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하영의 증조부는 친일파인가] 민족문제연구소, 공식 입장문 발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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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호는 친일파... 하영 겸허하게 반성하라"
민족문제연구소가 배우 하영(안하영·33)의 증조부 안상호(1874∼1927)를 두고 "친일 행적은 명백하다"며 하영에게 역사적 성찰과 반성을 촉구했다.

연구소는 14일 입장문을 내고 "논란의 본질은 조상의 식민지 협력 이력에 대한 최소한의 역사적 성찰 없이 발언해 대중에게 상처를 준 '역사 인식과 성찰 부재의 문제'에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일제강점기 전문 연구기관으로서 사실관계를 책임 있게 정리해 달라는 시민과 회원들의 요청이 잇따르자 안상호의 실제 행적과 대정친목회 등 친일단체의 성격, 전문직 친일 행위에 대한 평가 기준을 직접 밝히고 나선 것이다.
연구소는 안상호의 화려한 이력 이면에 부일 협력 행적이 엄연히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안상호는 대한제국 관립일어학교와 도쿄 자혜의원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전문직 의사였다. 그러나 연구소가 정리한 행적을 보면 안씨는 의료 활동에만 머물지 않았다.
우선 안씨는 안중근 의사에게 피살된 이토 히로부미를 추도하기 위해 민간에서 조직된 '국민대추도회(대한국민추도회)' 준비위원으로 1909년 11월 이름을 올렸다. 실제 추도회가 열리지는 않았지만, 관(官) 주도가 아닌 민간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추진됐다는 점에서 연구소는 이를 주목할 만한 행적으로 봤다.

식민통치 기구에도 발을 들였다. 안씨는 경성부윤의 자문기구이자 지방행정 보조기구였던 경성부 협의회원(1914·1918·1920년 관선 임명직)을 지냈고, 식민지 금융수탈 기구로 꼽히는 경성 종로금융조합의 조합장(1922~1927)을 맡았다. 내선융화·친일단체 활동도 이어졌다. 경성신사의 씨자총대(신도 대표·1915), 내선융화 단체인 대정친목회 평의원(1916), 반일운동 배척을 표방한 동민회 회원(1924) 및 평의원(1925∼1927)이 그 목록이다.
연구소가 안씨의 친일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로 든 것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918년 12월 10일자 기사다. '전연히 내지화한 의사 안상호씨의 가정'이라는 제목의 이 기사에서 안씨는 "조선 옷은 한 벌도 없다", "조선 사람과 상관이 없다"는 취지로 말하며 일제의 동화정책을 전면적으로 내면화한 인물로 소개됐다. 안씨는 일본에서 만난 일본인 부인과 가정을 꾸렸고, 기사에는 조선말은 한마디도 못 한다는 취지의 발언까지 담겼다.

연구소는 "어떤 단체에 이름을 올렸다고 친일로 단정할 수 없다"는 신중론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안씨가 평의원으로 이름을 올린 대정친목회는 고문 이완용·민영휘, 회장 조중응 등 거물 친일파를 중심으로 조선인 전직 관료와 귀족, 대지주, 실업가들이 '내선융화'를 표방하며 결성한 단체다.
연구소는 이 단체가 조선인의 결사 활동이 극도로 억압되던 1910년대 무단통치기에 설립됐다는 점에서, 전시체제기에 반강제로 조직된 전쟁협력단체와는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설명했다. 당시 종교단체를 제외하면 거의 유일한 조선인 단체였고, 조선인 유력자와 일제 당국을 잇는 가교를 자임했다는 것이다. 3·1운동 전후 일제가 이른바 문화통치를 획책할 당시엔 독립불능론을 내세우며 저항 의지를 무력화하는 협력기구로 기능했다고 연구소는 규정했다. 이런 단체에 평의원으로 참여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친일 행위"라는 것이 연구소의 결론이다.
일부 유튜브 방송 등에서 제기된 "친일인명사전에서 전문직은 다 뺐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연구소는 사실관계 오류를 지적했다. 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2009) 수록 인원은 4389명"이라며 방송에서 언급된 '708명'은 2002년 광복회가 자체 선정한 692명에 국회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이 16명을 추가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을 혼동한 것이라고 밝혔다.
