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루마니아인 한국생활] 한국에는 김치냉장고, 루마니아에는 할머니의 지하실이 있다
작성일
한국에서는 겨울을 최첨단 냉장고 안에 보관하고, 루마니아에서는 수백 개의 유리병에 담아 지하에 저장한다.

처음 본 ‘두 번째 냉장고’
처음 한국 가정집에 들어갔을 때 냉장고가 나란히 두 대 놓여 있는 모습을 보고, 나는 그 집이 단순히 음식을 아주 많이 사는 줄 알았다.
그런데 두 번째 냉장고는 일반 냉장고가 아니었다. 바로 김치냉장고였다.
많은 한국인에게 김치냉장고는 너무 익숙한 가전제품이라 별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다. 김치는 일정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해야 하고, 발효 과정에서 다른 음식에 냄새가 배지 않도록 별도로 보관하는 것이 편리하다. 그래서 김치냉장고는 사치품이라기보다 실용적인 생활 가전에 가깝다. 하지만 루마니아에서 온 내게는 이 가전제품 자체가 매우 흥미롭게 느껴졌다. 루마니아 가정도 겨울을 대비해 수많은 음식을 저장한다. 다만 그 음식을 보관하는 장소가 완전히 다를 뿐이다. 루마니아에는 김치냉장고 대신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공간이 있다. 바로 할머니의 지하실이다.

루마니아의 냉장고는 지하에 있다
루마니아의 시골집이나 오래된 가정집에서 지하실은 단순한 창고가 아니다. 그곳은 가족만을 위한 작은 겨울 슈퍼마켓과 같다. 선반에는 오이, 고추, 양배추로 만든 피클과 토마토소스, 잼, 과일 콩포트가 가득하다. 구운 고추와 가지, 토마토, 양파 등을 오래 끓여 만드는 루마니아 전통 채소 스프레드 ‘자쿠스커’도 빠지지 않는다.
감자와 양파, 사과, 직접 만든 와인이나 육류 보존 식품까지 함께 보관하는 집도 있다. 어린아이에게 지하실 문을 여는 일은 작은 보물 창고에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유리병 하나하나에는 몇 달 전 어머니나 할머니가 미리 준비한 음식이 담겨 있다. 마치 겨울이 오기 전에 가족이 먹을 음식을 충분히 마련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듯한 모습이다.
지하실은 자연스럽게 어둡고 서늘하기 때문에 음식을 오랫동안 보관하기에 적합하다. 디지털 온도계나 복잡한 기능은 필요 없다. 땅속의 낮은 온도와 두꺼운 벽이 냉장고 역할을 대신한다.
한국은 같은 문제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결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대신, 전통 식품 저장 방식을 기술 안으로 끌어들였다.
두 나라가 공유하는 ‘겨울 걱정’
처음 보면 한국의 김치와 루마니아의 피클은 전혀 다른 음식처럼 보인다. 김치는 고춧가루, 마늘, 젓갈과 채소 등을 활용해 발효한다. 반면 루마니아의 피클은 소금물이나 식초에 허브와 향신료를 넣어 저장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두 음식을 둘러싼 문화는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두 전통 모두 신선한 채소를 구하기 어려운 추운 계절을 견디기 위해 시작됐다. 가족들은 가을에 수확한 채소를 소금에 절이거나 발효하고, 오랫동안 먹을 수 있도록 대량으로 준비했다. 한국에는 가족과 이웃이 함께 많은 양의 김치를 담그는 김장 문화가 있다.
루마니아에서도 가을은 겨울 준비의 계절이다. 가족들은 고추와 가지, 양배추, 오이 등을 상자째 구입한다. 부엌은 끓는 물의 수증기와 식초 냄새, 구운 채소 향으로 가득해진다. 유리병을 깨끗하게 씻어 소독한 뒤 음식을 채우고, 선반 위에 차곡차곡 올려놓는다. 음식은 다르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거의 같다. 겨울이 가족을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찾아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김치냉장고에서 가장 놀라웠던 부분은 온도와 보관 방식을 매우 세밀하게 설정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김치의 종류에 따라 적절한 온도와 숙성 조건이 달라질 수 있다. 일부 제품은 김치 숙성 기능을 선택할 수 있고, 김치와 채소, 고기 등 식재료별로 다른 보관 공간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는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전문 기술로 더 편리하게 만드는 한국 특유의 접근법처럼 보인다. 김치냉장고는 현대적인 아파트 생활에도 잘 맞는다.
오늘날 많은 한국 가정에는 넓은 마당이나 별도의 창고, 지하 저장고가 없다. 대신 온도를 정밀하게 조절할 수 있는 냉장고를 통해 고층 아파트 안에서도 오랜 음식 문화를 이어간다. 방법은 현대적으로 바뀌었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여전히 전통적이다. 김치냉장고가 지키는 것은 단순히 음식만이 아니다. 가족의 식습관과 계절의 기억, 세대를 거쳐 전해진 조리법까지 함께 보존한다.

