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 물가 비상인데…  유가 악재 뚫고  장바구니 물가 효자 된 '국민 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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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보다 10% 싼값에 풀린 대표 수입 과일

원·달러 환율과 국제유가가 동시에 들썩이면 수입 과일 가격도 따라 오르지만 최근 바나나 시장에서는 이 공식이 통하지 않고 있다.

서울 시내 대형마트에 과일 판매대 모습. / 연합뉴스
서울 시내 대형마트에 과일 판매대 모습. / 연합뉴스

고환율과 유가 상승으로 수입 과일 값이 뛸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바나나 도매가격은 오히려 빠르게 내려가는 중이다.

3개월 새 20%, 1년 새 10% 하락

바나나 도매가격은 불과 3개월 전과 비교해 20% 가까이 떨어졌고, 1년 전 가격과 견줘도 10%가량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적으로 지정학적 불안이 커진 시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흐름이다. 올해 2월 말 발발한 미·이란 전쟁으로 국제유가가 출렁이고, 이로 인해 원자재를 실어 나르는 물류비 부담이 커질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불과 반년 전엔 정반대였다…2월엔 오히려 15% 급등

역설적이게도 올해 초까지만 해도 바나나값은 정반대 흐름을 보였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집계를 보면 지난 2월 수입 바나나 100g의 평균 가격은 344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14.7% 올랐다. 같은 시기 망고는 31.3%, 파인애플은 9.2% 뛰는 등 수입 과일 전반이 '가격 쇼크'를 겪었다. 당시 농림축산식품부는 산지 작황 부진과 병충해로 필리핀·중남미산 바나나와 망고의 수입 단가가 뛰었다고 설명하며, 2월 12일부터 바나나·파인애플·망고에 매기던 기존 30% 관세를 5%로 낮추는 할당관세를 도입했다. 그러나 할당관세만으로는 급등세를 잡기에 역부족이었고, 여기에 고환율까지 겹치면서 상반기 초반까지 소비자들은 예년보다 비싸진 바나나값을 감수해야 했다.

산지 필리핀, 세계 2위 수출국 자리 되찾아

이랬던 흐름이 반년 만에 뒤집힌 첫 번째 배경은 산지 공급량의 극적인 회복이다. 국내에 들어오는 바나나의 상당수를 책임지는 필리핀은 지난해 기후 변화와 병충해 피해로 세계 3위 수출국으로 밀려나며 위기설에 휩싸였다. 그러나 필리핀 정부가 고부가가치 작물 개발 프로그램을 통해 종묘와 비료 등을 집중 지원한 결과,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집계 기준 지난해 필리핀의 바나나 수출량은 293만t으로 전년보다 25.6% 늘며 남미 에콰도르에 이어 세계 2위 수출국 지위를 다시 찾았다. 이런 회복세는 올해 들어서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 5월 필리핀의 바나나 수출은 전년 동월 대비 23.3% 증가했다. 산지에서 물량이 넉넉하게 풀리면서 국내 수입 가격을 끌어올릴 요인 자체가 사라진 셈이다. 실제 한국의 바나나 수입액 가운데 필리핀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가장 높아, 지난해 기준 전체 수입액 3억 1500만 달러 중 약 1억 8900만 달러가 필리핀산이었다.

바나나 자료사진. / GraphinityLab-shutterstock.com
바나나 자료사진. / GraphinityLab-shutterstock.com

여기에 장기적인 구조 변화도 한몫하고 있다. 국내산 바나나 재배 면적과 생산량이 꾸준히 늘면서 신선하고 저렴한 국산이 수입산 수요 일부를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2018년 42만 7261t에 달했던 바나나 수입량은 이후 서서히 줄어드는 추세를 보이고 있어, 예전보다 수입 물량 변동이 국내 가격에 미치는 영향력 자체가 줄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롤러코스터 탄 국제유가…지금은 오히려 하락세

두 번째 배경은 국제유가의 반전이다. 지난 2월 28일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으로 전쟁이 시작되자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봉쇄에 나섰고, 세계 해상 원유 무역의 약 25%가 지나는 이 길목이 막히며 두바이유는 전쟁 전 배럴당 약 72달러에서 3월 23일 169.8달러까지 치솟았다. 국내 주유소 휘발유 가격도 전쟁 전 1500~1600원대에서 넉 달가량 2000원 안팎까지 뛰었다. 물류비 폭등 우려가 컸던 시점이 바로 이때다. 하지만 6월 말 미·이란 종전 합의와 호르무즈 해협 통항 재개로 유가는 빠르게 진정됐고, 8월 들어서는 오히려 하락세로 돌아섰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최근 발표한 8월 석유시장 보고서에서 올해 세계 석유 수요가 하루 160만 배럴 감소할 것으로 전망을 낮췄고,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주요 산유국 협의체 OPEC+도 지난 5일 8월 산유량을 하루 18만 8000배럴 늘리기로 하며 5개월 연속 증산에 나섰다. 그 결과 뉴욕상업거래소의 9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최근 배럴당 81달러 선까지 내려왔다. 애초 우려했던 극단적인 원유 부족 사태가 나타나지 않으면서, 전쟁 초기의 물류비 폭등 공포가 여름을 지나며 상당 부분 해소된 셈이다.

원화 가치, 1년 만에 최고 수준…FTA 관세 철폐도 한몫

세 번째 배경은 환율이다. 우려와 달리 최근 원·달러 환율은 오히려 안정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지난 21일 원화는 달러당 약 1385원에 거래되며 지난해 9월 말 이후 가장 강한 수준을 기록했다. 미국 달러 약세로 원화 수요가 뒷받침된 영향으로, 물류비 상승 부담을 환율 안정이 상쇄한 것으로 풀이된다. 여기에 지난해 말 발효된 한·필리핀 자유무역협정(FTA)으로 필리핀산 품목의 관세 94.8%가 단계적으로 철폐되고 있는 점도 가격 안정에 보탬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바나나=서민 과일" 공식 여전…파나마병은 변수

이런 흐름 속에 바나나는 여전히 국내에서 가장 대중적인 수입 과일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불과 반년 전만 해도 두 자릿수 상승률을 기록하며 장바구니 물가를 위협하던 품목이, 필리핀의 공급 회복과 국제유가 진정, 원화 강세라는 세 가지 호재가 동시에 맞물리며 오히려 가격이 내려간 모양새다. 다만 이 같은 하락세가 계속될 것이라 단정하기는 이르다는 시각도 있다. 전 세계 바나나 시장을 사실상 지배하는 캐번디시 품종을 위협하는 파나마병의 확산이나 이상기후로 인한 생산국의 작황 불안, 국제 공급망 재편, 그리고 여전히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중동 정세 불안 등은 언제든 가격을 다시 끌어올릴 수 있는 변수로 꼽힌다. 업계 관계자는 산지 공급이 넉넉한 지금 상황이 이어지는 한 당분간 바나나 가격 강세를 기대하기는 어렵겠지만, 기후나 병충해 같은 변수가 겹치면 가격 흐름이 언제든 다시 뒤바뀔 수 있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