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 미국에서 한국 반도체 새 역사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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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애나 팹 착공... 7세대 HBM 연간 수십만장 생산

한국에서 만든 웨이퍼가 태평양을 건넌다. 미국 인디애나의 공장에서 칩을 쌓고 포장하면 '메이드 인 USA' 인공지능(AI) 메모리로 거듭난다. SK하이닉스가 그 첫 삽을 떴다.
SK하이닉스는 27일(현지시각) 미국 인디애나주 웨스트라피엣 퍼듀대학교에서 AI 메모리용 어드밴스드 패키징 생산기지 '인디애나 팹(FAB)' 기공식을 열었다. 회사가 미국에 짓는 첫 반도체 공장이다.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미국 땅에서 생산하는 첫 거점이기도 하다.
투자 규모는 40억 달러(약 5조6000억원) 이상이다. 당초 2024년 발표 당시 투자액은 38억7000만 달러였다. 퍼듀대 소유 연구단지 약 16만3000평 부지에 차세대 HBM과 AI 반도체 패키징 라인, 연구개발(R&D) 시설이 들어선다. 클린룸은 2028년 10월 완공을 목표로 한다. 차세대 HBM 양산은 2029년 하반기부터 시작한다.
공사는 이미 진행 중이다. SK하이닉스는 2024년 인디애나에 법인을 세웠다. 착공은 올해 4월 타설로 시작됐다. 현재 공정률은 7% 수준이다. 부지에는 철골 구조물이 올라오고 있다. 회사는 이번 투자를 미국주식예탁증서(ADR) 상장 이후 본격화하는 실질 투자로 설명했다.
인디애나 팹은 후공정을 맡는다. HBM은 전공정과 후공정을 거쳐 D램 칩을 쌓고 붙이는 패키징 과정을 밟는다. 어드밴스드 패키징은 여러 칩을 하나로 묶거나 수직으로 쌓아 성능을 끌어올리는 기술이다. 미세 공정만으로는 넘기 힘든 한계를 이 기술이 메운다. 한국에서 넘어온 최첨단 D램 웨이퍼는 이곳에서 가공을 거쳐 HBM으로 완성된다. 이렇게 만든 제품이 엔비디아 등 미국 고객사에 공급된다.
SK하이닉스가 현재 만드는 최신 HBM은 D램을 12단 쌓은 6세대 HBM4다. 이 제품은 엔비디아의 최첨단 AI 가속기 베라 루빈에 탑재된다. 인디애나 팹에서 만들 제품은 여기서 한 세대 더 나아간 7세대 HBM4E다. SK하이닉스는 이 7세대 칩을 개발하고 있다.
생산 능력도 상당하다.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은 공장이 본격 가동되면 연간 수십만 장의 웨이퍼를 처리할 수 있다고 밝혔다. 업계에 알려진 SK하이닉스의 연간 D램 생산량은 600만 장 규모다. 이 가운데 일부가 HBM에 쓰인다. 완전 가동 시 1000여 명이 일하는 미국 내 핵심 HBM 거점으로 키운다는 구상이다. 회사는 팹 건설과 운영, 협력사와 연관 산업까지 더하면 약 7000개의 직·간접 일자리가 생길 것으로 기대한다. 소재·부품·장비 협력사 100여 곳이 현지 진출을 논의하고 있다.

