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영·다이소 다음은 여기… 외국인 카드 소비 증가율 전 업종 1위 기록한 '뜻밖의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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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관광객의 새로운 쇼핑 천국, 약국이 뜬 이유는?
K-의료관광과 약국 결합, 명동의 새로운 먹거리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의 발길이 올리브영과 다이소를 넘어 약국으로 향하고 있다.

처방전 없이도 살 수 있는 피부 관련 의약품과 건강기능식품을 찾아 명동과 강남 일대 약국을 순례하듯 도는 '약국 투어'가 새로운 방한 관광 코스로 자리 잡은 것이다. 지난 4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관광·뷰티 특화 약국인 도레미약국이 이달 서울 강남역 11번 출구 앞에 문을 연다. 파리바게뜨와 뉴발란스가 차례로 영업했던 강남대로 핵심 상권이다.
길 건너에는 300㎡대 매장에 개방형으로 약을 진열한 레디영약국이 있고, 인근에는 맞춤형 상담을 결합한 옵티마웰니스뮤지엄(OWM)도 자리한다. 뷰티업계 관계자는 이들 약국이 처방전을 내주는 병원이 아니라 관광객 동선을 따라 입지를 정한다고 말했다. 유동인구가 많고 임대료가 비싸기로 유명한 자리를 잇따라 꿰차고 있다는 점에서, 약국이라기보다는 플래그십 매장에 가까운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병원 처방전 없이도 접근할 수 있는 업종 특성상, 입지 선정 기준 자체가 기존 약국과는 완전히 다른 셈이다.
명동 신규 약국, 2년 새 2곳→19곳
서울 대표 관광 상권인 명동의 신규 개설 약국 수는 2024년 2곳에 불과했지만 올해 1~8월엔 19곳에 달했다. 지난해 9월 명동에 레디영약국과 베리뉴약국이 동시 개점한 뒤 관광·뷰티 특화 약국은 1년 새 60여 곳으로 늘었다. 레디영약국은 점포 10곳, OWM은 9곳을 내며 몸집을 불렸다. 일부 뷰티 특화 약국의 월매출은 1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확장세는 명동에 그치지 않는다. 부산 해운대 등 다른 지역 관광 상권으로도 K-약국이 빠르게 번지고 있다.
명동 약국 간판에는 한국어 '藥'와 함께 중국어 '药', 영어 'Pharmacy'가 나란히 붙어 있어, 외국인 관광객을 겨냥한 상권이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코로나19 유행 당시 외국인 관광객이 끊기면서 '임대문의' 안내만 붙어 있던 명동 거리가, 이제는 약국 간판으로 빼곡히 채워진 셈이다. 불과 몇 년 전과 비교하면 상권의 풍경 자체가 완전히 뒤바뀐 셈이다.
외국인 손님이 몰리는 만큼 매장 구성도 달라졌다. 명동과 홍대 등 외국인 관광객이 많은 상권의 약국들은 올리브영처럼 소비자가 직접 장바구니를 들고 제품을 둘러볼 수 있도록 매장을 꾸몄고, 다국어 안내판을 세우고 외국어가 가능한 직원을 배치하는 곳도 늘었다. 계산대에는 여권을 제시하면 즉시 세금 환급 서류를 처리해주는 즉시 환급 시스템을 도입한 매장도 적지 않다.
약국이 단순한 의약품 판매 공간을 넘어 더마 화장품과 건강기능식품, 미용기기까지 갖춘 복합 쇼핑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일부 매장에서는 계산대 앞에 면세 서류를 즉석에서 처리해주는 창구를 별도로 두거나, 결제 이후 배송 대행 서비스를 안내하는 등 관광객 특화 서비스까지 갖추는 추세다.
외국인 약국 지출 142%↑…카드소비 증가율 전 업종 1위
수치로도 뒷받침된다. 하나은행 하나금융연구소가 올해 2월 발간한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외국인의 약국 지출액은 1414억원으로 전년보다 142.2% 늘었다. 보고서는 한국 약국 쇼핑 콘텐츠가 주목받으면서 화장품과 영양제 등 약국 웰니스 제품에 대한 수요도 함께 증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관광공사가 집계한 외국인 관광객의 업종별 카드소비 증가율에서도 약국은 전년 대비 206.1%를 기록해 전체 업종 가운데 1위에 올랐다. 면세점이나 백화점, 식당 등 전통적으로 외국인 소비가 몰리던 업종들을 모두 제친 수치라는 점에서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품목은 피부 관련 제품이다.
