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300명, 트럼프 정부에 손해배상 공식 요구... 미국 언론도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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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구금으로 고통... 손해배상 소송 들어가기 위한 첫 단추 끼워

지난해 미국 조지아주에서 이민 당국에 대거 체포·구금됐던 한국인 노동자 300여명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행정부를 상대로 본격적인 법적 대응에 나섰다. 트럼프 대통령 집권 이후 벌어진 최대 규모 이민 단속 가운데 하나를 겨냥한 첫 대규모 법적 조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 백악관 홈페이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 백악관 홈페이지

현대자동차그룹과 LG에너지솔루션이 함께 짓던 조지아주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에서 지난해 9월 붙잡혔던 한국인 노동자들은 미국 정부를 상대로 연방 소송에 앞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행정 청구(Administrative Claim)'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고 CNN 등 미국 언론이 15일(현지시각) 일제히 보도했다.

이들을 대리하는 변호인은 국토안보부(DHS)와 이민세관단속국(ICE), 관세국경보호국(CBP), 연방수사국(FBI), 법무부, 노동부 등 9개 연방 기관을 상대로 올해 말까지 청구 접수를 모두 마칠 계획이라고 밝혔다.

조지아주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변호사인 대리인은 첫 청구인의 서류가 이들 기관에 우편으로 발송됐음을 입증하는 자료를 공개했다. 그는 구금됐던 사람들을 같은 한국인이 대변한다는 점이 중요하다며 신원을 조지아주에서 일하는 한국인 변호사로만 밝혀달라고 요청했다.

행정 청구는 미국에서 연방정부를 상대로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절차다. 연방불법행위청구법(FTCA)에 따라 연방정부의 불법행위로 피해를 본 사람은 배상액을 명시해 정부에 손해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 정부가 청구 접수 뒤 6개월 안에 답하지 않거나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연방 법원에 정식으로 소송을 낼 수 있다. 사실상 노동자들이 트럼프 대통령 행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에 들어가기 위한 첫 단추를 끼운 셈이다.

첫 번째 청구인인 김모씨는 공개한 청구서에서 자신이 불법으로 구금됐으며 ICE 시설에 갇혀 있던 7일 동안 모욕적인 생활 환경을 강요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민 당국의 단속이 고의적인 정신적 고통과 모욕, 오래 남을 심리적 트라우마를 남겼다고 적었다. 청구서에는 압수당한 소지품과 잃어버린 일감, 정신적 피해에 대한 배상 요구가 담겼다. 불법 감금과 절차 남용, 고의적 정신적 가해 등도 함께 적시됐다. 대리인은 노동자 300여명이 저마다 비슷한 내용의 청구서를 준비했다면서도 요구 배상액은 밝히지 않았다.

단속 근거인 수색영장을 보면 작전이 지목한 대상은 4명뿐이었다. 이 중 한국인 노동자는 한 명도 없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 백악관 홈페이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 백악관 홈페이지

대리인은 법적 대응의 목적이 미국 정부가 "엄청나고 부당한 실수"를 인정하고 "이를 시인하며 사과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미국 정부는 미등록 이민자 4명을 찾아냈다는 거짓 구실을 내세워 완전무장한 요원 수백명을 투입해 미국 경제에 크게 기여하는 한국 기업의 작업 현장을 급습했다"고 비판했다. 이어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장비를 설치하러 합법적으로 입국한 엔지니어들에게 수갑과 족쇄를 채워 범죄자처럼 끌고 다녔다"며 "마치 한국 기업이 미국 노동 시장을 침범한 것처럼 모든 한국인을 세계 앞에서 망신 줬다"고 말했다.

김씨 등 노동자들이 전한 구금 과정은 가혹했다. 이들은 한국어 통역도 없이 몇 시간씩 붙들려 있었다. 읽을 수 없는 문서에 서명하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나중에야 그것이 체포 동의서였음을 알았다고 했다. 일부는 서명하면 더 빨리 귀국할 수 있으리라 믿고 이름을 적었다.

김씨는 손목과 발목에 수갑과 족쇄가 채워진 채 버스에 실려 조지아주 포크스턴의 구금 시설로 옮겨졌다고 밝혔다. 그곳에서 일주일가량 지냈다. 처음 며칠은 최대 80명이 한 방에 갇혀 지냈다. 개방형 변기는 몇 개뿐이었다. 방은 몹시 추웠다. 얇은 수건 한 장만 덮고 자야 했다. 이후 2인용 방으로 옮겨졌다. 여러 노동자는 음식에서 쉰내가 났고 물맛도 이상했다고 전했다.

이후 요원들은 다시 통역도,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자진 출국 동의서를 내밀었다고 김씨는 말했다. 그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따지자 한 요원은 공장 안에 있었던 것 자체가 위반이라고 답했다. 이의를 제기하면 몇 달이 걸릴 수 있다는 경고도 뒤따랐다. 김씨는 청구서에서 한 요원이 "고문을 당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는 서명했다. 미국 시민권자와 결혼한 1명을 뺀 한국인 구금자 전원이 같은 서류에 서명했다. ICE는 김씨를 향한 협박 주장에 대한 입장 요청에 답하지 않았다.

