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무기 57개 보유” 트럼프 첫 언급... 일파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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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핵화'에서 '거래'로 트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이 가진 핵무기를 "57개"라고 콕 집어 말했다. 미국 대통령이 북한의 핵무기 수량을 구체적인 숫자로 언급한 것은 처음이다. 그동안 미국 정부가 일부러 모호하게 다뤄 온 북한의 핵 능력을 미국의 최고 통수권자가 사실상 확정된 사실처럼 입에 올린 셈이다. 단순한 말실수로 보기는 어렵다는 관측이 뒤따른다.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받아들이고 수십 년간 미국 대북정책의 뼈대였던 '완전한 비핵화'를 접은 채 '핵 동결과 제재 완화를 맞바꾸는 거래'로 방향을 틀 수 있다는 신호로 읽히기 때문이다.

오는 27일까지 예정돼 있던 '을지 자유의 방패(UFS)' 훈련 일정이 미 측의 제안으로 21일로 단축하기로 결정된 19일 경기 동두천시 주한미군 기지에서 미군 스트라이커 장갑차가 기동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6일(현지시각)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좋은 관계를 언급하며 한미 연합훈련을 대폭 축소할 것을 지시했다. / 뉴스1
오는 27일까지 예정돼 있던 '을지 자유의 방패(UFS)' 훈련 일정이 미 측의 제안으로 21일로 단축하기로 결정된 19일 경기 동두천시 주한미군 기지에서 미군 스트라이커 장갑차가 기동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6일(현지시각)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좋은 관계를 언급하며 한미 연합훈련을 대폭 축소할 것을 지시했다. / 뉴스1

트럼프 대통령은 19일(현지시각) 백악관에서 취재진과 만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두고 "매우 강력한 핵무기 57개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결코 그렇게 되도록 놔둬서는 안 됐지만, 그는 이미 갖고 있다"며 "나는 그와 아주 잘 지낸다"고 했다. 김 위원장과 올해 안에 만날 수 있다는 뜻도 함께 내비쳤다.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57개는 그동안 해외 연구기관들이 내놓은 추정치와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스웨덴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최근 북한이 조립을 마친 핵탄두를 지난해 50기에서 올해 60기로 늘려 잡았고, 여기에 30기를 더 만들 수 있는 핵물질까지 확보한 것으로 봤다. 미국 핵과학자회(BAS)도 북한이 최대 90기 분량의 핵분열 물질을 만들어 냈고 50기가량을 조립했을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런 추정치에 근접한 숫자를 공개적으로 꺼냄에 따라 미국이 북한의 핵 보유를 기정사실로 인정하는 쪽으로 기운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이 정도 규모는 인도(190기)나 파키스탄(170기), 이스라엘(90기) 같은 나라들보단 적다. 하지만 이미 중장거리 탄도미사일 같은 운반 수단까지 갖춘 북한을 비핵화하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게 냉정한 평가가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런 인식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는 지난해 1월 취임 직후부터 북한을 핵보유국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후에도 비슷한 표현을 반복해 왔다. 다만 그때마다 "핵무기를 많이 갖고 있다"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말했을 뿐 이번처럼 개수를 특정하지는 않았다. 행정부 고위 인사들도 북한을 '핵으로 무장한 나라'로 지칭하면서도, 공식 목표는 어디까지나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라고 못 박아 왔다. 미국 정부는 올해 5월 미·중 정상회담 뒤에도, 지난 6월에도 비핵화 목표를 유지한다는 입장을 되풀이했다.

그런 미국이 이번에는 결이 다른 태도를 보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다른 일정에서 '김 위원장과 관계를 재개하는 목표가 여전히 비핵화냐'는 질문을 받자 "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며 답을 피했다. 대신 "김 위원장과 좋은 관계"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수십 년을 이어 온 비핵화 원칙을 확인해 달라는 물음에 즉답을 피한 것 자체가 기존 노선을 손볼 수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는 분석이 나온다.

문제는 북한이 원하는 대가다. 김 위원장은 미국이 '비핵화'를 전제로 하는 협상에는 응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어 왔다. 그가 진짜 노리는 것은 국제사회가 북한을 '핵을 가진 나라'로 공식 인정하는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상회담이라는 '그림' 자체에 강한 의욕을 보여 왔는데, 회담을 성사시키려면 김 위원장이 부르는 값, 즉 비핵화 포기와 핵보유 인정을 어느 정도 받아들여야 하는 구조다. 빅터 차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석좌는 북한의 핵 보유 현실을 인정한 뒤 군축·비확산 대화로 방향을 틀자는 견해를 밝혀 온 대표적 인물이다. 일부에서는 이란 핵 협상에서 보였듯 알맹이 없는 거창한 공동성명과 '추가 협상 약속'만 주고받는 방식이 되풀이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내놓는다.

실제로 물밑 접촉이 이미 진행 중인 정황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앞서 김 위원장으로부터 답신을 받았다고 언급했고 두 사람이 친서를 주고받고 있느냐는 질문에는 확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1기 집권 때 김 위원장과 여러 차례 친서를 교환했던 그가, 다시 비슷한 방식으로 관계 복원에 나선 것 아니냐는 관측이 뒤따른다.

