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관 없이 굴러간 광장... '디지털 정보망'으로 움직인 잠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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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 깃발 없는 광장] ④ 보스 없는 현장
지도부도 조직도 없는 올림픽공원 시위, 어떻게 유지됐나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 이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일대에서 봉쇄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특정 정당의 깃발도, 무대 위에서 군중을 지휘하는 뚜렷한 지도부도 없다. 그런데도 주말마다 수만 명이 모였다가 흩어진다. 위키트리는 이 광장을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보고 여섯 차례에 걸쳐 들여다본다. 어느 진영의 손을 들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광장에 나온 사람들이 무엇을 말하고 어떤 이유로 모였는지 있는 그대로 기록하기 위해서다.>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인근 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위키트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인근 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위키트리

명령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질서가 서고 회계 장부가 없는데도 물자가 돈다.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시작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일대에서 이어지는 봉쇄 시위는 주말 한때 2만 명에 달하는 인파가 몰리면서도 큰 사고 없이 굴러갔다. 누가 전체 물품을 책임지는지, 누가 자원봉사자를 배치하는지 묻자 참가자들은 한 사람을 쉽게 지목하지 못했다. 돌아오는 답은 대체로 "필요한 일이 보이면 한다"였다. 지휘하는 자가 보이지 않는데도 광장이 돌아가는 이 역설이 잠실 현장의 가장 큰 수수께끼다.

핸드볼경기장 주변을 걷다 보면 구호보다 생활의 흔적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오래 머문 사람들이 놓고 간 돗자리와 캠핑의자, 얼음물이 담긴 아이스박스, 휴대전화 충전을 위해 길게 이어진 멀티탭, 한쪽에 줄을 맞춰 정리된 물품 상자들. 계단 옆 작은 책상에는 학생들이 문제집을 들고 찾아왔다. 집회라기보다 며칠째 이어진 임시 생활공간에 가까운 풍경이다. 그런데도 그 공간을 누가 설계하고 누가 운영하는지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다.

기존의 대규모 집회에는 대체로 세 가지가 있었다. 군중을 향해 호령하는 무대 위 연사, 참가를 독려하고 사람을 실어 나르는 조직, 그리고 집회가 끝난 뒤의 뒤풀이다. 잠실 광장에는 그 셋이 모두 흐릿했다. 마이크를 잡고 군대를 지휘하듯 호령하는 총지휘관은 보이지 않고 사람을 모으는 조직도 드러나지 않았으며 집회가 끝난 뒤 연락처를 교환하거나 함께 자리를 갖는 풍경도 찾기 어려웠다. 광장을 떠받친 것은 무대가 아니라 흩어진 화면과 손이었다.

상황판과 ‘혼잡도 지도 앱’이 지휘부 대신

올림픽공원 집회 현장에서 공유된 ‘잠실 상황판’. 물품 지원과 자원봉사, 의료 지원 등 현장에 필요한 정보가 정리돼 있다. / 잠실 상황판 캡처
올림픽공원 집회 현장에서 공유된 ‘잠실 상황판’. 물품 지원과 자원봉사, 의료 지원 등 현장에 필요한 정보가 정리돼 있다. / 잠실 상황판 캡처

지휘부의 빈자리를 메운 것은 정보였다. 참가자들 사이에서는 '잠실 상황판'과 '핸드볼경기장 실시간 혼잡도' 사이트가 함께 공유됐다. 둘은 역할이 갈렸다. 상황판에는 물품 지원과 자원봉사, 의료 지원 등 현장에 필요한 정보가 모였다.

혼잡도 사이트는 경기장 주변에 사람이 어떻게 분포해 있는지에 초점이 맞춰졌다. 구역별 체크인 수, 최근 60분간 누적 인원, 혼잡 등급, 안내 인력이 필요한 구역이 표시됐다. 특정 구역을 선택하면 "시민분들 여기로 와주세요", "안내 요원 13명 필요" 같은 문구가 떴다.

