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호프'는 왜 외계인의 입으로 의미심장한 성경 구절을 읊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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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뜬 자의 무력함: 영화 '호프'의 대낮 신학

※ 이 글에는 영화 '호프'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히브리서 11장의 이 문장을 거대한 크리처 액션의 문 앞에 세우는 것은 얼핏 오류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뜬금없이 빌려 온 제사(題詞)가 아니다. 극이 끝나갈 무렵 두 시간 반이 넘도록 인간을 압도하고 사냥하던 외계 종족의 하나인 조르(알리시아 비칸데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대사다. 서사의 매듭보다 물리적 충격의 연쇄로 스스로를 직조하던 영화는 마지막 순간 인간의 경전을 외계인에게 얹는다. 이 기이한 반전에 '호프'의 열쇠가 들어 있다. 나홍진이 영화의 발단을 극장이라는 경험 양식의 위기에서 찾았다는 사실까지 겹쳐 놓으면, 신약의 한 줄은 장식이 아니라 이 영화의 존재론에 육박한다.


영화 '호프' 스틸
영화 '호프' 스틸

나홍진이 만들려 한 것은 이야기를 전달받는 자리가 아니라 무언가를 목격하고 그 앞에서 압도당하는 자리, 곧 톰 거닝이 초기 영화를 두고 명명한 '어트랙션의 영화'의 21세기적 귀환이었다. 관객을 이야기 속으로 흡수하는 대신 스크린 밖으로 밀어내며 정면으로 들이받는 전시(展示)의 미학이 그 핵심이다. '호프'의 야심은 서사가 아니라 이 충돌의 강도에 있고, 이 야심은 스트리밍이 삼켜 버린 관람 조건에 대한 하나의 응수이기도 하다. 오직 극장에서만 온전히 발생하는 사건이 되기를 영화는 처음부터 자처한다.

이 야심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선택이 '빛'이다. 괴수영화는 통상 어둠의 장르다. 어둠은 괴물의 불완전한 형상을 가려 주고, 보이지 않음으로써 상상을 증폭시키며, 동시에 의미의 공백을 그럴듯하게 봉합한다. '호프'는 이 오래된 협약을 거부한다. 나홍진과 촬영감독 홍경표는 괴물을 대낮의 벌판 한가운데로 끌어내 숨을 곳 없는 빛 속에서 그것을 응시하게 한다. 그런데 결과가 역설적이다. 모든 것이 보이는데도 아무것도 장악되지 않아서다. 눈은 대상을 남김없이 받아들이지만 정신은 그 크기와 속도를 하나의 상(像)으로 종합하지 못한다. 이마누엘 칸트가 수학적 숭고라 부른 경험, 즉 감각이 포착한 규모를 상상력이 끝내 통합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그 지점이 '호프'의 대낮에 재현된다. 어둠이 존재를 숨겨 두렵게 하는 영화가 아니라 다 보여주고도 이해에 실패하게 만드는 영화. 여기에서 작품의 주제는 촬영의 층위에 새겨진다.


영화 '호프' 스틸
영화 '호프' 스틸

이 주제가 드물게 대사의 표면으로 폭발하는 순간이 있다. 숲에서 공포에 질린 낙연(이상희)이 눈을 감은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절규할 때 파출소장 고범석(황정민)은 그에 못지않게 악을 쓰며 되받는다. "눈을 뜨면 되잖아요." 궁지에 몰린 인간이 목이 터져라 내지르는 이 고함은 처음엔 헛웃음을 부르지만 곱씹을수록 영화 전체의 명제로 읽힌다.

눈을 감는 도피는 영화가 처음부터 해부해 온 또 다른 반사와 근본에서 한 몸이다. 눈앞의 것을 곰이나 호랑이로 서둘러 부르는 오인 말이다. 낯선 것을 익숙한 이름으로 덮는 것이나 낯선 사건에서 아예 눈을 감는 것은 결국 불가해를 불가해인 채로 두려는 회피다. 범석의 고함은 오인에서 깨어나라는 요구다. 네가 붙인 이름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실제로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요구다.