이런 움직임의 배경에는 미국 국내 정치 사정도 있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지지율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이란과의 전쟁 출구 전략은 여전히 뚜렷하지 않다. 여기에 무기 재고가 빠르게 소진되고 군의 대비 태세가 예전만 못하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이런 국면에서 김 위원장과의 회담과 '북핵 관리'라는 외교 성과를 손에 쥐면,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안팎의 불만을 돌릴 카드가 될 수 있다. 북한 핵무기 개수를 콕 집어 위험성을 부각하면서도 동시에 "똑똑한 대통령이 있는 한 그는 괜찮을 것"이라고 한 발언 역시, 그 위협을 자신이 관리하고 있다는 점을 과시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가장 큰 파장은 한반도와 동북아 안보 지형에서 나타난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북한에 유화 신호를 보내는 차원에서 한미 연례 연합훈련인 '을지 자유의 방패'(UFS)를 대폭 축소하도록 지시했다. 한국이 이란 전쟁에서 미국을 돕지 않았다는 불만과 김 위원장과의 관계를 함께 거론하면서다.

한미동맹은 미국이 핵우산, 곧 확장억제로 한국의 안보를 책임진다는 약속을 근간으로 삼는다. 이 약속은 미국이 '핵을 가진 북한'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암묵적 전제 위에 서 있다. 그런데 미국이 북한의 핵 보유를 받아들이고 동결·제재 완화라는 거래에 나서면 이 전제부터 흔들린다. 그렇게 되면 한국과 일본에서 자체 핵무장론이나 전술핵 재배치 요구가 다시 거세질 수 있다. 일본은 그동안 북한의 핵보유 인정으로 이어질 수 있는 군축 대화에 반대해 왔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도 미국으로부터 '완전한 비핵화' 공약을 재확인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미국의 대북 억제 태세가 느슨해질수록 동맹국들이 '스스로의 핵'을 만지작거릴 유인은 커진다.

오는 27일까지 예정돼 있던 '을지 자유의 방패(UFS)' 훈련 일정이 미 측의 제안으로 21일로 단축하기로 결정된 19일 경기 동두천시 주한미군 기지에 미군 장비들이 주기돼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6일(현지시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좋은 관계를 언급하며 한미 연합훈련을 대폭 축소할 것을 지시했다 / 뉴스1
오는 27일까지 예정돼 있던 '을지 자유의 방패(UFS)' 훈련 일정이 미 측의 제안으로 21일로 단축하기로 결정된 19일 경기 동두천시 주한미군 기지에 미군 장비들이 주기돼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6일(현지시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좋은 관계를 언급하며 한미 연합훈련을 대폭 축소할 것을 지시했다 / 뉴스1


북한을 둘러싼 국제 구도도 이런 흐름을 부추긴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고리로 러시아와 군사·외교적으로 밀착 중인 북한은 병력과 무기까지 지원하며 관계를 다지고 있다. 북한과 러시아의 밀착을 마냥 반기지는 않는 중국도 북한의 핵무장에는 사실상 눈을 감는 모습이다. 미·중 정상이 비핵화를 공유 목표로 확인했다지만 정작 중국은 공식 발표에서 비핵화를 앞세우지 않았다. 북한으로서는 미국을 상대할 지렛대가 그만큼 늘어난 셈이다.

한국과 미국이 하반기 정례 연합연습 '을지 자유의 방패'(Ulchi Freedom Shield·UFS)를 진행한 17일 경기 평택시 팽성읍 주한미군기지 캠프 험프리스에 장비들이 계류되어 있다. 한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와의 '매우 좋은 관계'를 언급하며 한미합동군사훈련 대폭 축소를 지시했다고 밝혔다. / 뉴스1
한국과 미국이 하반기 정례 연합연습 '을지 자유의 방패'(Ulchi Freedom Shield·UFS)를 진행한 17일 경기 평택시 팽성읍 주한미군기지 캠프 험프리스에 장비들이 계류되어 있다. 한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와의 '매우 좋은 관계'를 언급하며 한미합동군사훈련 대폭 축소를 지시했다고 밝혔다. / 뉴스1

다만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곧바로 정책 전환으로 단정하기는 이르다. 그는 그동안에도 북한을 '핵보유국'이라 부르다가도 비핵화를 지지한다고 말을 바꾸는 등 오락가락하는 태도를 보여 왔다. 백악관은 여전히 공식적으로는 '완전한 비핵화' 방침을 유지하고 있다. 이번에도 정부 차원의 정책 변경이 공식화한 것은 아니다.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공식 인정하는 일은 미국 의회와 동맹국은 물론 행정부 내부에서도 반발에 부딪힐 수 있는 사안이다. 실제 정상회담이 성사될지, 성사된다면 무엇이 협상 테이블에 오를지도 아직은 확실하지 않다.

결국 관건은 '57'이라는 숫자가 흘리듯 나온 말인지, 아니면 계산된 신호인지다. 그 답에 따라 30년 넘게 버텨 온 '완전한 비핵화'라는 문구가 미국 대북정책에서 살아남을지가 갈린다. 한국과 일본은 트럼프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과 북미 회담 추진 과정을 지켜보며 각자의 셈법을 다시 짜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