흉터 관리 제품과 여드름 치료제, 색소침착 개선 제품, 피부 재생 크림 등이 대표적이다. 화장품보다 치료 목적이 분명하면서도 처방 없이 살 수 있다는 점이 매력으로 꼽힌다. 감기약과 소화제, 인후통 완화제 같은 상비약, 파스와 근육통 완화 제품, 비타민과 유산균, 오메가3, 루테인 등 건강기능식품 수요도 함께 늘고 있다. 장시간 비행으로 피로를 느낀 여행객이 직접 복용하기 위해 사는 경우도 있지만, 본국에 있는 가족이나 지인에게 선물하기 위해 여러 개씩 구매하는 사례도 적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일부 여행객은 아예 여행용 캐리어 한 칸을 의약품과 건강기능식품으로 채워 돌아간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틱톡과 인스타그램 등 SNS에서 한국 의약품이 화제를 모으면서 '약국 쇼핑'이 확산한 결과로 풀이된다.
27년 전에도 있었던 시도…올리브영만 살아남았다
뷰티 수요를 약국과 결합하려는 시도는 27년 전에도 있었다. 1999년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1호점을 낸 CJ올리브영이 매장 안에 약국을 들인 것이 시작이었다. 당시만 해도 화장품과 생활용품을 파는 편집숍 안에 약국이 딸려 있는 형태가 신선한 시도로 받아들여졌다. 코오롱의 W스토어와 GS리테일 왓슨스, 이마트의 분스와 부츠 등 유통 대기업들이 잇따라 비슷한 실험을 이어갔지만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다. 올리브영만 약을 떼어내고 뷰티 편집숍으로 갈아타 살아남았다. 당시에는 병원 처방과 약 조제라는 약국 본연의 기능과 화장품 쇼핑이라는 이질적인 두 요소를 한 공간에 붙여놓는 데 그쳤을 뿐, 소비자를 끌어들일 만한 특별한 경험을 설계하지는 못했다는 게 업계의 뒤늦은 평가다.
유통 대기업이 연달아 실패했던 사업이 최근 외국인 수요에 힘입어 다시 확대되고 있는 셈이다. 뷰티 편집숍이 쌓아온 진열 노하우와 마케팅 방법론을 이번엔 약국이 그대로 흡수했다. 백화점과 면세점, 올리브영에 이은 새로운 K뷰티 스토어가 탄생한 셈이다. 과거 실패 사례와 다른 점은 이번에는 애초부터 내국인이 아닌 외국인 관광객을 주요 타깃으로 설정하고, 이들의 동선과 소비 패턴에 맞춰 매장을 설계했다는 데 있다. 국내 소비자를 겨냥했던 과거 시도와 달리, 처음부터 관광객 지갑을 여는 데 초점을 맞춘 접근법이 유효했다는 평가다.
명동, K뷰티 넘어 K의료관광 허브로
명동 상권 자체의 성격도 달라지고 있다. 인바운드 관광 플랫폼 크리에이트립이 집계한 올해 1분기 명동 지역 거래 데이터를 보면, 전년 동기 대비 거래액은 45%, 1인당 결제액은 44% 늘었다. 특히 올해는 피부과가 전체 거래액의 63%를 차지하며 핵심 관광 상품으로 떠올랐다. 지난해 헤어숍이 거래액의 43%를 차지하며 명동의 대표 소비 항목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피부 관리와 시술, 클리닉처럼 부가가치가 높은 영역으로 소비가 빠르게 옮겨가고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지난해 1~5월 외국인 의료 소비액이 6085억원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올해 같은 기간은 54.9% 늘었고, 소비 건수도 132만 건에서 222만 건으로 68.6% 증가했다. 시술을 받고 회복하는 동안 인근 약국에서 애프터케어 제품을 구매하는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명동이 K뷰티를 넘어 K의료관광의 거점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성형보다는 시술 위주의 소비가 늘면서 회복 기간에 필요한 애프터케어 시장 자체가 함께 커지고 있는 셈이다.
관광 특화 약국의 성장은 국내 백화점 업계가 누리는 외국인 특수와도 맞물려 있다. 올해 상반기 롯데·신세계·현대백화점 등 백화점 3사의 외국인 매출은 총 1조7200억원으로 집계됐는데, 이는 지난해 연간 외국인 매출 합계 약 2조800억원의 83%에 해당하는 규모다. 이런 흐름이 이어지면 올해 3사 모두 연간 외국인 매출 1조원 시대를 열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도 나온다. 백화점 업계 안팎에서는 외국인 관광객을 얼마나 오래 머물게 하고, 얼마나 다양한 소비로 연결하느냐가 새로운 경쟁력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과거 명품 구매에 집중됐던 외국인 소비가 K패션과 K뷰티, K푸드 등으로 빠르게 확산하는 가운데, 약국 역시 이런 흐름을 타고 새로운 소비 채널로 떠오른 셈이다. 쇼핑 목적지 또한 명동과 강남 등 전통적인 관광 상권을 넘어 잠실과 여의도, 부산 등으로 넓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관광 특화 약국의 확장세도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