가명으로 신원을 밝힌 류모씨는 "완전히 구금된 뒤에도 우리는 왜 끌려왔는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지 못했다"며 "아무도 아는 게 없었고 모두가 그저 어리둥절했다"고 했다. 김씨도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이런 일이 벌어졌다"며 "적어도 진행 과정에서 상황을 설명해 줬다면 조금은 이해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류씨는 B-1 비자 소지자가 아니라 비자 면제 프로그램으로 입국한 탓에 가장 오래 갇혀 있던 축에 속했다. 그는 몸무게가 약 4.5㎏ 빠진 채 귀국했다. 몇 달 뒤 그는 같은 조지아주 공장으로 돌아와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 백악관 홈페이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 백악관 홈페이지

같은 공장으로 복귀한 현장 엔지니어 최모씨는 이번 청구가 명예 회복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가장 화가 나는 건 어떤 형태의 사과도 없었다는 점"이라며 "우리는 모두 붙잡혀 갇혔다가 쫓겨나듯 미국을 떠났다"고 말했다. 이어 "'불법으로 들어온 줄 알고 체포했는데 아니었으니 풀어주겠다, 원하면 다시 와서 일하고 아니면 말라'는 식의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미국 측 9개 기관에는 모두 입장을 물었지만 DHS와 CBP만 답했다. DHS는 ICE가 "불법 고용 관행과 그 밖의 중대한 연방 범죄 혐의에 대한 수사의 일환으로 사법 수색영장을 집행했다"고만 밝혔다. CBP는 지난해 9월 낸 보도자료를 참고하라고 안내했다. 이 자료에는 체포된 이들이 "비자나 체류 자격 조건을 어기고 불법으로 일하고 있던 것으로 확인됐다"고 적혀 있다.

일부 노동자가 같은 비자로 다시 입국해 같은 일을 하는 이유를 묻자 CBP는 입국 허가 판단이 "사안별로 이뤄진다"며 "미국 대사관이나 영사관에서 받은 비이민 비자, 승인된 전자여행허가(ESTA)가 있다고 해서 입국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DHS는 단속과 관련한 질문에는 백악관을 지목했다. 백악관은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소셜미디어에 올린 글을 가리켰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시 외국 기업들에 일정 기간 전문 인력을 데려와 미국 노동자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킨 뒤 단계적으로 내보내고 돌아가라고 촉구한 바 있다.

법률 전문가들은 이번 청구의 파장을 주목한다. 노라 엥스트롬 스탠퍼드대 로스쿨 교수는 FTCA에 따른 청구가 연방 소송의 길을 열 뿐 아니라 정부가 금전 배상을 하도록 압박하고, 노동자들을 왜 구금했는지, 어떤 증거가 이를 정당화했는지, 요원들이 규정을 지켰는지 여부를 기록으로 남기게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FTCA가 주(州) 법을 원용하는 만큼 노동자들은 조지아주 법에 따른 불법 체포를 입증해야 한다고 엥스트롬 교수는 밝혔다. 그는 정부가 연방 공무원의 "재량" 행위로 생긴 피해에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보호 조항을 들어 청구가 각하돼야 한다고 "거의 확실히" 주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다만 이 예외 조항이 "연방 요원에게 무제한 면책을 주려는 취지는 아니었다"고 했다.

제임스 팬더 노스웨스턴대 로스쿨 교수는 FTCA가 각자 자신의 구제 절차를 모두 밟도록 요구하는 만큼 한 사람의 청구가 전체를 대표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실제 배상으로 이어진 전례도 있다. 2018년 테네시주 육류 가공 공장 단속 당시 인종 프로파일링과 과잉 진압, 불법 체포를 주장한 노동자들은 일부가 FTCA를 근거로 정부와 100만 달러가 넘는 배상에 합의했다.

케이트 괴텔 전 미국이민협의회 법률국장은 FTCA가 "금전 배상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하게 믿을 만한 길"이라고 말했다. 괴텔 전 국장은 헌법 위반을 이유로 개별 요원을 상대로 소송을 낼 수도 있지만, 연방대법원이 특히 이민 사건에서 그 문을 갈수록 좁혀 왔다고 설명했다.

문제의 단속은 지난해 9월 4일 서배너에서 서쪽으로 약 40㎞ 떨어진 조지아주 엘러벨에서 벌어졌다. 당시 당국은 이를 국토안보수사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단일 현장 작전이라고 밝혔다. 연방·주·지역 요원 500명 가까이가 광활한 공장에 들이닥쳐 노동자 475명을 붙잡았다. 이 가운데 대부분이 한국인이었다. 붙잡힌 이들의 나이는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했다.

2900에이커에 이르는 현대차 메타플랜트는 현대차 전기차 생산 시설과, 당시 건설 중이던 LG와의 합작 배터리 공장 두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구금된 한국인 상당수가 이 배터리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스티븐 슈랭크 국토안보수사국 조지아 현장 책임자는 단속 직후 붙잡힌 이들이 모두 미국에서 불법으로 살며 일한 혐의를 받는다고 밝혔다.

단속 이후에도 많은 노동자가 또 붙잡힐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은 채 같은 비자로 미국 배터리 공장에 돌아가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정모씨는 지난 6월 설비 작업을 위해 클리블랜드로 날아가 지난 8월까지 머물렀다. 정씨는 "여전히 무섭지만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씨도 조지아 공장에서 붙잡히던 날 아침 지녔던 것과 같은 B-1 비자로 미시간주 랜싱에서 리튬이온 배터리 설비를 설치·수리했다. 그는 이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으로 돌아가는 노동자들은 비자와 고용주, 담당 업무가 적힌 회사 발급 카드를 들고 다닌다. 또 이민 단속이 나올 경우에 대한 대비다. 조지아 단속 이후 새로 생긴 절차다.

김씨는 "예전에 내가 그리던 미국은 강하고 부유한 나라, 동맹이었다. 그래서 별로 불안하지 않았다"라면서 "그 이미지가 산산이 부서졌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만큼 공정하지 않고 자유의 땅도 아니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