한쪽으로 인파가 몰리는 것을 줄이고 비어 있는 구역으로 사람을 나누기 위한 장치였다. 의료지원단의 날짜별·시간대별 근무 현황을 확인하는 항목도 있었고, 올림픽공원 일대의 추정 인원과 누적 방문자 수도 함께 떴다.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일대의 실시간 혼잡도를 보여주는 지도. 구역별 인원과 안내 인력 필요 여부가 표시돼 있다. / 실시간 혼잡도 지도 캡처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일대의 실시간 혼잡도를 보여주는 지도. 구역별 인원과 안내 인력 필요 여부가 표시돼 있다. / 실시간 혼잡도 지도 캡처

이런 온라인 도구가 있다고 해서 현장을 총괄하는 중앙 지휘부가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지휘부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참가자들이 서로의 빈틈을 확인하는 방식에 가까웠다. 누군가는 상황판을 보고 필요한 물품을 챙겼고 누군가는 혼잡도 화면을 보고 사람이 부족한 구역으로 옮겼다. 지시는 없었지만 확인할 수 있는 정보는 있었다. 과거 집회에서 무대와 마이크가 하던 일을 잠실에서는 흩어진 화면들이 나눠 맡은 셈이다.

올림픽공원 집회 현장에 마련된 자원봉사 부스. 천막 아래에 생수와 각종 물품이 정리돼 있다. / 위키트리
올림픽공원 집회 현장에 마련된 자원봉사 부스. 천막 아래에 생수와 각종 물품이 정리돼 있다. / 위키트리

물류의 실핏줄은 카카오톡 단체 대화방이었다. 한 자원봉사자에 따르면 자율 대화방은 둘로 나뉘어 있었다. 일반 자원봉사를 맡은 사람들의 방과 분리수거장만 전담하는 사람들의 방이 따로 운영됐다. 역할이 세분화돼 있었지만 누가 위에서 짠 조직도는 아니었다. 필요가 생기면 방이 만들어지고 손이 모이면 일이 굴러갔다.

후원도 같은 방식이었다. 생수와 음료가 어디서 오느냐는 물음에 한 자원봉사자는 "일반 시민이 직접 보낸다고 대화방에 올린 뒤 택배로 부친다. 도착하면 모아서 나눠준다"고 했다. 중앙의 모금함도 영수증을 모으는 회계 담당자도 없이 후원은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직접 오갔다. 경기장 한편의 밥차도 누가 식자재를 대고 누가 조리를 맡는지에 대한 공식 조직표 없이 돌아갔다. "밥차에 사람이 부족하다"는 글이 대화방에 오르면 손이 비는 사람들이 모여 배식을 거들었다.

쓰레기 처리의 규모도 만만치 않았다. 한 자원봉사자는 "100ℓ짜리 봉투가 아침에만 네다섯 차례, 하루 전체로는 열 번에서 스무 번 정도 수거된다"고 했다. 수만 명이 머무는 광장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시민들이 직접 분류하고 묶어 한곳에 모았다. 새벽에는 송파구 미화원이 오전 7시부터 나와 정리된 쓰레기를 가져갔다.

올림픽공원 집회 현장에 마련된 쓰레기 분리수거장. 참가자들은 생수병과 종이컵 등 현장에서 나온 쓰레기를 종류별로 나눠 정리했다. / 위키트리
올림픽공원 집회 현장에 마련된 쓰레기 분리수거장. 참가자들은 생수병과 종이컵 등 현장에서 나온 쓰레기를 종류별로 나눠 정리했다. / 위키트리

한 자원봉사자는 청소 방식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 장소가 누가 주체가 돼 계획적으로 되는 건 아니다. 와 보니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한 것이다." 다른 참가자도 "와서 본인들이 스스로 한다. 교대할 사람이 있으면 그때까지 기다렸다가 한다"고 했다. 정해진 당번표가 아니라 눈앞의 필요가 사람을 움직이는 구조였다.

