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소 사장도 소비자도 당했다…전쟁 직후 기름값 폭등 뒤 드러난 정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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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값 오른 배경에 담합 의혹…직접 규모만 14조원대
주유소 거래 제한·정부 허위보고 정황까지 함께 드러나
국내 4대 정유사가 미국·이란 전쟁 직후 석유제품 가격을 담합해 유가를 올린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전쟁 직후 동시에 오른 기름값
서울중앙지검 공정거래조사부는 HD현대오일뱅크와 SK에너지, GS칼텍스, 에쓰오일 등 국내 4대 정유사를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고 6일 밝혔다. HD현대오일뱅크 가격결정부서 부서장은 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겨졌고 같은 회사 책임매니저와 법무실장, GS칼텍스 국내영업 부문장도 불구속 기소됐다.
검찰에 따르면 HD현대오일뱅크와 SK에너지는 2024년 7월부터 올해 2월까지 가격 정보를 주고받으며 가격 정책을 조율한 혐의를 받는다. 이후 미국과 이란 사이 전쟁이 발발하자 두 회사 가격결정 책임자들이 석유제품 공급가를 대폭 올리기로 합의한 것으로 조사됐다.
검찰은 전쟁 직후 국내 정유사들이 일제히 가격을 올린 흐름을 수상하게 판단했다. 전쟁이 발발했다고 해서 곧바로 국내 공급 가격이 급등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아니었다는 설명이다. 당시 정유사들은 이미 상당한 양의 원유를 비축한 상태였고 가격 인상 요인이 즉각 반영될 만큼 불가피한 상황도 아니었다고 검찰은 설명했다.
그런데도 정유사들의 공급 가격은 전례를 찾기 어려운 수준으로 한꺼번에 올랐다. 검찰은 HD현대오일뱅크와 SK에너지가 가격을 맞춰 올리고 GS칼텍스와 에쓰오일이 이 가격을 따라가면서 국내 유가 시장 전반에 영향을 준 것으로 판단했다.
14조 담합, 26조 경쟁 제한 효과

검찰이 파악한 직접 담합 규모는 14조 2000억 원이다. 이는 HD현대오일뱅크와 SK에너지의 가격 담합 규모를 기준으로 산정한 금액이다. 여기에 GS칼텍스와 에쓰오일이 담합 가격을 참고해 가격을 올린 파급 효과까지 고려하면 경쟁 제한 효과는 약 26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GS칼텍스와 에쓰오일은 HD현대오일뱅크와 SK에너지의 가격을 직접 합의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이 올린 가격을 사실상 기준처럼 따라간 것으로 조사됐다. 검찰은 이를 경쟁 질서를 교란하는 의식적 병행 행위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다만 현행 공정거래법상 형사처벌 대상은 아니어서 해당 부분은 기소 범위에서 제외됐다.
검찰 수사 과정에서는 정유사 내부 대화 내용도 드러났다. 일부 가격결정부서 직원들은 단체 대화방에서 전쟁 직후 가격 인상을 두고 “우리 올해 2조 벌 듯”, “역시 전쟁으로 먹고사는 회사”, “트럼프 만세” 등의 대화를 나눈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이 같은 대화가 전쟁 국면을 이윤 확대의 기회로 인식한 정황이라고 설명했다.
검찰은 이번 담합을 일회성 일탈이 아니라 가격 정보를 지속적으로 주고받던 관행이 국제적 위기 상황에서 드러난 사건으로 규정했다. 가격 결정 권한을 가진 정유사들이 서로 가격을 살피고 시간차를 두고 가격을 통보하는 구조가 담합과 정보 교환을 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정유사들이 산업통상자원부에 실제보다 낮은 판매가를 보고한 사실도 확인됐다. 검찰에 따르면 일부 정유사는 올해 3~5월 사이 유가 교란 의혹을 숨기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석유제품 공급가를 실제보다 낮춰 보고한 것으로 조사됐다.
주유소에는 자사 제품만 사도록 압박
검찰은 정유사들의 주유소 거래 관행도 문제 삼았다. 4대 정유사는 자영 주유소들과 전량구매계약을 맺고 자사 제품만 사도록 한 혐의도 받는다. 전량구매계약은 주유소가 필요한 석유제품 전부를 특정 정유사에서만 구매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주유소 입장에서는 더 싼 제품을 공급하는 다른 거래처가 있어도 쉽게 바꿀 수 없다. 정유사가 일방적으로 통보한 가격에 따라 제품을 사야 하고 다른 회사 제품을 받으면 계약 위반 문제가 생긴다. 검찰은 이 구조를 두고 대형 정유사가 경제적 약자인 자영 주유소를 상대로 거래상 우월적 지위를 남용한 행위라고 규정했다.
검찰 조사 결과 정유사들은 전량구매 의무를 어긴 주유소에 거액의 손해배상을 청구하거나 비용 회수, 보너스카드 중단 등 불이익을 준 것으로 파악됐다. 정유 4사는 계약서에 전량구매 의무 위반 시 해당 주유소의 반기 또는 분기 매출액 10~30%에 해당하는 금액을 손해배상 예정액으로 정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자영 주유소가 가격을 비교해 더 저렴한 유통 경로를 선택할 가능성을 막는 구조다. 검찰은 이 같은 관행 때문에 주유소의 구매 선택권이 제한되고 결과적으로 석유제품 가격 상승 부담이 소비자에게 전가됐다고 설명했다.
전량구매계약과 사후정산제는 과거에도 유가 상승 원인으로 지목돼 왔다. 사후정산제는 정유사가 제품을 먼저 공급한 뒤 나중에 가격을 확정하는 방식이다. 주유소는 정확한 가격을 알기 어려운 상태에서 제품을 받아야 하고 가격 결정권은 사실상 정유사에 쏠리게 된다.
전산자료 삭제·정부 허위보고도 적발

검찰은 일부 정유사의 조사 방해 정황도 확인했다. HD현대오일뱅크 법무실장은 공정거래위원회 현장조사 사실을 미리 알고 경쟁사 가격 정보가 담긴 전산 자료를 삭제하라고 지시한 혐의를 받는다. GS칼텍스 국내영업 부문장도 공정위 현장조사를 앞두고 가격 관련 사내 메신저 대화를 삭제하도록 조치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은 현장조사 당시 상당량의 증거자료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고 밝혔다. 가격 정보를 모아둔 내부 자료와 사내 대화 내용은 담합 여부를 확인하는 핵심 자료가 될 수 있다. 검찰은 이를 삭제하거나 삭제하도록 한 행위를 공정거래 조사 방해로 판단했다.
산업통상부에 대한 허위보고도 별도로 확인됐다. 검찰은 정유사 3곳이 올해 3월 민생물가 특별관리 대상인 휘발유 등 일일 판매가를 단기간에 대폭 올린 뒤 실제보다 낮은 가격을 보고한 것으로 파악했다. 전쟁에 따른 국제가 상승분을 반영한 가상의 가격 자료를 만들어 정부에 제출했다는 것이 검찰 설명이다.
다만 검찰은 정유사 경영진 등 이른바 윗선이 담합에 직접 관여했다는 증거는 확보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관련자들의 휴대전화 100여 대를 압수해 분석했지만 경영진 관여를 입증할 만한 자료는 확인되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검찰은 이번 사건을 국가적 혼란을 틈탄 유가 교란 범죄로 보고 공소유지에 나설 방침이다. 수사 과정에서 확인된 정유사 간 가격 정보 교환 구조와 전량구매계약, 사후정산제 등 유통 관행은 산업통상자원부 등 관계기관과 공유해 제도 개선 논의에 활용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