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아파트'보다 훨씬 드라마 같은 일이 광주의 한 아파트에서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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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판 '아파트'... 250억 빼돌려도 18년 동안 아무도 몰랐다
전직 폭력조직 보스가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회장 자리까지 오른다. 목표는 단 하나. 장기수선충당금 178억원이다. 최근 막을 내린 JTBC 드라마 '아파트'의 설정이다. 그런데 드라마 ‘아파트’에 등장한 이 엄청난 금액보다 큰 액수가 광주의 한 아파트에서 튀어나왔다. 조직도 계략도 없었다. 관리사무소 경리 한 명이 조용히 통장을 만졌을 뿐이다. 입주자대표회의가 주장하는 자금 이동 규모는 약 440억원에 이른다. 드라마 속 액수의 두 배를 훌쩍 넘는다.

드라마 '아파트'는 지난 7월 11일부터 지난 16일까지 JTBC 토일드라마로 방영됐다. 극본은 김윤영 작가, 연출은 조용원 감독이 맡았다. 지성이 연기한 주인공 박해강은 전국구 조직폭력배 보스 출신이다. VIP만 드나드는 비밀 도박장을 세련된 사업체처럼 꾸며 굴리던 인물이다.
박해강이 아파트로 눈을 돌린 이유는 돈이었다. 아버지처럼 따르던 박용만(정진영)을 구치소에서 빼내려면 178억원이 필요했다. 그가 노린 돈이 바로 아파트 장기수선충당금이었다. 박해강은 가짜 가족까지 꾸며 단지에 입성했다. 악성 주차 문제와 택배 대란 같은 골칫거리를 하나씩 풀어 나갔다. 주민 신망을 얻은 그는 동대표를 거쳐 끝내 입주자대표회의 회장 자리에 올랐다.
회장이 된 박해강은 장기수선충당금 178억원을 통째로 빼낼 계획을 세웠다. 큰 가방을 들고 은행을 찾아 현금을 인출하려는 장면도 그려졌다. 하지만 단지 안에는 더 큰 그림자가 있었다. 박병은이 연기한 이충원과 그가 이끄는 비밀 조직 '원클럽'이다. 원클럽은 법조계와 정치권, 언론까지 손을 뻗친 세력으로 묘사됐다.
이야기는 박해강이 태산건설의 유치원 부실공사를 폭로하면서 정점으로 치달았다. 그는 100만 구독자를 둔 유튜버 서준맘(정이랑)의 채널을 빌려 고발 영상을 퍼뜨렸다. 반격은 곧바로 돌아왔다. 폭로 직후 박해강은 오히려 장기수선충당금 178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수갑을 찼다. 이충원은 박해강이 처음부터 178억원을 노리고 아파트에 들어왔다며 역공에 나섰다. 정작 돈에 손대지 못한 인물이 횡령범으로 몰리는 아이러니가 9회 엔딩을 장식했다.
현실이 이 드라마를 밀어냈다. 무대는 전남광주 광산구 월곡동의 한 아파트다. 이곳 관리사무소에서 경리로 일하던 40대 A씨가 지난해 3월 자취를 감췄다. 관리비 통장에 남아 있던 3000만원을 챙긴 뒤였다. A씨는 며칠 만에 경기도 일대에서 긴급체포됐다.