질서를 세우는 방식은 통제보다 부탁에 가까웠다. 인파가 몰리는 계단과 출입로에서는 참가자들이 "천천히 이동해 달라", "한쪽으로 지나가 달라"고 안내했다. 처음부터 정해진 안전요원이라기보다 현장에 머물다 필요를 보고 나선 사람들이었다.

올림픽공원 집회 현장에 설치된 우측 통행 유도 시설물. / 위키트리
올림픽공원 집회 현장에 설치된 우측 통행 유도 시설물. / 위키트리

주목할 대목은 이 통제선이 단순히 몸으로 막아서는 방식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한 자원봉사자는 SNS를 통해 "여러 경찰관에게 문의한 결과 우측 통행 유도를 위한 시설물 설치는 법적 문제가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며 "사고 예방을 위해 자발적으로 나선 활동"이라고 밝혔다.

더 나아가 주최자가 없는 상황에서 인파 사고를 막으려는 이 행위가 민법상 '긴급사무관리'와 '긴급피난' 요건을 충족한다는 취지의 자율적 법리 검토 결과까지 공유됐다. 위험을 막기 위해 누구의 위임도 없이 나선 행위라면 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지휘부가 없는 광장이 스스로 합법성의 근거를 찾아 움직인 셈이다.

올림픽공원 집회 현장에 자원봉사자 모집 안내문이 붙어 있고, 자원봉사자가 쓰레기를 수거하고 있다. / 위키트리
올림픽공원 집회 현장에 자원봉사자 모집 안내문이 붙어 있고, 자원봉사자가 쓰레기를 수거하고 있다. / 위키트리

규칙은 온라인에서 먼저 만들어져 현장으로 옮겨졌다. 처음 온 사람을 위한 '올공(올림픽공원) 뉴비 필독 가이드'에는 "물품지원소로 가면 친절히 안내해 주니 언제든 자원봉사에 동참하라", "혼자 왔다가 금방 친구가 되니 부담 갖지 말라"는 조언이 담겼다.

갈등 상황을 두고는 "아무리 좋은 마음이어도 과하게 선동하기보다 시비가 걸리더라도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고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라"는 평화 수칙이 당부됐다. "젊은 친구들이 쉴 때 자꾸 말 거는 어르신들, 제발 편하게 쉴 수 있게 배려하자"는 이른바 '매너 팁'까지 돌았다. 누구도 강제하지 않았지만 광장의 규칙은 그렇게 자리를 잡았다.

이런 구조를 설명하는 자원봉사자들은 한결같이 조심스러워했다. 한 사람은 "저희가 다 개인 개인"이라고 했다. 이름도 서로 다 알지 못하고, 누가 누구인지 모르는 채로 각자 와서 돕는다는 설명이었다. 그는 "무슨 말을 하면 자원봉사 측에서 이렇게 얘기됐다고 공식적으로 나갈까 봐 우려스럽다"며 "대표가 없지 않느냐. 오신 분들 자체가 다 개인 개인으로 온 것"이라고 했다.

현장에 있는 한 사람의 말이 전체 입장처럼 비치는 일을 경계한 것이다. 그는 "점조직의 특성을 존중해주면 좋겠다"고도 했다. 정보 인프라의 핵심인 상황판을 누가 만들었느냐고 묻자 그 역시 "그것도 누군지 모른다. 다 개인 개인이 하신 거라 모른다"고 답했다. 광장을 떠받치는 도구를 쓰면서도 그 도구를 만든 사람조차 특정되지 않는 구조였다.

