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니 은행원이었다…한국 대표 대하소설 쓴 ‘이 소설가’의 반전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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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은행 근무 시절 사보에 작품 발표
‘토지’ 영문 번역 후원·특별전 진행

대하소설 ‘토지’를 남긴 소설가 박경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력이 하나 있다. 작가로 이름을 알리기 전인 1950년대 우리은행의 전신인 상업은행에서 은행원으로 일했고 당시 사보에는 ‘박경리’가 아닌 본명 ‘박금이’로 쓴 작품도 남아 있다.

故 박경리 선생 / 박경리문학관 홈페이지 캡처
故 박경리 선생 / 박경리문학관 홈페이지 캡처

'토지’ 쓰기 전 은행원 박금이…상업은행 사보에 남은 초기 작품

우리은행은 박경리 작가 탄생 100주년을 맞아 대표작 ‘토지’의 영문 번역·출판 사업을 후원하고 특별 전시를 진행한다고 20일 밝혔다. 박경리는 1954년 우리은행의 전신인 상업은행 용산지점에서 근무한 이력이 있다.

우리은행은 지난 19일 서울 중구 본점에 마련된 역사관 ‘우리1899’에서 토지문화재단과 문화협력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기부금을 전달했다. 협약식에는 정진완 우리은행장과 김세희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이 참석했다.

두 기관을 연결하는 고리는 박경리의 젊은 시절이다. 박경리는 문단에 이름을 알리기 전인 1954년 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상업은행에서 근무했다. 서울 용산지점에서 일하던 시기에 상업은행 사보 ‘천일’ 9호에 본명인 ‘박금이’로 시 ‘바다와 하늘’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16연 159행으로 구성된 장시다.

은행을 떠난 뒤에도 인연은 이어졌다. 1955년 10월 발행된 ‘천일’ 11호에는 박경리가 쓴 18쪽 분량의 단편소설 ‘전생록’도 실렸다. 해당 작품과 시의 존재는 박경리의 유족이 과거 상업은행 사보에 남은 자료를 확인해달라고 요청한 것을 계기로 우리은행이 소장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2008년 확인됐다.

현재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 잡은 박경리의 경력을 생각하면 은행 사보에 남아 있는 작품은 등단 전후의 문학 활동을 보여주는 기록이라는 의미도 있다.

박경리는 이후 1950~60년대 ‘김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 등 작품을 잇달아 발표했고 1969년부터 ‘토지’ 집필에 들어갔다. ‘토지’는 1969년 연재를 시작해 1994년까지 약 26년에 걸쳐 완성됐다.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해방에 이르는 시대를 배경으로 수많은 인물의 삶을 그려낸 작품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다룬 대표적인 대하소설로 평가된다.

영어판 있었지만 구하기 힘들었던 ‘토지’…새 번역·출판 지원

이번 협약에서 핵심 사업 가운데 하나는 ‘토지’ 영문 번역과 출판이다. 우리은행은 토지문화재단이 추진하는 영어 번역·출판 사업을 후원해 작품의 해외 유통과 독자 접점을 확대할 계획이다.

‘토지’는 이미 여러 언어로 해외에 소개된 역사가 있다. 일본어 번역을 시작으로 프랑스어와 영어, 독일어판 등이 출간됐고 2009년에는 중국어판도 나왔다. 영어판의 경우 1996년 영국 출판사를 통해 ‘Land’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기록이 있다.

그럼에도 해외 독자가 ‘토지’를 실제로 접하는 과정에는 언어와 유통의 장벽이 남아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해 박경리문학상을 받은 인도 출신 작가 아미타브 고시다. 고시는 2025년 한국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박경리의 ‘토지’를 읽으려고 했지만 영어 번역본을 구하지 못해 단편소설 일부만 접했다고 설명했다. 기존 영어 번역 출간 이력이 있더라도 현재 해외 독자가 손쉽게 확보할 수 있는 판본과 유통망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다.

