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색만 있는 줄 알았는데...녹색인데 더 달고 아삭하다는 대반전 '국민 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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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진청, 설원·슈퍼골드·그린시스 보급 확대…'신고' 중심 시장 구조 개선

껍질이 초록빛을 띤 배를 마주하면 아직 덜 익은 것 아닌가 하고 손이 머뭇거리기 쉽다. 그러나 최근 시장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 녹색배는 미숙과가 아니라 처음부터 초록색으로 익는 별도의 품종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갈색 배보다 오히려 당도가 높고 식감은 더 아삭하다. 정부가 이 녹색배를 앞세워 '신고' 한 품종에 편중된 국내 배 시장의 체질 개선에 나섰다.
배 농가를 표현한 자료사진. AI툴로 생성됐습니다.
배 농가를 표현한 자료사진. AI툴로 생성됐습니다.

신고 85.4%… 녹색배로 판을 넓힌다

농촌진흥청은 설원·슈퍼골드·그린시스 등 맛과 크기가 차별화된 녹색배 보급을 확대한다고 밝혔다. 크고 외관이 좋은 배를 명절에 몰아 소비하는 구조에서 벗어나 다양한 맛과 크기의 배를 평소에도 찾도록 소비시장 자체를 키우겠다는 구상이다.

농진청에 따르면 2025년 기준 신고 재배면적은 전체 배 재배면적의 85.4%에 달한다. 신고는 일본에서 1927년 육성돼 일제강점기에 국내에 들어온 품종이다. 1980년대만 해도 전체 재배면적의 35% 수준이었으나 1990년대 후반 70%를 지나 지금의 85.4%까지 비중이 치솟았다. 이 과정에서 재배와 유통 구조도 함께 신고에 맞춰졌다. 1990년대 지베렐린 처리로 수확 시기를 일주일가량 앞당기고 과실을 키우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명절에 맞춰 크고 외관이 훌륭한 신고를 공급하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하지만 이제 소비 환경이 달라졌다. 명절 선물용 대과보다 평소 부담 없이 사 먹을 수 있는 적당한 크기와 다양한 맛·용도를 중시하는 수요가 늘고 있다. 단일 품종에 재배가 쏠리면 특정 시기에 출하가 몰려 값이 떨어지기 쉽고, 기상재해에도 취약하다. 이른 추석에는 명절 수요를 맞추느라 덜 익은 신고가 출하되는 일까지 있었다.

녹색배 그린시스 자료사진. / 농촌진흥청
녹색배 그린시스 자료사진. / 농촌진흥청

이때 껍질부터 다른 녹색배는 소비자가 새 품종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대안으로 지목됐다. 대표 품종인 설원은 9월 상순에 수확하는 조생종으로 평균 무게 600g, 당도는 14브릭스 이상이다. 신고보다 당도가 2브릭스가량 높고 과육의 갈변이 느려 조각 과일로 쓰기 좋다. 열매 크기와 품질이 고르고 상온에서 30일가량 저장할 수 있어 대량 유통에도 유리하다.

같은 시기에 나오는 슈퍼골드는 평균 무게 570g, 당도 13.6브릭스 수준이다. 단맛에 은은한 산미가 더해진 새콤달콤한 맛이 특징으로, 유통 전문가의 종합만족도가 5점 만점에 4.25점을 기록했고 중도매인 대상 시장성 평가에서는 선호도 1위를 차지했다.

9월 중순 수확하는 그린시스는 평균 무게 460g, 당도 12.3브릭스 수준이다. 녹색 껍질에 과즙이 풍부하고 아삭한 식감을 낸다. 검은별무늬병에 강해 안정적인 생산에 유리하고 저장성도 좋아 저온 저장한 물량을 이듬해 6월까지 유통한 사례도 있다.

다만 아직 재배 규모는 크지 않다. 지난해 기준 재배면적은 설원 10㏊, 슈퍼골드 27㏊, 그린시스 43㏊ 등 총 80㏊에 그친다. 농진청은 지방정부와 전문 유통조직이 참여하는 생산단지를 조성해 물량을 확보한다는 방침이다. 설원의 경우 울산에 2029년까지 10㏊, 나주에 2030년까지 30㏊ 규모의 단지 조성을 추진 중이다.