물품·충전·청소까지 시민이 직접 맡은 광장

자율 운영이 계속되려면 전기가 필요했다. 상황판을 확인하고 단체 대화방으로 연락을 주고받고 현장 상황을 사진과 글로 남기려면 휴대전화 배터리가 있어야 했다. 게이트 곳곳에 주차된 전기차가 그 역할을 했다. 과거 집회 장소마다 매연과 굉음을 내뿜던 디젤 발전기의 자리를 전기차가 대신했다. 참가자들은 전기차에서 직접 전력을 뽑아 쓰는 V2L 기능으로 광장에 '전기 핏줄'이 돌게 했다. 차량 외부 콘센트에서 길게 뻗어 나온 멀티탭 선은 텐트와 임시 거점으로 이어졌고 스마트폰 충전기는 물론 무더위를 식히는 선풍기와 서큘레이터를 돌리는 동력이 됐다.

올림픽공원 집회 현장에 마련된 V2L 충전 자원봉사 거점. 전기차에서 나온 전선이 멀티탭으로 이어져 있고 자원 봉사 안내문이 붙어있다. / 위키트리
올림픽공원 집회 현장에 마련된 V2L 충전 자원봉사 거점. 전기차에서 나온 전선이 멀티탭으로 이어져 있고 자원 봉사 안내문이 붙어있다. / 위키트리

현장에서 만난 30대 남성 박 모 씨는 성북구 일대에서 자영업을 하는 전기차 차주다. 그는 처음부터 충전 봉사를 하려고 현장에 나온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일반 시민으로 집회에 참여했다가 전기차에서 전력을 뽑아 휴대전화와 선풍기 등을 돌리는 사람들을 보고 자신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박 씨는 이후 퇴근 뒤 비는 시간대에 맞춰 올림픽공원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충전 봉사는 누군가 배치하거나 지시한 일이 아니었다. 전기차를 가져와 전력을 나누던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연락망이 생겼고 그 안에서 각자 가능한 시간을 맞췄다. 박 씨에 따르면 충전 봉사에 참여한 전기차 차주는 대략 다섯 명 안팎이었다. 인원이 많지 않은 만큼 부담도 컸다.

안산에서 잠실까지 오가는 데 드는 비용도 적지 않았다. 박 씨는 "주차비만 하루 1만 원이고, 왕복 톨비와 전기차 충전비까지 하면 하루에 2만 5000원 정도는 든다"고 했다. 비용을 받는 것도 시간을 보상받는 것도 아니지만 그는 "필요하면 계속 나올 생각"이라고 말했다.

올림픽공원 집회 현장에 마련된 충전 자원봉사 천막. 한쪽에는 전기차 V2L 충전 이용 방법을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 위키트리
올림픽공원 집회 현장에 마련된 충전 자원봉사 천막. 한쪽에는 전기차 V2L 충전 이용 방법을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 위키트리

현장에서 배터리가 부족한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전기차 주변으로 모였다. 충전 수요는 쉴 새 없이 이어졌다. 박 씨는 하루에 충전 거점을 찾는 인원이 대략 500명을 넘는다고 했다. 특히 장시간 현장에 머무는 자원봉사자들에게 휴대전화 충전은 절실한 문제였다. 이 때문에 보조배터리는 주로 상주 시간이 긴 자원봉사자에게 빌려줬고 일반 참가자는 전기차 주변에 마련된 자리에서 직접 충전하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충전 거점은 일종의 임시 보관소처럼 운영됐다. 참가자들이 휴대전화를 맡기면 충전 자원봉사자들이 멀티탭에 꽂아 충전했고 찾아갈 때는 본인이 직접 잠금화면을 해제하는 방식으로 확인했다. 분실이나 도난, 다른 사람의 휴대전화를 잘못 가져가는 일을 막기 위한 현장의 자구책이었다. 공식 보관 절차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맡긴 사람과 찾아가는 사람이 같은지 확인하는 최소한의 장치는 마련한 셈이다. 박 씨는 이런 방식으로 운영하면서 아직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했다.