전문직 일괄 배제 주장도 오해라고 반박했다. 친일인명사전에는 문화·예술, 종교, 법조, 언론, 교육 등 각 분야 인물이 다수 등재돼 있다는 것이다. 연구소는 기술직·전문직이라는 이유만으로 당연 수록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복수의 친일협력단체에 가담했거나 지속적·능동적 부일 행적이 입증된 인사는 엄격한 심의를 거쳐 사전에 실었다고 설명했다. 핵심 기준은 친일행위의 자발성·반복성·지속성과 식민통치기구 내 지위였으며, 전문직 여부는 면책 사유가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연구소는 지식인과 전문직의 친일이 사회적 영향력과 이데올로기 확산 효과가 컸다는 점에서 책임을 가볍게 볼 수 없다고 강조했다. 안씨의 경우 단순한 의료 활동을 넘어 경성부 협의회원, 대정친목회·동민회 평의원, 경성 종로금융조합장 등 식민통치기구와 관변단체의 주요 직책을 두루 거쳤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명단마다 수록 인원이 다른 이유에 대해서도 연구소는 별도로 설명했다. 인원 차이는 기준의 자의적 왜곡이나 정치적 의도 때문이 아니라 조사 주체의 성격과 목적, 법적·학술적 기준의 차이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1948년 제헌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직접 처벌을 목적으로 출범했으나 이승만 정권의 방해와 경찰의 습격으로 조기 와해됐다. 2005년 출범한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법적 처분이 따르는 국가기구였던 만큼 지위보다 엄격한 행위 입증에 집중했고, 그 결과 규모가 1006명에 머물렀다. 반면 민간 학술단체가 주도한 친일인명사전은 반민족행위자뿐 아니라 부일협력자까지 포괄해 4389명을 실었다.
안상호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서도 연구소는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2009년 발간 당시 축적된 자료로는 안씨의 친일 행적이 선정 기준에 미달해 편찬위원회 결정으로 수록을 보류한 것일 뿐, 미수록이 곧 '친일 행적이 없음'을 뜻하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연구소는 "과거사 기록 사업은 완료된 결과물이 아니라 사료의 발굴과 검증을 통해 '보유편'과 '개정증보판'으로 이어지는 현재진행형 학술 사업"이라며 새롭게 확인되는 관보와 신문 기사, 단체 명부 등 1차 사료를 바탕으로 학술 검증을 이어가야 한다고 밝혔다.
동시에 연구소는 연좌제적 비난은 경계했다. 역사적 과오에 대한 법적·정치적 책임은 행위 당사자에게 귀속되는 것이 원칙이며, 선대의 과오를 후손에게 전가하는 발상은 민주 사회에서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연구소는 강성현 교수가 지적한 대목을 인용해 "'연좌는 안 된다'는 한 문장에 질문이 막혀버릴 때 가장 크게 손해 보는 쪽은 친일 청산이라는 의제 자체"라고 짚었다. 강 교수의 지적처럼 방어 논리에 머물 것이 아니라, 식민지배 아래 형성된 전문직 계보와 사회적 자산이 해방 후 청산 없이 어떻게 기득권으로 승계·세습됐는지에 대한 구조적 성찰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연구소는 하영을 향해 "조상의 과오를 성찰 없이 미화하거나 비판 없이 소비한 태도에 대한 겸허한 반성이 선행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논란은 하영이 지난 7일 방송한 KBS 2TV 예능 '옥탑방의 문제아들'에서 4대째 의사 집안이라는 사실을 공개하면서 불거졌다. 이후 그의 증조부가 일제강점기 의사로 활동한 안상호로 알려지며 온라인에서 친일 의혹이 확산했다.
후폭풍도 이어졌다. 하영과 상대 배우 정해인은 신작인 넷플릭스 시리즈 '이 엿같은 사랑' 인터뷰를 취소했다. 하영이 모델로 나선 삼성전자와 의류 브랜드 아티드는 광고 영상을 비공개로 전환했고, 그가 증조부를 언급한 '옥탑방의 문제아들'은 다시 보기가 중단되고 유튜브에 공개됐던 클립 영상도 비공개 처리됐다.
논란이 이어지자 하영은 지난 12일 자필 사과문을 통해 "후손으로서 진심으로 사죄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안상호 관련 논란에 대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입장>
1. 입장문 발표의 배경
최근 언론 및 온라인 공간을 통해 배우 하영의 증조부 안상호의 친일 행적과 후손들의 언행에 대한 논란이 일파만파 확산되고 있습니다. 사실에 부합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지만 일부 과도한 해석이나 오류도 많아 혼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도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시민 여러분과 회원들께서는 일제강점기 전문 연구기관인 민족문제연구소가 이 사태를 책임 있게 정리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안상호의 실제 행적과 역사적 사실관계를 명확히 밝히고, 대정친목회 등 친일단체의 성격, 전문직의 친일 행위에 대한 평가 기준, 그리고 바람직한 친일청산의 방향에 대한 민족문제연구소의 견해를 표명하고자 합니다.