국내 최대 배 주산지 나주는 품종 다변화가 상대적으로 빠르다. 지난해 전국 배 재배면적 9316㏊ 가운데 나주가 약 18%를 차지했는데, 나주의 재배면적 1642㏊ 중 국내 육성 품종이 425㏊로 25.8%에 달했다. 전국 평균의 약 1.8배다. 신고 비중도 74.2%로 전국 평균을 밑돌았다. 그러나 품종 전환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과수는 통상 20~30년인 과원 갱신기에 새 품종을 심는 데다, 배는 한 번 주 품종으로 자리 잡으면 50년 넘게 재배하기도 한다. 새 품종으로 바꾸면 수확과 소득이 없는 기간이 3년 이상 생기는 점도 농가에는 부담이다.

윤수현 농진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원예작물부장은 "배 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하려면 명절 중심 소비에서 벗어나 소비자가 평소에도 맛있는 국산 배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며 "녹색배 품종 특성에 맞는 생산·유통 기반을 마련해 농가 경쟁력을 높이고 소비자 수요에도 부응하겠다"고 말했다.

기침엔 배·과식엔 배… 고르고 보관하는 법

[인포그래픽] AI툴로 생성한 인포그래픽 이미지 자료.
[인포그래픽] AI툴로 생성한 인포그래픽 이미지 자료.

배가 오래 사랑받은 데는 이유가 있다. 수분 함량이 90%에 가까울 만큼 즙이 많아 갈증을 풀어주고 예부터 기침이나 가래를 다스리는 데 쓰였다. 배에 든 루테올린 성분이 기관지염·기침 완화에 도움을 준다고 알려져 있다. 칼륨이 사과보다 많고 수용성 식이섬유가 풍부해 체내 나트륨 배출을 도와 혈압 관리에도 유리하다. 옥시다제·인버타제 같은 소화 효소가 들어 있어 고기를 먹거나 과식한 뒤 후식으로 배를 찾는 것도 근거가 있는 습관이다. 아스파라긴산은 알코올 분해를 도와 숙취 해소에 이롭다. 다만 한방에서 배는 성질이 찬 과일로 분류돼 속이 냉하거나 설사가 잦은 사람은 한꺼번에 많이 먹지 않는 편이 낫다.

맛있는 배는 겉모습에서 어느 정도 드러난다. 껍질이 팽팽하고 윤기가 돌며 들었을 때 묵직한 것이 좋다. 배 특유의 점무늬가 크고 고르게 퍼져 있으면 잘 익었다는 신호다. 반대로 껍질에 상처가 있거나 눌린 자국이 보이면 그 부위부터 물러지기 쉬우니 피하는 게 좋다.

배는 수분이 많은 만큼 잘못 두면 이틀 만에도 물러진다. 씻지 않은 상태로 하나씩 신문지나 키친타월에 감싼 뒤 비닐봉지나 지퍼백에 넣어 냉장고 채소칸에 넣으면 오래간다. 신문지가 습기와 온도를 완만하게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배끼리 부딪히지 않게 여유를 두는 것도 중요하다. 이렇게 하면 한두 달가량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고, 김치냉장고에 두면 기간은 더 늘어난다. 사과·바나나처럼 에틸렌 가스를 많이 내뿜는 과일과는 떼어 두어야 숙성이 빨라져 무르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껍질을 깎아 두었다면 옅은 소금물에 잠깐 담갔다 물기를 뺀 뒤 밀폐 용기에 넣으면 갈변을 늦출 수 있다.

차례상 한가운데, 배가 빠지지 않는 이유

AI툴로 생성한 자료사진.
AI툴로 생성한 자료사진.

명절만 되면 배가 주요 과일로 대접받는 것은 오랜 상차림 전통과 맞닿아 있다. 차례상에 오르는 기본 과일을 흔히 조율이시(棗栗梨柿), 즉 대추·밤·배·감으로 꼽는데, 여기서 이(梨)가 바로 배다. 진설 방식은 지역과 가문마다 조금씩 달라 "남의 제사에 배 놓아라 감 놓아라 참견 마라"는 말이 있을 정도지만, 이 네 과일이 상에 오르는 것만큼은 크게 다르지 않다.

배가 자리를 지키는 데는 상징적 의미도 따른다. 배는 씨가 6개여서 육조(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의 판서를 뜻한다는 설이 전해진다. 하얀 속살은 백의민족의 순수함과 밝음에 빗대는 의미도 들어있다고 한다. 다만 이런 해석들은 정설이라기보다 예부터 구전돼 온 이야기에 가깝다.

실용적인 이유도 크다. 배는 추석 무렵 제철을 맞아 가장 크고 잘 익은 상태로 나온다. 굵고 반듯한 대과일수록 상에 올렸을 때 격이 서고 선물로도 무게가 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