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에 갇힌 외국인 근로자 숙소… “탁상행정에 농촌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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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적한 농장 옆 숙소 놔두고 원거리 출퇴근 강요… 합법 고용 가로막는 ‘규제 대못’ 비판 거세

만성적인 일손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야심 차게 도입한 제도가, 오히려 현실과 턱없이 동떨어진 ‘탁상행정’식 숙소 규제로 인해 농가들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는 지적이 빗발치고 있다.
농업 현장에서는 “농사를 단 한 번도 지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에어컨 나오는 시원한 책상머리에 앉아 만든 전형적인 탁상행정의 결정판”이라며 거센 분노가 터져 나오고 있다.
■ "농사가 공장인 줄 아나"… 현실 외면한 획일적 잣대
농가들이 가장 크게 반발하며 울분을 토하는 대목은 농업이라는 산업 특유의 노동 환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정부의 획일적인 규제 잣대다. 타국에서 온 근로자의 기본적인 인권과 안전을 보호하겠다는 정책적 취지 자체에는 농민들도 십분 공감하며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적용되고 있는 까다로운 숙소 기준은 도심 속 일반 제조업 공장이나 정형화된 사업장을 기준으로 획일화되어 있어, 살아 숨 쉬는 생명체를 다루는 농업 현장과는 심각한 괴리가 존재한다.
농작업은 날씨와 계절의 변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 특수성을 지닌다. 한여름 살인적인 폭염을 피하기 위해 동트기 전인 새벽 4시부터 일찌감치 밭에 나가 작업을 시작해야 하는 날이 부지기수다. 또한 갑작스러운 장마나 태풍 예보가 떨어지면, 비가 쏟아지기 전에 1년 농사의 결실을 거두기 위해 밤을 새우며 야간작업을 강행해야만 한다. 이처럼 하루하루의 작업 계획이 자연환경과 기상 조건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 농촌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러나 정부는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하는 도시의 규칙적인 노동 환경을 농촌에 그대로 강요하며 갈등을 키우고 있다.
■ 지목·용도 타령에 쾌적한 시설 무용지물… 비효율의 극치
가장 황당하고 분통이 터지는 것은 단지 서류상의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멀쩡하고 훌륭한 시설을 놔두고 억지로 원거리 숙소를 구해야 하는 행정 코미디가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전국 각지의 농촌 현장 곳곳에는 농장 바로 옆에 최신식 냉난방 시설과 깨끗한 수세식 화장실, 온수가 콸콸 나오는 샤워실과 쾌적한 휴게 공간까지 완벽하게 갖춘 숙소가 버젓이 존재한다. 농장주들이 근로자들의 편의를 위해 사비를 들여 정성껏 마련한 공간이다. 그러나 단지 건축물대장상의 용도가 주택이 아니거나 토지의 지목이 대지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행정 당국은 엄격하게 사용을 불허하고 있다.
대신, 오직 서류상 규정에 맞는다는 명목 하에 농장에서 수 킬로미터 이상 뚝 떨어진 읍내 마을 단위의 낡은 빈집이나 원룸을 숙소로 배정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전남 화순군에서 수년째 대규모 시설채소 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는 농민 J씨는 “냉난방 잘되고 편의시설이 완벽한 걸어서 5분 거리의 농장 옆 숙소는 불법이라고 막아놓고, 캄캄한 새벽 어스름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승합차에 짐짝처럼 타 수십 분을 굽이굽이 이동해야 하는 외곽의 거처가 과연 근로자들의 안전과 피로도 해소에 더 도움이 되는지 당국자들에게 따져 묻고 싶다”며 “이것은 근로자의 실질적인 생활 편의를 위한 규정이 아니라, 혹여라도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공무원들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얄팍한 면피성 규정에 불과하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 출퇴근 비용까지 농가 몫? 삼중고에 허리 휘는 농민들
이러한 탁상행정식 원거리 숙소 배정은 고스란히 농가들의 막대한 경제적, 시간적 부담으로 전가되며 생존권마저 위협하고 있다. 지하철이나 버스 등 대중교통 인프라가 촘촘하게 엮여 있는 도시와 달리, 농촌 지역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농장으로 출퇴근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농장주가 매일 새벽 뜬눈으로 일어나 늦은 저녁까지, 근로자들의 출퇴근을 위해 자신의 화물차나 승합차를 직접 운전하며 이른바 ‘무보수 통근버스 기사’ 노릇까지 감당해야 하는 처지다.
여기에 매일 투입되는 추가적인 유류비와 차량 유지보수 비용, 출퇴근 시간에 버려지는 농장주의 막대한 시간적 손실 등 보이지 않는 비용 부담은 오롯이 빚더미에 앉은 농가의 몫이다.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농자재값과 인건비의 압박 속에서, 외국인 근로자 한 명을 합법적으로 고용하기 위해 농가들은 비싼 외부 숙소 임대료, 차량 운영비, 각종 보험료 및 복잡한 행정 서류 대행 비용까지 떠안으며 그야말로 이중, 삼중의 심각한 고통 속에 허리가 휘고 있다.
■ "합법 고용 하라며 길은 막아"… 실질적 제도 개선 시급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현장에서는 정부의 앞뒤가 맞지 않는 정책 모순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임계점을 넘어섰다. 법무부와 관계 당국은 미등록 외국인(불법 체류자)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며 농가들에게 합법적인 계절근로자 제도를 이용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빚을 내서라도 합법 고용을 하려고 해도, 농촌 현실을 완전히 배제한 채 서류에만 집착하는 깐깐한 숙소 규정 때문에 근로자를 배정받지 못하는 지독한 딜레마에 빠져 있다. 일선 농가들 사이에서 "정부가 겉으로는 합법 고용을 외치면서, 실제로는 도저히 지킬 수 없는 규제 장벽을 겹겹이 쳐놓고 고용 자체를 원천 봉쇄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탄식이 쏟아지는 이유다.
대한민국의 농촌은 이미 초고령화와 극심한 인구 유출, 최악의 인력난으로 인해 존립 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벼랑 끝에 위태롭게 서 있다. 내국인 노동자를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가 된 지 오래며, 이제 외국인 근로자는 농촌 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한 선택이 아닌 절대적인 필수 인력으로 자리 잡았다.
전문가들과 농업계 관계자들은 근로자의 인권을 진정으로 위한다면, 탁상 위에 놓인 서류상의 지목이나 건축물 용도 글자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근로자가 실제로 쾌적하고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냉난방 및 위생 시설 유무를 현장에서 직접 점검하는 '실질적 기준'으로 제도를 대폭 개편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명분뿐인 보여주기식 규제와 행정 편의주의를 과감히 벗어던지고, 흙내음 짙은 농업 현장의 숨결과 애환이 고스란히 반영된 탄력적인 제도 개선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식량 안보의 근간인 대한민국의 농업 인프라는 뿌리째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장을 무시한 행정은 결코 국민을 설득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