취재 도중에도 의료지원 자원봉사자가 찾아와 충전을 문의했다. 장시간 현장에 머무는 자원봉사자들에게 휴대전화 배터리는 단순한 편의 문제가 아니었다. 상황을 공유하고 단체 대화방을 확인하고 현장 업무를 이어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도구였다. 전기차에서 나오는 전력은 배터리가 부족한 사람을 돕는 수준을 넘어 현장 운영을 이어가는 기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올림픽공원 집회 현장에서 멀티탭에 연결된 보조배터리와 휴대전화가 충전되고 있다. / 위키트리
올림픽공원 집회 현장에서 멀티탭에 연결된 보조배터리와 휴대전화가 충전되고 있다. / 위키트리

충전기와 멀티탭도 시민들의 기부와 충전 자원봉사자들의 사비로 마련됐다. 다만 물품이 모두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충전기나 보조배터리가 사라지는 일도 있었다. 박 씨는 일부 참가자가 충전 봉사를 당연한 서비스처럼 여길 때 허탈감을 느낀다고 했다. 전기를 쓰고도 별다른 말 없이 떠나는 사람도 있었고 빌린 물건을 돌려주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박 씨는 이런 순간이 반복될 때마다 피로감이 크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박 씨는 "여기 있는 봉사자들이 계속 고생하고 있으니까 나온다"고 했다. 휴대전화가 꺼지면 현장을 기록하는 사람도, 안내를 맡은 사람도, 의료지원 자원봉사자도 제 역할을 하기 어려웠다. 전기차 주변에 맡겨진 스마트폰이 줄지어 놓였고 충전 자원봉사자들은 그것이 분실되거나 도난당하지 않도록 자리를 지켰다. 이들은 전력만 나눠준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안심하고 현장에 머물 수 있도록 충전대 옆을 지키는 역할까지 맡고 있었다.

박 씨는 일주일에 적어도 다섯 번은 잠실에 나온다고 했다. 주변에서는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는 말도 들었다. 그는 자신이 쓰는 돈과 시간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현장에 오래 남아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고 했다. 누가 명령해서도, 누가 알아줘서도 아니었다. 전기가 필요한 사람이 있고 자신이 전기차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다시 잠실로 향했다.

스스로 질서 만들었지만 갈등조율엔 한계도

명확한 지휘부가 없다는 것은 책임 소재가 흐려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누가 최종 결정을 내리는지 돌발 상황에서 누가 멈추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봉쇄가 길어지면서 핸드볼경기장에 입주한 펜싱·핸드볼·당구·산악 등 9개 체육단체의 업무에 차질이 빚어졌다. 오상욱 펜싱 국가대표 등은 아시아선수권대회 출국을 앞두고 개인 장비를 챙기지 못해 다른 선수의 장비를 급히 빌린 것으로 전해졌다. 핸드볼 유소년 국가대표 선수들의 소지품이 수색당한 일을 두고는 광장 안에서조차 "선을 넘었다"는 비판이 나왔다. 통제할 중심이 없다 보니 잘못을 바로잡을 창구도 마땅치 않았다.

체육단체 출입 문제를 두고 일부 참가자는 "공적 업무 수행까지 막는 것은 지나치다"며 제한적 출입을 허용하자고 했고 다른 참가자들은 "현장이 온전히 보전돼야 한다. 누구도 들여보낼 수 없다"며 봉쇄 유지를 주장했다.

올림픽공원 집회 현장에서 참가자 간 충돌이 벌어지자 경찰이 중재에 나서고 있다. 현장에서는 비슷한 갈등 상황이 종종 발생해 대화경찰이 배치되기도 했다. / 위키트리
올림픽공원 집회 현장에서 참가자 간 충돌이 벌어지자 경찰이 중재에 나서고 있다. 현장에서는 비슷한 갈등 상황이 종종 발생해 대화경찰이 배치되기도 했다. / 위키트리

온건론과 강경론을 정리할 중심이 없는 만큼 합의는 매번 즉석에서 새로 만들어져야 했다. 안전도 완벽히 통제되지는 않았다. 가스총을 소지한 80대 남성과 모형 소총을 갖고 있던 40대 여성이 경찰에 제지되는 소동도 있었다. 누구도 출입을 걸러내는 책임을 맡지 않은 광장에서 위험 요소가 그대로 섞여 들어온 장면이었다.