최근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등을 계기로 한국문학에 대한 해외 독자의 접점이 넓어지면서 번역은 한국 작품의 해외 확산에서 더욱 중요한 단계가 됐다. 영화나 음악과 달리 문학은 원문을 읽을 수 없는 해외 독자에게 번역판의 존재 자체가 작품을 만나는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토지’처럼 시대적 배경과 방언, 계층별 언어, 한국의 역사·생활문화가 복합적으로 등장하는 대하소설은 단순한 문장 번역을 넘어 작품이 지닌 맥락을 다른 언어권에 전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2011년 시작된 박경리문학상…올해는 특별상도 후원

19일 박경리 선생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열린 우리은행과 토지문화재단의 문화협력을 위한 업무협약식에서 정진완 우리은행장(왼쪽)과 김세희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이 우리은행 역사관 '우리1899'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 우리은행 제공
19일 박경리 선생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열린 우리은행과 토지문화재단의 문화협력을 위한 업무협약식에서 정진완 우리은행장(왼쪽)과 김세희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이 우리은행 역사관 '우리1899'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 우리은행 제공

우리은행은 ‘토지’ 번역과 함께 올해 박경리문학상 특별상도 후원한다. 한국문학 발전에 기여한 인물을 선정해 특별상을 수여하는 방식이다.

박경리문학상은 토지문화재단이 박경리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11년 제정했다. 국내 작가만을 대상으로 하는 문학상이 아니라 세계 소설가를 심사 대상으로 삼는 국제 문학상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재단은 문학의 가치를 지키면서 세계 문학에 영향을 준 작가를 선정해 상을 수여해왔다.

지난해 열린 제14회 박경리문학상에서는 아미타브 고시가 수상자로 선정됐다. 심사 과정에서는 세계 작가 29명을 대상으로 약 1년간 심사가 진행됐고, 이집트의 살와 바크르와 인도의 아미타브 고시, 아일랜드의 존 밴빌 등 3명이 최종 후보에 올랐다.

올해는 박경리가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라는 점에서 관련 문화행사도 이어지고 있다. 토지문화재단은 지난 8월 15일 원주 치악예술관에서 박경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토지’ 1부를 바탕으로 만든 무용극 공연을 진행하는 등 문학·공연 분야에서 기념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정진완 우리은행장은 박경리와 우리은행의 오랜 인연을 언급하며 작가가 남긴 문학적 유산이 해외로 확산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은행 지하 역사관에서 박경리 작품 만난다…9월 18일까지 무료 전시

박경리와 상업은행의 인연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전시도 마련됐다. 우리은행은 본점 지하 1층 역사관 ‘우리1899’에서 오는 9월 18일까지 ‘박경리 특별 기획전’을 운영한다.

전시장에서는 박경리가 상업은행에서 근무하던 시절 사보에 발표했던 초기 작품을 비롯해 개인 소장품 등 관련 유물을 무료로 볼 수 있다. 지금은 한국문학사의 대표 작가가 된 박경리가 은행원 ‘박금이’로 생활하던 시절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들이다.

전시가 열리는 ‘우리1899’ 자체도 은행 역사와 관련된 공간이다. 우리은행은 2004년 문을 연 은행사 전문박물관을 전면 개편해 지난해 12월 ‘우리1899’라는 이름으로 다시 개관했다. 명칭에 들어간 ‘1899’는 우리은행의 뿌리인 대한천일은행이 설립된 해에서 따왔다. 역사관에는 대한천일은행 창립청원서와 옛 은행 관련 문서·사무기기 등 한국 근현대 금융사의 자료가 전시돼 있다.

관람 시간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 10시~오후 6시이며, 입장은 오후 5시 30분에 마감한다. 일요일과 법정공휴일, 근로자의 날에는 문을 닫으며 입장료는 무료다. 10명 이상 단체 관람이나 전시 해설은 사전 예약제로 운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