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작 개봉 코앞에 두고, 갑작스레 세상 떠난 감독…향년 43세
작성일
국내 개봉까지 단 며칠 앞두고...10년 완성작, 유작이 되다
다음달 5일 개봉을 앞둔 장편 애니메이션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의 허범욱 감독이 28일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향년 43세.

백재호 한국독립영화협회 이사장은 이날 개인 인스타그램을 통해 "故 허범욱 감독님께서 2026년 7월 28일 영면하셨기에 삼가 알려드린다"고 전했다. 영화 배급사 인디스토리 측 관계자 역시 "불의의 사고로 28일 오전 사망하셨다"고 전하며 고인의 별세 소식을 공식 확인했다.
이날 이화정 영화기자는 개인 인스타그램을 통해 “아깝고 안타깝고 애통하다. 근래 만난 가장 반짝이는 재능과 열정을 가진 감독. 이렇게나 비정하고 무자비한 세상에 화가 난다. 불과 얼마 전 부천에서 만나 개봉을 기원하며 헤어진 게 마지막이 될 줄이야”라며 허 감독 부고에 심경을 드러냈다.
이 기자는 “센 화법 안에 세상의 모든 가여운 생명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아낌없이 나누어 준 연출자. 대딤을 끝내고 그의 눈빛과 단단하고 영민한 말들 하나하나에 한국엉화도, 애니메이션도 희망을 걸 수 있겠다는 든든한 마음이 생겼다. 그의 비전이 더 많이 이루어지길 바랬고, 이제 그 시작을 맞아 들뜬 감독의 마음이 고스란히 내게도 느껴져 함께 많이 기뻤다. 정말 너무도 너무도 믿고 싶지 않은 소식에 망연자실 하다”라며 허 감독의 영면을 빌었다.

화재 사고로 추정…경찰 조사 진행 중
허 감독의 정확한 사인은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았다. 다만 관련 정황상 화재 사고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사망 경위에 대해서는 현재 경찰 조사가 진행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지난 24일에는 영화 언론시사회가 예정돼 있었으나 당일 아침 돌연 취소되며 이상 기류가 감지된 바 있다. 당시 취소 사유는 별도로 공지되지 않았지만, 이후 벌어진 감독의 갑작스러운 별세 소식과 맞물리며 뒤늦게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빈소는 서울 한강성심병원에 마련됐다. 발인은 오는 30일 오전 8시로 예정돼 있다.
10년 만에 완성한 두번째 장편, 안시부터 부천까지 35개 영화제 초청
1983년생인 허 감독은 서울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졸업 후 한겨레문화센터와 한국영화아카데미 등에서 애니메이션 연출을 공부했다. 단편 '평범한 식사'(2009), '선량한 인간들의 도시'(2011), '갈라파고스'(2019) 등을 잇달아 완성하며 필모그래피를 쌓았고, 2015년에는 첫 장편 애니메이션 '창백한 얼굴들'로 홀랜드애니메이션영화제 장편 대상을 수상했다.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는 허 감독이 첫 장편 이후 10년 만에 완성한 두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제48회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와 제17회 아시아태평양스크린어워즈를 비롯해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 브뤼셀국제판타스틱영화제 등 전세계 35개 영화제에 초청받으며 올해 국내외에서 화제를 모은 작품 중 하나로 꼽혔다. 국내에서는 제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장편 특별언급을 받았고, 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는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제20회 서울인디애니페스트에서는 미리내로 관객상을 받으며 평단과 관객 양쪽에서 고른 호응을 얻었다.
작품은 지난 5월 29일 일본 11개 극장에서 먼저 개봉했다. 특유의 잔혹한 서사와 이미지로 현대사회의 폭력성과 인간성의 본질을 짚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앞서 아시아태평양스크린어워즈 최우수작품상 후보에 올랐을 당시 고인은 기획 의도에 대해 "인간다움이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인간과 짐승의 경계를 그린 하드보일드 애니메이션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는 인간이 되려는 돼지 'H'와 짐승이 되려는 인간 '정석'이 시스템의 통제 속에서 생존을 벌이는 하드보일드 애니메이션이다. 각본과 연출은 허범욱 감독이 직접 맡았으며, 성우로는 한우진, 남도형, 민승우, 김도희, 방시우, 박주광, 나은혁, 김용석, 임혁이 출연한다. 허범욱 필름이 제공 및 제작을 맡았고 크리에이티브 섬이 공동제작에 참여했다. 배급은 인디스토리가 담당한다. 러닝타임은 105분이며 등급은 청소년관람불가다.

최근 제작진이 공개한 보도스틸 12종은 흑백 작화와 인물 클로즈업을 중심으로 구성돼 작품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그대로 담아냈다. 실사에 가까운 명암 대비와 인물의 표정을 부각한 구도가 특징으로, 시스템 속에서 생존을 다투는 인물들의 심리를 시각적으로 드러낸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작이 된 신작, 예정된 국내 개봉 일정에 관심
영화는 애초 오는 8월 5일 국내 개봉이 예정돼 있었다. 10년에 걸친 작업 끝에 완성된 두번째 장편이자 감독 생전 마지막 연출작이 되면서, 예정된 개봉 일정이 그대로 진행될지 여부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앞서 취소됐던 언론시사회 일정이 재조정될지, 배급사 측이 추가 공지를 내놓을지도 지켜볼 부분이다. 다만 현재까지 배급사 인디스토리 측에서 개봉 일정 변경과 관련한 별도 발표는 나오지 않은 상태다.
고인은 첫 장편 '창백한 얼굴들'로 국제 무대에서 이름을 알린 뒤, 오랜 시간 신작을 준비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를 비롯한 35개 영화제 초청과 서울독립영화제 최우수작품상 수상 등은 그가 국내 독립 애니메이션 씬에서 꾸준히 인정받아 온 창작자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특히 일본에서 먼저 개봉한 이번 작품이 현지에서도 현대사회의 폭력성과 인간성을 그린 서사로 평가받았다는 점에서, 국내 개봉을 앞두고 고인의 갑작스러운 별세가 더욱 안타까운 소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