구호를 둘러싼 충돌은 현장 안의 이견을 조율할 중심이 뚜렷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줬다. 한 여성 참가자가 '재선거' 문구만 담긴 인쇄형 스티커를 현장에 부착하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이를 본 일부 참가자들은 즉각 반발했다. 이들은 "왜 부정선거는 말하지 않느냐", "부정선거가 있으니까 재검표를 하는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 남성 참가자는 군중을 향해 "자기 손으로 쓴 것도 아니고 스티커를 만들어 왔다. 이건 조직적이라는 얘기"라고 지적했다. 주변에선 박수와 함성이 뒤섞여 터졌다. "부정선거를 말하라"는 구호도 나왔다. 반면 스티커를 붙인 쪽에서는 "재선거만 외치자는 뜻이지 부정선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취지로 맞섰다. 같은 현장에 서 있었지만 무엇을 전면에 내세울지를 두고 참가자들의 인식은 크게 갈렸다.

대치는 곧 고성과 욕설, 몸싸움 시비로 번졌다. 현장에서는 "사람을 때렸다", "발로 찼다", "손대지 말라"는 외침이 이어졌고 주변 참가자들이 "경찰을 부르라", "채증하라", "폭력을 쓰면 안 된다"고 말리면서 소란이 커졌다. 일부 참가자는 스티커를 붙인 이들을 향해 "대진연 아니냐", "빨갱이다", "북한으로 가라"는 식의 색깔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대화보다 의심이 먼저 번지면서 현장은 순식간에 긴장감에 휩싸였다.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일대 집회 현장에서 ‘재선거’ 스티커 부착을 두고 참가자들 사이에 충돌이 벌어지고 있다. / 위키트리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일대 집회 현장에서 ‘재선거’ 스티커 부착을 두고 참가자들 사이에 충돌이 벌어지고 있다. / 위키트리

소란이 잠시 가라앉은 뒤 만난 여성 이 씨는 '재선거' 구호를 내세운 이유를 "집회가 특정 정치색을 띤 집회처럼 보이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처음 1~3일 차에는 정치색이 뚜렷하지 않은 젊은 층과 친구들도 많이 왔다. 태극기를 들고 재선거를 외치는 정도였기 때문에 부담이 적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성조기, 멸공 구호, 특정 정치인을 향한 비난이 등장했고 그 이후 중간 지대에 있던 사람들이 현장을 부담스럽게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씨는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제 이곳을 태극기 부대처럼 본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했다. 그는 "우리가 목표로 하는 것이 선관위 개혁과 재선거 요구라면, 대중적으로 진입장벽이 낮은 구호를 전면에 세우는 것이 전략적으로 맞다고 봤다"고 말했다. 이어 "재선거만 외치자는 말이 부정선거를 부정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더 많은 시민이 참여하려면 구호가 특정 진영의 언어로만 보이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이 씨가 우려한 것은 구호 자체보다 그 구호를 둘러싼 현장의 분위기였다. 그는 "초기부터 순수하게 자원봉사를 하던 사람들 중에도 정치색이 강하지 않은 이들이 많았다. 그분들이 '재선거와 태극기만 하자'고 했는데 어느 순간 '부정선거를 말하지 않으면 대진연'이라는 식의 말이 돌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때부터 처음 현장에서 봉사하던 사람들까지 대진연으로 몰리는 일이 생겼다. 의견을 말하면 곧바로 몰이가 되니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말하기 어려워졌다"고 했다.