다만 손쉬운 위안은 없다. 눈을 뜬다고 하더라도 이해가 도착하진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화가 대낮의 빛 속에서 거듭 증명하듯 눈을 뜬 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파악 불가능한 것을 파악 불가능한 채로 마주하는 더 가혹한 무력감이다. '곡성'이 불가해한 존재 앞에서 인간이 끝내 무력하다는 사실을 응시한 영화였다면 '호프'의 이 장면은 그 무력을 모면하려는 두 가지 방식, 곧 눈을 감는 부정과 이름을 붙이는 오인을 나란히 세워 두고 그 둘을 모두 거두라고 소리친다. 그러니 절규에 절규로 맞선 이 짧은 충돌은 히브리서의 문장과 기묘하게 포개진다. 보이지 않음을 견디는 길은 눈을 감는 것도 성급히 이름 붙이는 것도 아니라 이해되지 않는 것을 이해되지 않는 채로 끝까지 바라보는 것이라는 요구. 그것은 편안한 앎이 아니라 앎 없이 바라보기를 지속하는 힘, 곧 믿음에 가까운 무엇이다.

이야기의 표면은 단순하다. 국경에 인접한 바닷가 마을 호포에서 한 마리 소가 찢겨 죽은 채 발견된다. 범석과 마을 사람들이 사체 앞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관찰이 아니라 명명이다. 곰의 소행인가, 유난히 큰 호랑이인가. 낯선 흔적을 익숙한 포식자의 이름으로 서둘러 덮는 이 반사 속에 영화의 핵심이 이미 응축돼 있다. 이해란 진실을 향한 접근이라기보다 불안을 다스리기 위한 방어이며, 해석은 세계를 여는 창이 아니라 세계를 기존의 문법 안으로 끌어들여 길들이는 장치다.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으로 번역하는 순간 인간은 비로소 숨을 쉰다. 그리고 바로 그 성급한 번역에서 재앙이 싹튼다. 무지에서 비롯된 작은 어긋남이 서로 다른 입장을 거치며 끝내 대규모의 비극으로 부풀어 오르는 이 영화의 구조는, 인간이 미지를 견디지 못해 저지르는 오독의 연쇄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눈을 감은 낙연과 눈을 뜨라고 악을 쓰는 범석의 짧은 실랑이는, 이 거대한 오독의 드라마를 두 사람 사이의 가장 작은 단위로 압축한 장면인 셈이다.

여기에서 '곡성'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흔한 오해 하나를 걷어 낼 필요가 있다. '호프'는 '곡성'의 연장이 아니라 그 방법론적 반정립(反定立)이다. 나홍진 자신이 '곡성'은 대사와 모호함과 심리로 세계를 축조한 영화인 반면 '호프'는 그 반대로 액션과 이미지와 사운드를 통해 이야기를 몸으로 감각하게 하는 영화라고 못 박았다. 그는 촘촘한 서사의 살을 덜어 내고 체험의 뼈만 남기는 이 선택을 "뼈를 얻기 위해 살을 줬다"고 표현했고, 그것을 관객과의 게임에 비유했다. 관객이 '왜 굳이 저렇게까지'라고 의식하는 순간 게임은 깨지므로 의식할 틈을 주지 않고 끝까지 몰아붙이는 것이 규칙이다. 두 영화가 만나는 지점은 그러므로 이야기의 방식이 아니라 그 아래 놓인 물음이다. '곡성'의 파국이 누가 악인지 몰라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악으로 확정한 순간부터 시작됐듯 '호프'의 비극 역시 무지가 아니라 확신에서 온다. 산으로 놈을 쫓아 오른 성기(조인성)와 청년들은 사냥꾼을 자처하다 사냥감이 되고, 마을에 남은 범석과 성애(정호연)는 노인이 대부분인 공동체를 지키려 사투를 벌인다. 하나의 사건은 저마다의 확신 속에서 여러 개의 어긋난 세계로 갈라지고 그 균열이 곧 파국의 통로가 된다. 다만 '곡성'이 이 균열을 해석의 미로로 조립했다면, '호프'는 그것을 질주와 오인과 충돌의 물리학으로, 관객의 맥박으로 옮겨 놓는다.

