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 총재 “원화 면역력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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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수출 확대와 경상수지 흑자, 원화 강세 견인할까
180원 하락한 환율, 일시적 급락 아닌 원화의 구조적 변화일까

원·달러 환율이 두 달도 안 돼 180원 넘게 떨어지며 원화 강세가 이어지고 있다. 한국은행은 최근 원화 가치가 과거보다 대외 충격에 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30일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 28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보다 8.4원 내린 1372.5원에 주간 거래를 마쳤다. 지난해 7월 24일 기록한 1367.2원 이후 약 13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환율은 지난달 2일 장중 1555.8원까지 치솟았다. 이후 하락세가 이어지면서 두 달도 지나지 않아 180원 이상 떨어졌다.

환율이 1555원에서 1372원으로 내려갔다는 것은 달러 가치가 원화에 비해 약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외환시장에서 1달러를 사기 위해 필요한 원화가 그만큼 줄었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원·달러 환율 하락은 원화 가치 상승으로 해석한다.

최근 원화 강세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글로벌 달러 약세만으로 움직임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는 28일 미국 와이오밍주 잭슨홀에서 열린 경제정책 심포지엄을 계기로 가진 특파원 간담회에서 최근 원화 움직임을 평가했다. 달러인덱스가 상승하는 상황에서도 원화 가치가 오르고 있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원화는 어느 정도 면역력이 생겼다고 본다”고 말했다.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 / 뉴스1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 / 뉴스1

달러인덱스는 미국 달러의 주요 교역 상대국 통화에 대한 가치를 종합해 나타내는 지표다. 이 지표가 오르면 일반적으로 달러가 상대적으로 강해졌다는 의미다.

그런데 달러가 다른 주요 통화에 비해 강해지는 상황에서도 원화 가치가 상승했다면 국내 외환시장에서 원화 강세를 만들어낸 별도의 요인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최근에는 실제로 달러 공급이 늘어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수출기업은 해외에서 물건을 팔면 달러를 받는다. 국내에서 비용을 지급하려면 이 달러를 원화로 바꿔야 한다. 수출기업이 보유한 달러를 시장에서 원화로 바꾸는 물량을 외환시장에서는 ‘네고 물량’이라고 부른다.

월말을 맞아 수출기업의 네고 물량이 나온 데다 SK하이닉스의 미국주식예탁증서(ADR) 상장과 관련한 달러 자금 유입도 환율 하락에 영향을 미쳤다.

달러를 팔려는 사람이 많아지면 외환시장에서 달러 공급이 증가한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달러 가격인 원·달러 환율을 낮추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통화정책 역시 최근 원화 움직임을 설명하는 요인이다.

한국은행은 7월에 이어 8월에도 기준금리를 연속으로 인상했다. 이에 따라 한국과 미국의 정책금리 차이는 0.75%포인트까지 축소됐다.

기준금리는 중앙은행이 정하는 대표적인 정책금리다. 시중금리와 대출금리, 예금금리 등에 영향을 미치며 외국인 투자자금의 움직임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일반적으로 미국 금리가 한국보다 훨씬 높으면 달러 자산의 상대적인 매력이 커질 수 있다. 반대로 한·미 금리 차이가 줄어들면 원화 자산에 대한 상대적인 부담이 일부 낮아질 수 있다.

물론 금리 차이만으로 환율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투자자들은 금리뿐 아니라 경기 전망과 기업 실적, 금융시장 위험도 등을 함께 고려한다.

한국은행이 올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2.6%에서 3.3%로 높인 것도 원화 강세를 뒷받침하는 요인으로 거론된다.

경제성장률 전망이 높아졌다는 것은 국내 경제가 당초 예상보다 강한 회복세를 보일 가능성이 커졌다는 뜻이다. 한국 경제의 성장 전망이 개선되면 국내 자산에 대한 투자 심리가 좋아질 가능성이 있고, 이는 원화 수요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한국 경제의 대표적인 달러 공급원은 수출이다.

기업이 해외에 제품을 판매하면 달러 등 외화를 벌어들인다. 수출이 수입보다 많아 경상수지 흑자가 확대되면 중장기적으로 국내에 들어오는 외화가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특히 한국의 주력 수출 품목인 반도체 업황이 개선되면서 관련 기업의 수출과 국내 투자 확대가 원화 가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관심사다.

국제금융협회(IIF)는 최근 한국의 경상수지 흑자가 내년까지 국내총생산(GDP)의 10%에 이를 수 있다고 전망하면서 원화 가치의 추가 상승 가능성을 제시했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 / 뉴스1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 / 뉴스1

경상수지는 상품과 서비스의 수출입뿐 아니라 해외에서 받은 배당·이자 등까지 포함해 한 나라가 외국과 거래한 결과를 보여주는 지표다. 흑자가 발생한다는 것은 해외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지급하는 돈보다 많다는 의미다.