루마니아의 방식은 경험으로 작동한다
루마니아 지하실은 버튼이 아니라 오랜 경험을 통해 운영된다. 할머니는 어느 선반이 습기가 많은지, 어느 곳의 온도가 자주 변하는지, 어떤 유리병을 먼저 먹어야 하는지 알고 있다. 뚜껑을 가볍게 두드리거나 액체의 색을 살펴본 뒤, 무언가 이상하다며 한눈에 병을 골라내기도 한다. 대부분의 경우 이를 설명하는 사용 설명서는 없다. 수십 년 동안 쌓인 경험 자체가 매뉴얼이기 때문이다.
조리법도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지 않을 때가 있다. 루마니아 할머니에게 소금을 얼마나 넣었느냐고 물으면 “적당히”라고 대답한다. 채소를 얼마나 오래 끓여야 하느냐고 물으면 “다 익을 때까지”라고 말한다.
이런 대답은 같은 음식을 만들어보려는 젊은 세대를 답답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 지식이 일상과 몸에 얼마나 깊이 스며들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한국은 정밀한 가전제품을 통해 전통을 보존한다. 루마니아에서는 할머니가 직접 온도 조절 장치이자 보관 시스템이 된다.
두 나라의 또 다른 공통점은 자녀가 독립한 뒤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국 부모들은 성인이 돼 집을 떠난 자녀에게 김치와 반찬을 챙겨준다. 혼자 사는 자녀의 냉장고는 어머니가 만든 음식으로 가득 찬다. 자녀가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을까 걱정하기 때문이다.
루마니아의 부모와 조부모도 거의 똑같이 행동한다. 집에 다녀가는 성인 자녀는 유리병과 채소, 냉동 음식이 가득 든 무거운 가방을 들고 돌아가게 된다.
냉장고에 자리가 없다고 말해도 소용없다. 가방이 너무 무겁다고 해도 통하지 않는다. 혼자 살아서 피클 여섯 병을 다 먹을 수 없다고 설명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음식은 결국 자녀의 손에 들려 있다. 두 문화 모두에서 저장 음식은 단순한 식품이 아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건넬 수 있는 사랑과 걱정의 형태다. “겨울에 먹으라고 만들었다”는 말에는 사실 이런 의미가 숨어 있다. “네가 밥을 잘 먹고 있는지 알고 싶다.”

첨단 기술과 오래된 유리병
김치냉장고와 루마니아의 지하실은 겉으로 보면 완전히 반대되는 존재처럼 보인다. 한쪽은 세밀한 기능을 갖춘 첨단 가전제품이다. 다른 한쪽은 손으로 쓴 라벨이 붙은 유리병으로 가득한 어둡고 차가운 공간이다. 하지만 둘은 같은 본능에서 시작됐다.
두 문화 모두 음식을 미리 준비하는 일을 가족을 불확실한 계절로부터 보호하는 방법으로 여긴다. 특정한 맛을 고향과 연결하고, 자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양보다 훨씬 많은 음식을 준비하는 부모가 있다.
한국은 겨울의 기억을 김치냉장고 안에 넣었다. 루마니아는 그 기억을 할머니의 지하실에 쌓아뒀다. 한쪽은 센서와 온도 조절 기능을 사용하고, 다른 한쪽은 두꺼운 벽과 오래된 조리법, 할머니의 경험을 활용한다.
하지만 두 공간의 문을 열었을 때 가족에게 전해지는 메시지는 같다. 이번 겨울에도 너를 굶게 두지 않겠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