'호프'에서 가장 논쟁적이면서 가장 사려 깊은 결정은 외계 존재를 다루는 방식이다. 마이클 패스벤더와 알리시아 비칸데르, 테일러 러셀 같은 배우들이 이 종족을 연기하지만, 그들의 얼굴은 두꺼운 CG 아래 완전히 지워진다. 버라이어티는 아시아 배우를 타자화해 온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관습을 뒤집는 장치로 이 캐스팅을 읽어 볼 여지를 짚었다. 흥미로운 독해지만 더 근본적인 지점은 다른 곳에 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에게 타자의 얼굴은 나의 인식으로 환원되기를 거부하고 모든 것을 총체화하려는 나의 시선을 좌절시키는 윤리적 사건이다. '호프'는 이 얼굴을 문자 그대로 지워 버림으로써 미지를 끝내 익숙한 표정으로 회수하지 못하게 만든다. 관객은 스타의 이목구비를 알아보는 그 사소한 안도조차 박탈당한 채 낯선 것을 낯선 채로 견뎌야 한다. 찢긴 소, 펄떡거리는 물고기, 예고 없이 터지는 배설의 농담이 만들어내는 그로테스크의 질감 역시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아브젝시옹이라 부른 것, 곧 주체와 대상, 안과 밖, 깨끗함과 더러움의 경계가 무너지는 그 순간의 공포가 이 영화의 감각적 저층을 이룬다.

영화의 평가가 처음부터 두 쪽으로 갈린 것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칸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처음 공개됐을 때 '호프'는 6분가량의 기립박수와 더불어 황홀에서 당혹까지 폭넓게 벌어진 반응을 동시에 받았다. 데이비드 루니 할리우드리포터 수석비평가는 첫 프레임부터 장르를 완전히 장악한 작가의 손에 맡겨졌다는 감각을 상찬하며 컬트 클래식의 예감을 말했다. 반대편에서 버라이어티는 이 영화가 주제의 무게나 철학적 함의를 거의 지니지 않는다는 점을 문제 삼으며 그 가벼움 탓에 오히려 칸 경쟁부문에 어색하게 놓였다고 적었다.

나홍진의 전작들이 보여 준 집요한 심리 묘사와 입체적 인물을 기대한 오랜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이번 영화가 지나치게 과잉이며 그 특유의 화법이 희석됐다는 아쉬움도 나온다. 봉준호 감독조차 관객과의 대화에서 자신이 무엇을 본 것인지 되묻게 되는 즐거운 혼란을 감추지 않았다.

국내 개봉 이후의 풍경도 다르지 않다. 압도적인 스케일과 몰입감에 최고점을 준 관객과 대사의 완성도와 개연성, 일부 CG를 겨눈 관객이 같은 작품을 두고 정반대의 언어를 쓴다. 그러나 이 불일치야말로 '호프'의 결함이 아니라 조건이다. 이 영화의 신학은 진술되지 않고 감각된다. 명제로 제시되는 대신 리듬과 굉음과 탈진 속에 스며들어 어떤 관객에게는 파도처럼 밀려오고 어떤 관객에게는 끝내 도착하지 않는다. 주제의 무게가 없다는 버라이어티의 지적과 이것이 하나의 완결된 경험이라는 루니의 열광은 그러므로 서로 다른 영화를 본 것이 아니라 같은 영화가 언어 이전의 층위에서 작동한다는 사실의 양면이다.


영화 '호프'의 외계인 마베이요(마이클 파스벤더).
영화 '호프'의 외계인 마베이요(마이클 파스벤더).