IIF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국내 반도체 투자 확대가 수출을 통해 벌어들인 달러의 국내 유입으로 이어질 가능성에도 주목했다.

원화 강세를 설명하는 요인이 일시적인 시장 수급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환율 하락은 국내 소비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한국은 원유와 천연가스, 각종 원자재와 식료품 등을 상당 부분 해외에서 수입한다. 원화 가치가 높아지면 같은 양의 달러를 지급하기 위해 필요한 원화가 줄어든다.

예를 들어 국제 유가가 달러 기준으로 그대로라고 가정하면 원·달러 환율이 낮아질수록 국내 수입업체가 원유를 사기 위해 필요한 원화 부담이 줄어든다.

이론적으로는 수입물가 하락을 통해 휘발유와 경유 등 에너지 가격과 각종 제품 가격의 상승 압력을 낮추는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해외여행을 준비하는 소비자에게도 환율 하락은 유리하다. 같은 1000달러를 환전하더라도 1550원일 때는 155만원이 필요하지만 1370원이라면 137만원이 필요하다. 환율만 놓고 보면 약 18만원의 차이가 발생한다.

반면 수출기업에는 부담이 될 수 있다.

한국 기업이 해외에서 100달러를 벌었다고 가정하면 환율이 1550원일 때 원화 매출은 15만5000원이지만 환율이 1370원이면 13만7000원이 된다. 달러로 벌어들인 금액이 같더라도 원화로 환산한 매출은 줄어든다.

특히 해외 매출 비중이 높은 기업일수록 환율 변동이 실적에 미치는 영향이 커질 수 있다.

다만 실제 기업의 손익은 환율 하나로 결정되지 않는다. 원자재 가격과 판매가격, 해외 생산 비중, 환헤지 여부 등에 따라 영향은 달라진다.

최근 한·미 협상에서 합의된 대규모 대미 투자도 외환시장의 관심사다.

신 총재는 한국의 대미 투자 규모가 연간 최대 200억달러 수준이라는 점을 언급하면서 이를 감당할 수 있다는 취지의 판단을 내놨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 /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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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기준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4270억달러 규모다.

외환보유액은 정부와 중앙은행이 보유한 외화 자산으로, 외환시장의 급격한 변동이나 국가 간 지급 등에 대응하는 데 활용할 수 있는 외화 자금이다.

다만 ‘최대’ 200억달러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실제 집행 규모와 시기는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대미 투자 합의만으로 향후 환율 방향을 단정하기는 어렵다.

관건은 최근 환율 하락이 일시적인 현상인지, 원화의 구조적인 강세로 이어질지다.

현재 원화에는 긍정적인 요인이 적지 않다. 반도체 수출과 경상수지 흑자 확대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고, 한·미 정책금리 차이도 이전보다 줄었다.

그러나 환율은 국내 요인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금리 정책은 대표적인 변수다. 미국 금리가 예상보다 높게 유지되거나 달러 강세가 다시 나타나면 원·달러 환율이 반등할 수 있다.

외국인 투자자금의 유출입도 중요하다. 외국인이 국내 주식이나 채권을 대규모로 매입하면 원화를 사기 위한 달러 수요가 발생한다. 반대로 국내 자산을 팔고 자금을 해외로 가져가면 원화를 달러로 바꾸려는 수요가 커질 수 있다.

지정학적 위험이나 글로벌 금융시장의 불안도 변수다. 시장에서 위험 회피 심리가 강해지면 상대적으로 안전자산으로 평가받는 달러 수요가 늘어날 수 있다.

신 총재 역시 최근 환율이 안정됐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여전히 높은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적정 환율을 중앙은행이 특정 숫자로 제시할 문제도 아니라는 입장이다.

결국 1370원대 환율이 곧바로 새로운 ‘정상 환율’이 됐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최근 환율 하락에는 수출기업의 달러 매도와 같은 단기적인 수급 요인부터 금리 차이 축소와 성장률 전망 개선, 반도체 수출 확대 기대 등 중장기 요인이 함께 작용하고 있다.

시장이 앞으로 주목할 부분도 환율의 특정 숫자보다는 원화 강세를 만들어낸 요인들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느냐에 있다.

두 달 만에 1550원대에서 1370원대로 내려온 원·달러 환율이 일시적인 급락으로 끝날지, 원화의 체질적인 변화로 이어질지는 앞으로의 수출과 금리, 자금 흐름, 미국 통화정책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