이번 프로젝트에는 미국 정부 지원도 얹혔다. SK하이닉스는 반도체법(CHIPS Act)에 따라 최대 4억5000만 달러의 직접 보조금과 5억 달러 규모의 대출을 지원받는다.
기공식에는 양국 주요 인사가 대거 참석했다. 마이크 브런 인디애나 주지사, 토드 영 연방 상원의원, 미치 대니얼스 퍼듀대 총장,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전우회 회장이 자리했다. 강경화 주미한국대사도 함께했다. SK그룹에서는 유정준 미주총괄 부회장과 이형희 부회장, 곽 사장 등이 참석했다.
브런 주지사는 이 프로젝트가 인디애나에 수천 개의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고 지역 경제를 키울 것이라고 환영했다. 곽 사장은 미국과 SK하이닉스가 함께 AI의 새로운 미래를 시작하는 날이라고 말했다.
토드 영 상원의원은 미국 내 생산의 필요성을 힘줘 강조했다. 그는 칩이 경제를 움직이고 국가 안보를 지키는 핵심 요소라고 했다. 공급이 끊기면 재앙이 되는 만큼 반도체 제조를 다른 나라의 선의나 행운에 맡길 수 없다고 말했다. 영 상원의원은 2022년 여야가 초당적으로 통과시킨 칩스법 처리를 주도한 인물이다.
SK하이닉스는 퍼듀대와 어드밴스드 패키징 분야 R&D 협력을 위한 업무협약(MOU)도 맺었다. 양측은 HBM을 비롯한 차세대 시스템 통합과 패키징 기술을 함께 연구한다. 한국전쟁 당시 약 14만 명의 장병을 보낸 인디애나와의 인연을 기려 채용 협력도 추진했다. SK그룹은 대한상공회의소와 한미동맹재단이 운영하는 주한미군 전역 장병 취업 플랫폼에 고용 기업으로 참여했다. 기공식에는 6·25 전쟁 참전용사들도 초대됐다.
미국 신규 투자 가능성도 열어뒀다. 곽 사장은 기공식 뒤 기자회견에서 신규 반도체 공장 후보지가 정해졌느냐는 질문에 언제든 열려 있지만 확정된 것은 없다고 답했다. 그는 전력과 용수, 보조금 같은 인프라 자원이 충분한 지역이라면 어디든 검토하겠다고 했다. 최태원 회장이 지난 7월 일본 콘퍼런스에서 한국 밖 투자 방향을 설명한 점도 언급했다.
곽 사장은 메모리 시장 전망도 내놨다. 그는 AI 열풍으로 이어지는 공급 부족이 2030년 말까지 지속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침체의 뚜렷한 신호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AI 거품이 꺼지거나 불황이 와도 수요가 급격히 줄지는 않을 것으로 봤다. 완만하게 감소하거나 정체되는 수준에 그친다는 것이다. 자회사 솔리다임의 기업공개(IPO)에 대해서는 회사 차원에서 검토 중이며 계획을 철회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이번 기공식을 바라보는 미국 언론의 시선은 산업 지형 변화에 맞춰졌다. 블룸버그는 이번 착공을 전략 산업의 공급망과 제조 기반을 미국 안에 다시 세우려는 워싱턴의 대대적 캠페인에서 하나의 이정표라고 평가했다. 빌 프라운호퍼 미 상무부 반도체 투자·혁신 담당 이사는 이 프로젝트가 미국의 첨단 패키징과 연구 역량을 강화한다고 말했다. 반도체 공급망에서 미국의 위치를 단단히 해준다는 것이다.
미국 언론은 이번 투자가 후공정에 집중된다는 점도 짚었다. 패키징은 그동안 미국 반도체 공급망의 약한 고리로 꼽혔다. 미국은 세계 패키징 생산 능력의 극히 일부만 갖고 있다. 첨단 칩을 미국에서 만들어도 조립을 위해 아시아로 보내야 하는 구조였다. 인디애나 팹이 그 공백을 메우는 시도라는 해석이 나온다.

배경에는 통상 압박이 있다. 미국 언론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행정부가 반도체 기업에 미국 내 생산 확대를 요구하는 흐름 속에서 이번 기공식이 이뤄졌다고 짚었다. 트럼프 행정부가 수입 반도체에 높은 관세를 물리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보도도 같은 날 나왔다. 블룸버그는 SK하이닉스가 삼성전자와 달리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아직 하지 않아 추가 투자 여지가 있다고 분석했다. 다만 반도체 경기가 꺾이면 공급 과잉 위험을 떠안을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전했다.
SK하이닉스의 미국 확장은 이어질 전망이다. 유정준 부회장은 2030년까지 미국 내 투자와 자산이 450억 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내다봤다. 회사 이사회는 이달 2031년까지 54조3000억원 규모의 투자를 승인했다. 이 가운데 35조2000억원은 국내 생산라인 2단계 건설에 배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