제목의 의미는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열린다. 나홍진은 인간과 외계 존재를 함께 관통하던 하나의 공통된 믿음의 대상이 소멸한 그 순간 남겨진 존재들이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를 묻는 자리에 '호프'라는 단어를 놓았다고 말했다. 영화 안에서는 명시되지 않았지만 나홍진은 거대 우주선이 폭발하며 소멸하는 존재가 게르투 행성의 황제 쿠얼이라는 사실을 인터뷰에서 직접 밝힌 바 있다. 나홍진은 나아가 쿠얼이 여호와일 가능성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렇다면 함선과 함께 침몰하는 존재의 죽음은 단순한 캐릭터의 소멸이 아니라 인간과 외계 종족이 공유하던 신적 준거점 자체의 붕괴에 가깝다. 그가 말하는 희망은 감정으로서의 낙관이 아니라 죽은 것이 다시 돌아오리라는 확신, 곧 부활을 향한 믿음이다. 조르가 히브리서의 그 문장을 읊는 것도 바로 이 자리에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힘이 그 존재의 유일한 증거가 된다는 역설을, 정작 그것을 끝내 이해하지 못한 인간이 아니라 이해되지 않는 쪽인 낯선 존재가 발화한다. 눈을 감은 낙연에게 눈을 뜨라고 악을 쓰던 범석의 고함이 이 대목에서 다시 울린다.

눈을 뜬다는 것은 대상을 장악해 내 이름 안에 가두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름을 내려놓고 끝내 장악되지 않는 것 앞에 무력하게 서 있는 일이다.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은 척 눈감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한 척 이름 붙이지 않은 채로 계속 바라보는 것. '호프'가 믿음이라 부르는 것은 정확히 그 지속의 다른 이름이다. 나홍진이 오래전 만든 단편의 제목이 '믿음(Faith)'이었고 이번 장편이 '희망(Hope)'이라는 사실은 우연으로 읽히지 않는다. 믿음에서 희망으로 이어지는 이 신학적 이동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나란히 세운 세 덕목의 오래된 순서를 은밀히 환기한다. '곡성'이 믿음의 방향을 흔든 영화, 곧 누구를 믿을 것인가를 물은 영화였다면, '호프'는 믿음이라는 행위 자체에 전부를 건다. 알 수 없다는 결론을 받아들이는 대신 불완전한 확신이라도 붙드는 것, 그 붙듦이 인물들을 계속 달리게 하고 그 달림이 곧 이 영화의 동력이 된다. '호프'에서 믿음은 진실의 반대말이 아니라, 불확실성을 견디기 위해 인간이 발명한 가장 오래된 기술이다.

이 지점에서 '호프'는 신학적 SF라는 계보에 합류한다. 외계와의 조우를 신과의 조우로 옮겨 온 이 전통에서 우주의 저편은 늘 초월자의 다른 이름이었다.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모놀리스는 이해할 수 없는 초월 그 자체였고,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솔라리스'에서 미지의 바다는 죽은 자를 되살려 인간을 신 앞에 선 죄인처럼 세웠다. 로버트 저메키스의 '콘택트'는 증거를 내놓을 수 없는 경험을 끌어안은 무신론자 과학자를 끝내 신앙과 구분되지 않는 자리로 밀어 넣었다. 이 장르는 언제나 알 수 없는 것 앞에서의 믿음을 시험해 온 셈이다.


영화 '호프'의 외계인 조르(알리시아 비칸데르).
영화 '호프'의 외계인 조르(알리시아 비칸데르).