2. 안상호의 주요 친일 행적
안상호(1874∼1927)는 대한제국 관립일어학교와 도쿄 자혜의원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전문직 의사였지만, 화려한 이력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친일 · 부일 협력 행적이 존재하는 것도 엄연한 사실입니다.
● 일제침략의 원흉 이토 추도 : 1909년 11월, 안중근 의사에게 피살된 이토 히로부미를 추도하기 위해 민간에서 조직한 ‘국민대추도회(대한국민추도회)’ 준비위원으로 참여했습니다. 실제 추도회가 진행되지는 않았으나, 관민추도회와 별도로 민간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추진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 식민통치 및 수탈기구 참여 : 경성부윤의 자문기구이자 일제 식민통치를 뒷받침한 지방행정 보조기구인경성부 협의회원(1914, 1918, 1920, 관선 임명직)을 역임했습니다. 또 식민지 금융수탈기구인 경성 종로금융조합의 조합장(1922∼1927)을 지냈습니다.
● 내선융화 및 친일단체 활동 : 경성신사의 씨자총대(신도 대표, 1915), 내선융화 단체인 대정친목회 평의원(1916), 반일운동 배척을 표방한 동민회 회원(1924) 및 평의원(1925∼1927)으로 활동했습니다.
● 동화주의의 내면화: 『매일신보』(1918.12.10.) 기사에서 “조선 옷은 한 벌도 없고 일본 사람과 똑같다”, “조선 사람과 상관이 없다”라며 밝히는 등 일제의 동화정책을 전면적으로 내면화한 대표적 인물로 소개되었습니다.
3. “어떤 단체에 이름을 올렸다고 친일로 단정할 수 없다”는 신중론에 대해
대정친목회(대정실업친목회)는 고문 이완용 · 민영휘, 회장 조중응 등 거물 친일파들을 중심으로 조선인 전직 관료 · 귀족 · 대지주 · 실업가들이 결집하여 ‘내선융화’를 표방하며 결성한 단체입니다.
조선인의 단체 결성과 결사 활동이 극도로 억압되던 1910년대 무단통치 하에서 설립되었다는 점에서, 1930년 전시체제기에 반강제적으로 조직된 전쟁협력단체와는 결성 배경과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당시 조선인 단체로는 종교단체를 제외하면 대정친목회가 거의 유일했습니다. 논란의 여지가 없는 친일 엘리트의 모임이었던 대정친목회는 조선인 유력자와 일제 당국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자임했습니다. 나아가 3·1운동 전후 일제가 이른바 문화통치(민족분열책)를 획책할 당시, 대정친목회는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홍보하고 민족의 저항 의지를 무력화하는 정신적 · 사회적 협력기구로 기능했습니다. 이들은 3·1운동을 반대하고 일제 통치에 순응하면서 ‘독립불능론’을 주장하는 한편, 산업의 발달과 문화 향상을 내세우는 개량주의적 ‘실력양성론’을 펼쳤습니다.
안상호는 이 단체의 평의원(1916.11.29.)으로 명단이 확인됩니다. 따라서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단체의 성격을 고려할 때, 평의원(일종의 대의원 격)으로 참여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친일 행위입니다.
4. “친일인명사전에서 전문직은 모두 다 뺐다”는 주장에 대하여
일부 유튜브 방송 등에서 “친일파인명사전 708명에서 전문직(의사, 변호사) 이런 사람들은 다 뺐다”, “시대의 아픔으로 어쩔 수 없었다”는 취지의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이는 두 가지 명백한 사실관계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첫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2009) 수록 인원은 총 4,389명입니다. 방송에서 언급된 “708명”은 2002년 광복회가 자체 선정한 692명에 국회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의원모임)이 16명을 추가하여 발표했던 ‘친일파 708인 명단’을 혼동한 것입니다.