수사가 시작되자 규모가 드러났다. 경찰은 A씨가 2016년부터 약 10년간 아파트 관리비와 장기수선충당금 등 약 7억원을 빼돌린 정황을 확인했다. A씨는 업무상횡령 혐의로 구속 송치됐다. 현재 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고 있다.
사건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입주자대표회의가 과거 회계 자료와 금융 거래 내역을 다시 들여다봤다. 그 결과 범행이 2008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의심이 커졌다. 입주자대표회의는 지난 3월과 5월 두 차례 광주경찰청에 고소장을 냈다. 고소 대상은 A씨와 친인척, 지인, 전직 관리사무소장 등 8명이다.
입주자대표회의가 제기한 자금 이동 규모는 약 440억원이다. 이와 관련해 광주일보는 A씨 등 8명이 2008년부터 지난해 3월까지 개인 계좌로 빼돌린 혐의 금액을 250억여원으로 보도했다. 같은 돈이 계좌를 옮겨 다니며 반복 계산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실제 사적으로 쓰인 금액은 수사로 가려야 한다. 경찰은 정상적인 관리비 집행 내역과 의심스러운 거래를 구분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입주자대표회의 설명을 종합하면 A씨는 관리비와 장기수선충당금, 공과금 지출 업무를 사실상 혼자 도맡았다. 인터넷뱅킹 아이디와 비밀번호, 공인인증서, 일회용 비밀번호 생성기까지 모두 A씨 손안에 있었다. 공금이 쌓이면 일부를 개인 계좌 등으로 옮기는 방식이 반복됐다는 게 입주자대표회의 주장이다. 빠져나간 자리는 전표에 전기요금이나 상수도요금, 승강기 유지관리비를 낸 것처럼 꾸며 채웠다고 한다. 돈이 흘러간 계좌만 40여개로 파악됐다.
고소 대상에는 A씨의 전남편도 있다. 그는 현직 광주경찰청 소속 경찰관이다. 입주자대표회의는 그가 A씨의 횡령에 가담한 공범이라고 주장했다. 경찰은 그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혐의로 입건해 공범 여부를 살피고 있다. 다만 경찰은 현재까지 그가 범행에 연루됐다고 볼 만한 구체적 정황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A씨가 범행에 쓴 계좌 가운데 전남편 명의의 계좌도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드라마와 현실을 관통하는 열쇠는 장기수선충당금이다. 극 중 박해강이 노린 178억원도, 광주 아파트에서 빠져나갔다는 돈의 상당 부분도 이 항목에 얽혀 있다.
장기수선충당금은 아파트 같은 공동주택의 주요 시설을 오래 쓰기 위해 미리 모아 두는 돈이다. 공동주택관리법 제30조에 근거를 둔다. 승강기 교체, 배관 교체, 옥상 방수, 외벽 도색처럼 목돈이 드는 공사가 대상이다. 관리주체가 장기수선계획에 따라 집주인에게서 매달 걷어 쌓아 둔다. 300세대 이상 아파트나 승강기가 설치된 공동주택, 중앙집중식·지역난방 공동주택이라면 적립이 의무다.
이 돈은 일상적인 관리비와 성격이 다르다. 형광등을 갈거나 시설을 청소하는 수선유지비는 실제 거주자가 낸다. 반면 장기수선충당금은 원칙적으로 집을 가진 소유자가 부담한다. 세입자가 관리비에 얹어 먼저 냈다면 이사할 때 집주인에게서 돌려받을 수 있다.

단지마다 규모는 다르지만 오래된 대단지에서는 수십억원에서 수백억원까지 쌓인다. 목돈이 한곳에 모여 있다는 뜻이다. 관리가 허술하면 그만큼 손대기 쉬운 돈이 되기도 한다. 드라마가 이 항목을 표적으로 삼은 이유이자, 현실의 사건이 오래 드러나지 않은 배경이기도 하다.
돈이 사라진 흔적은 단지 곳곳에 남았다. 세대 안에서 생긴 누수를 제때 고치지 못해 벽지가 뜯기고 곰팡이가 피었다. 경비실은 페인트가 벗겨지고 바깥벽에 금이 갔다. 쌓아 둔 수선 자금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결과다.
경찰은 2008년 이후 지출 결재 내역과 금융 계좌 거래 전반을 대조하며 실제 횡령 규모와 가담자 범위를 가리고 있다. 고소인과 피고소인이 여러 명인 만큼 조사도 순차적으로 이어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