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 집단학살을 처벌할 수 있도록 국제 법질서를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이번 발표에서 노벨위원회는 수상자의 경력뿐 아니라 국제법을 둘러싼 국제사회의 상황에도 상당한 비중을 뒀다. 국가 간 분쟁을 법과 제도로 해결하는 체계가 압박받고 있으며, 법적 규범보다 힘의 논리가 앞서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국제법 수호자에게 돌아간 노벨평화상
노벨위원회는 국제법과 법치주의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핵심 기반이라고 밝혔다. 국가와 지도자가 국제법에 따라 책임을 지고, 폭력과 전쟁의 피해자가 사법 절차를 통해 정의를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위원회는 법적 질서와 혼란 사이의 경계를 지키는 판사들이 존중받아야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들을 제재하고 국제 사법기구를 공격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제법을 적용하는 사법기관의 독립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이러한 발언은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국제형사재판소 관계자들에게 제재를 부과한 상황과 맞물린다. 미국은 ICC가 미국과 동맹국 인사들을 대상으로 관할권을 행사하는 데 반대해왔으며, 트럼프 2기 행정부는 ICC 관계자들을 제재 대상으로 지정했다.
ICC는 미국의 제재가 독립적인 사법기관의 활동을 위축시키고 국제법 질서를 훼손할 수 있다고 반발했다. 노벨위원회가 국제법과 사법기관의 독립성을 강조한 배경에도 이러한 국제적 갈등이 자리하고 있다.
일부 외신은 이번 수상을 트럼프 대통령의 국제기구 정책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으로 해석했다. 다만 노벨위원회가 수상 발표에서 특정 국가 지도자를 직접 지목한 것은 아니다. 위원회가 공식적으로 내세운 핵심은 필라이의 국제법 수호 활동과 국제 사법체계의 중요성이다.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선 변호사에서 국제법 전문가로
필라이는 1941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인도계 타밀인 가정의 딸로 태어났다.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가 시행되던 시기에 성장했으며, 법률가가 된 뒤 인종차별에 맞선 활동가들을 변호했다. 넬슨 만델라를 비롯해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한 인사들을 법적으로 지원한 경력도 있다.
필라이는 1967년 자신의 법률사무소를 열었고, 이후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법학을 연구해 1988년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5년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 고등법원 판사로 임명됐다. 인종과 성별에 따른 차별이 법과 제도에 영향을 미치던 시기에 법조계에서 활동하며 경력을 쌓았다.
1999년에는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의 판사가 됐고, 이후 재판소장을 맡았다. 르완다 집단학살 사건을 다룬 재판에서 성폭력과 강간이 반인도적 범죄와 집단학살에 해당할 수 있다는 법적 판단이 확립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판례는 전쟁과 집단학살 과정에서 발생한 성폭력을 국제형사법의 관점에서 처벌할 수 있는 범위를 넓혔다. 필라이의 경력은 인권침해를 개인이나 국가의 내부 문제로만 취급하지 않고 국제법에 따라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하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와 가자지구 조사
필라이는 2008년부터 2014년까지 유엔 인권최고대표를 지냈다. 유엔 인권최고대표는 전 세계 인권 상황을 감시하고 인권침해를 조사하며, 각국 정부와 국제사회에 개선을 촉구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후 필라이는 국제형사재판소 판사로도 활동했다. ICC는 집단학살, 전쟁범죄, 반인도적 범죄와 침략범죄를 저지른 개인에게 형사책임을 물을 수 있는 국제 사법기관이다. 국가 간 분쟁을 판단하는 국제사법재판소(ICJ)와는 역할이 다르다. ICC가 개인의 형사책임을 다룬다면 ICJ는 국가 간 법적 분쟁을 심리한다.
필라이는 2021년부터 2025년까지 유엔의 팔레스타인 점령지역 독립 국제조사위원회를 이끌었다. 해당 조사위원회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군사작전과 관련해 집단학살이 발생했다고 판단했으며, 이스라엘 정부는 이를 부인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이스라엘에 대한 관련 비판과 국제기구의 판단에 반대해왔다.
필라이는 현재 미얀마의 로힝야족 집단학살 혐의와 관련한 사건에서 국제사법재판소의 임시 판사로 활동하고 있다. 이 사건은 미얀마가 로힝야족을 상대로 집단학살 협약을 위반했는지를 다룬 국가 간 소송이다.
“평화에는 정의가 필요하다”…국제 사법체계의 의미
필라이는 수상 발표 당시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포럼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는 유엔 조사위원회 활동을 돌아보며 진실을 말하는 데 왜 용기가 필요하겠느냐는 취지로 발언했다. 국제법과 인권을 지키는 일은 특별한 선택이 아니라 법률가가 해야 할 기본적인 역할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ICC 소장 아카네 도모코도 필라이의 수상을 환영하며 국제법 질서와 법치주의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한 시기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ICC 관계자들이 미국의 제재 대상이 된 상황에서 국제 사법기관의 독립성과 역할이 다시 주목받은 것이다.
노벨평화상은 국가 간 화해와 분쟁 해결뿐 아니라 인권 보호, 민주주의, 국제법 발전에 기여한 인물과 단체에도 수여돼 왔다. 필라이의 수상은 전쟁범죄와 집단학살에 대한 책임 추궁, 피해자 권리 보호, 국제 사법기관의 독립성이라는 문제를 다시 국제사회의 주요 의제로 끌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