이 씨는 이런 분위기가 광장 내부의 토론을 막고 있다고 봤다. 그는 "민주주의라면 다른 의견을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말하다 보면 저런 의견도 있을 수 있겠다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구호가 조금만 달라도 '쁘락치', '대진연' 같은 말이 먼저 나오고 결국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구조가 만들어졌다고 지적했다.

이 씨와 함께 있던 남성 최 모 씨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최 씨는 "주변에 좌파 성향이지만 이번 선거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고 보고 함께 재선거를 외치고 싶어 하는 지인이 있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현장이 언론을 통해 극우적 구호나 색깔로 비치기 시작하면 그런 사람들은 나오기 어려워진다"고 했다. 선거 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도 현장이 특정 진영의 집회로 굳어 보이는 순간 참여 자체가 정치적 부담이 된다는 것이다.

최 씨는 "재선거를 외친다고 해서 부정선거를 부정하거나 부실 선거로 축소하려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가 말하는 재선거는 선거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재선거가 필요하다는 뜻"이라며 "그런데 재선거만 외친다는 이유로 부정선거를 부정한다고 몰아가면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이어 "이곳은 우파만 모이는 곳이 아니라 참정권 침해에 분노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온 자리여야 한다. 좌파든 중도든 무관심했던 사람이든 같이 나올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올림픽공원 집회 현장에 ‘부정선거’와 ‘재선거’ 문구가 적힌 현수막과 대자보가 걸려 있다. / 위키트리
올림픽공원 집회 현장에 ‘부정선거’와 ‘재선거’ 문구가 적힌 현수막과 대자보가 걸려 있다. / 위키트리

반대로 강경 참가자들은 '부정선거'라는 표현을 빼는 순간 사안의 본질이 흐려진다고 봤다. 이들은 재선거 요구의 근거가 부정선거 의혹에 있는 만큼 '재선거'만 외치는 것은 원인을 지운 채 결과만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현장에 있던 한 참가자는 "부정선거가 있으니까 재검표를 요구하고 재선거를 말하는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부정선거를 말하지 않고 재선거만 말하면 왜 다시 선거를 해야 하는지 설명이 되지 않는다"며 "구호에서 부정선거를 빼서는 안 된다"고 했다. 주변에서도 "부정선거가 없으면 왜 재선거냐", "재선거만 외치면 사안의 핵심이 빠진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같은 재선거를 요구하면서도 무엇을 먼저 말해야 하는지를 두고 시각은 크게 엇갈렸다. 특정 정당이나 단체가 주도하지 않는 느슨한 광장은 다양한 사람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 됐다. 그러나 동시에 누구도 구호와 방향을 조율하지 못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어떤 이는 외연 확장을 위해 구호를 낮춰야 한다고 봤고 다른 이는 선명성을 잃는 순간 운동의 의미가 사라진다고 봤다.

두 입장은 같은 광장 안에서 부딪혔지만 이를 중재할 공식 창구는 보이지 않았다. 물자와 안전은 지휘부 없이도 굴러갔지만 무엇을 외칠 것인가라는 문제 앞에서는 보스 없는 구조의 빈틈이 그대로 드러났다.

자발성에 기댄 이 방식은 사람이 많아질수록 더 큰 부담을 안았다. 한 현장 관찰자는 초반 청년이 주도하던 봉사 인력이 2주를 넘기며 다소 줄었다고 전했다. 선의에만 기대는 구조인 만큼 피로가 쌓이면 광장을 떠받치던 손길도 옅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빈자리가 생길 때마다 누군가 그 자리를 채웠다. 물품을 나르는 사람도, 길을 안내하는 사람도,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도 대부분 스스로 역할을 찾아 나선 이들이었다. 직함보다 먼저 나온 것은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해가 기울 무렵 광장 한쪽에서 한 자원봉사자가 외쳤다. "가시는 분들 쓰레기랑 팻말 다 반납 부탁드립니다."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었다. 그 부탁만으로 광장은 그날도 큰 사고 없이 정리됐다. / 김지현·정혁진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