'호프'가 이 계보에서 유별난 것은 화살의 방향을 뒤집기 때문이다. 대개의 신학적 SF에서 인간은 침묵하는 외계를 향해 의미를 던져 올렸다. 반면 '호프'에서는 외계가 인간에게 인간의 경전을 되돌려준다. 조르가 히브리서를 읊는 순간 초월자의 자리에 앉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그 낯선 존재이고, 신의 시선으로 인간을 내려다보는 것 역시 그쪽이다. 나홍진이 이 영화의 시점을 '성경 속 신의 시선'이라 부른 말은 여기에서 문자 그대로 실현된다. 신을 대낮에 남김없이 드러내되 끝내 이해시키지는 않는 이 작법이, 신을 아는 유일한 길은 알지 못함을 통과하는 데 있다고 말한 부정신학의 오래된 직관과 포개지는 것도 그래서다.

그렇다면 한국 영화 사상 최대라는 '호프'의 제작비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흔한 블록버스터가 막대한 자본으로 세계를 더 또렷하게 완성하고 관객을 안심시키는 것과 달리 '호프'의 자본은 감각의 성전을 세우는 데 쓰인다. 문제는 그 성전이 신을 모신 곳인지 눈부시게 텅 빈 곳인지 끝내 결정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 미결정은 실수가 아니라 설계다. '호프'는 3부작의 첫 장으로 기획돼 열린 결말을 택할 수밖에 없고, 무엇을 보았는지에 대한 합의를 유예한 채 관객을 극장 밖으로 내보낸다. 한국 SF가 오래도록 흥행의 무덤으로 불려 온 내력을 생각하면 영화가 택한 길은 더욱 도발적이다. 앞선 대작들이 낯선 세계를 관객에게 친절히 설명하려다 길을 잃었다면, '호프'는 정반대로 설명을 거의 포기하는 방식으로 그 저주를 우회한다. 설명을 아끼는 이 태도를 반(反)블록버스터의 금욕으로 부르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호프'는 명백히 블록버스터다. 다만 그 규모를 세계를 봉합하는 데가 아니라 봉합의 불가능성을 각인하는 데 쓴다는 점에서만 예외적이다.


영화 '호프' 스틸
영화 '호프' 스틸

3부작이라는 설계도를 염두에 두면 이 영화의 전략은 또 다른 각도에서 읽힌다. '호프'를 3부작으로 구상한 나홍진은 후속편을 세상에 내놓으려면 무엇보다 1편이 성공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이 자명한 조건에 하나의 가설을 얹을 수 있다. 그가 진짜 찍고 싶은 것은 어쩌면 온전한 규모의 외계 종족 서사이고, 그 세계를 감당할 만한 자본이 한국 영화 산업의 체급을 이미 넘어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호프'는 하나의 쇼케이스, 즉 할리우드를 향해 '나는 이 스케일을 이 밀도로 다룰 수 있다'고 증명해 보이는 시연에 가깝다. 서사의 살을 덜어내고 순수한 체험의 뼈만 남긴 이 영화의 선택은 그 시연이라는 목적에 정확히 부합한다. 여기에는 미묘한 아이러니가 있다. 할리우드 자본은 규모를 열어주는 대신 최종 편집권을 비롯한 작가의 통제권을 잠식하기로 악명 높기 때문이다. 미지를 끝내 길들이지 않는 것을 주제로 삼은 감독이, 그 주제를 완성하기 위해 자신의 영화를 길들이려 드는 시스템의 문을 두드리는 셈이다. 그가 몇 해 뒤 어떤 형태로 그 외계 종족의 온전한 얼굴로 돌아올지는-혹은 그 얼굴이 끝내 누구의 것으로 편집될지는-첫 장 바깥에 남겨진 물음이다.

나홍진은 자신의 괴물을 어둠이 아니라 대낮의 벌판에 풀어놓았고, 그 종족의 얼굴을 지웠으며, 관객이 무엇을 보았는지 합의하지 못하도록 영화를 닫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거나 믿지 않는 인간과 끝내 언어가 되지 않는 존재가 같은 빛 아래 나란히 선 채로 첫 장이 끝난다. 눈을 감을 수도 뜬 채로 이해할 수도 없는 자리에 관객을 세워 둔 채로.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를 끝내 알 수 없는 존재의 입에 맡긴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