둘째, 『친일인명사전』이 전문직을 일괄 배제했다는 것은 명백한 오해입니다. 『친일인명사전』에는 문화·예술 · 종교 · 법조 · 언론 · 교육 등 각 분야 친일 인물이 다수 등재되어 있습니다. 『친일인명사전』 수록 기준에 따르면, 기술직이나 전문직이라는 이유만으로 당연 수록 대상이 되지는 않지만, 복수의 친일협력단체에 가담했거나 지속적이고 능동적인 부일 행적이 입증된 전문직 인사는 엄격한 심의를 거쳐 사전에 수록하였습니다. 즉, 핵심 기준은 친일행위의 자발성‧반복성‧지속성과, 식민통치기구 내 특정 지위(귀족, 중추원, 고등관, 경찰간부, 군장교, 친일단체 간부급) 여부였으며, 전문직 여부는 면책 사유가 될 수 없었습니다.
안상호의 경우, 단순한 의료 활동에 머무르지 않고 경성부 협의회원, 대정친목회 및 동민회 평의원, 경성종로금융조합장 등 식민통치기구와 관변단체의 주요 직책을 역임하였습니다. 지식인과 전문직 인사들의 친일은 사회적 영향력과 이데올로기 확산 효과가 막대했다는 점에서 결코 그 역사적 책임을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5. 친일파 명단마다 수록 인원이 다른 이유
수록 인원의 차이는 기준의 자의적 왜곡 또는 정치적 의도 때문이 아니라, 조사 주체의 성격, 조사 목적, 법적‧학술적 기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1948년 제헌국회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인신 구속과 공민권 제한 등 직접 처벌을 목적으로 출범했으나, 이승만 정권의 조직적 방해와 경찰의 특위 습격으로 조기 와해되었습니다.
2005년 출범한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반민규명위)는 법적 행정처분이 따르는 국가기구였기 때문에 지위 자체보다는 엄격한 행위 입증에 집중하였고, 입법 당시의 여야간 절충 등 태생적 한계로 인해 규모가 1,006명에 머물렀습니다.
반면 민간 학술단체가 주도한 『친일인명사전』은 반민족행위자만이 아니라 부일협력자까지 포함하였으며, 식민통치를 지탱한 고등관료, 고등경찰, 군 장교 등 ‘지위범’을 포함하고 만주 등 해외 지역까지 범위를 확장하였으며, 지식인과 전문직의 역사적 책임을 가장 포괄적이고 엄정하게 물었습니다.
6. 친일인명사전 미등재가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친일인명사전』 수록 여부는 편찬위원회의 선정 기준과 행위의 자발성, 적극성, 반복성, 지속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뒤 결정했습니다. 2009년 발간 당시 민족문제연구소가 축적한 자료로는 안상호의 친일 행적이 선정 기준에 미달했기 때문에 편찬위원회의 결정으로 수록을 보류하였습니다.
그러나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 곧 ‘친일 행적이 없음’을 뜻하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해방 60여 년 만에 결실을 맺은 사전 편찬 작업은 당시 축적된 학술 연구 성과와 사료의 한계 속에서 진행되었으며, 인력과 자료 부족으로 인해 판단이 보류된 인물도 다수 존재합니다.
『친일인명사전』을 비롯한 과거사 기록 사업은 완료된 결과물이 아니라 사료의 발굴과 검증을 통해 ‘보유편’과 ‘개정증보판’으로 이어지는 현재진행형 학술 사업입니다. 새롭게 확인되는 관보, 신문 기사, 단체 명부 등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지속적인 학술 검증이 이어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7. 연좌제적 비난 경계와 구조적 성찰의 필요성
이번 논란의 본질은 배우 개인이 ‘친일파의 후손’이라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 조상의 식민지 협력 이력에 대한 최소한의 역사적 성찰 없이 발언하여 대중에게 상처를 준 ‘역사인식과 성찰 부재의 문제’에 있습니다. 조상의 과오를 성찰 없이 미화하거나 무비판적으로 소비한 태도에 대한 겸허한 반성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역사적 과오에 대한 법적·정치적 책임은 행위 당사자에게 귀속되는 것이 원칙이며, 선대의 과오에 대한 단죄를 후손에게 전가하는 연좌제적 발상은 민주 사회에서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강성현 교수가 지적했듯, “어떤 제도가 그 이력을 씻어주었나… 이 질문들이 ‘연좌는 안 된다’는 한 문장에 막혀버릴 때 가장 크게 손해 보는 쪽은 친일 청산이라는 의제 자체다”라는 경고를 새겨야 합니다. 단순히 ‘후손에 대한 연좌제 금지’라는 방어 논리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식민지배 하에서 형성된 전문직 계보와 사회적 자산이 해방 후 청산 없이 어떻게 기득권으로 승계되고 세습되었는지에 대한 구조적 질문과 역사적 성찰로 이어져야 마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