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간 방치된 지하공간도 있다… 서울서 새롭게 태어난 '역사 명소' 4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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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한 서울 명소
서울 도심 한복판, 수십 년간 잊힌 채 방치됐던 회색빛 공간들이 예술을 품은 복합문화공간으로 변신했다. 낡은 벽면을 채운 현대적 감각은 잠들어 있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게 만든다. 산업화의 흔적이 깃든 지하 공간부터 시대를 풍미한 예술가의 안식처까지.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며 시민들의 발길을 이끄는 서울의 명소를 만나본다.

시대의 공기를 머금은 문화 거점, 서촌 보안여관

서울 종로구 누하동에 자리한 서촌 초입에는 낡은 붉은 벽돌 건물이 자리해 있다. 1930년대부터 약 80년간 예술가들의 안식처이자 창작의 산실로 자리 잡은 이곳은 보안여관이다. 이곳은 단순히 잠을 자는 숙박업소를 넘어, 당대 문학인들과 예술가들이 머물며 시대의 고뇌를 나누고 새로운 문화를 태동시킨 역사적인 공간으로 평가받는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외관은 화려한 도심 속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며 지나가는 이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든다.
보안여관은 원형을 최대한 보존하는 방식으로 리모델링돼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다. 과거 객실이었던 공간들은 이제 현대 미술 작가들의 전시실로 변모해, 낡은 벽지와 삐걱거리는 마룻바닥 사이로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는다. 관람객들은 좁고 낮은 천장의 복도를 걸으며, 마치 100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떠난 듯한 느낌을 받는다.
통의동 보안여관은 매일 낮 12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되며, 매주 월요일은 정기휴무일이다. 다만 전시장 준비 중일 경우에는 방문이 불가능하다.
현재 보안여관에선 박승원 작가의 개인전인 '트로피컬 로맨스'가 진행 중이다. 해당 전시는 '아트스페이스 보안 1'에서 오는 24일까지 열리며, 누구나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경복궁 영추문 건너편이나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4번 출구에서 청와대 방향으로 5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산업 유산의 극적인 변신, 마포 문화비축기지

마포구 성산동에 위치한 문화비축기지는 970년대 석유 파동을 겪으며 건설된 1급 보안 시설이었다. 40년이 넘는 시간동안 시민들의 접근이 엄격히 통제됐던 이곳은 도시의 에너지를 책임지는 거대한 기름 탱크로 가득했다. 철저히 외부와 단절됐던 이곳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더 이상 필요 없는 폐허가 되는 듯했으나, 서울시의 대대적인 도시 재생 프로젝트를 통해 시민들을 위한 열린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2013년 시민 공모전을 시작으로 3년 넘는 설계와 공사 끝에 2017년 마포 문화비축기지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축구장 22개 크기에 달하는 약 14만 제곱미터의 부지는 거대한 석유 탱크의 외형을 고스란히 남겼다. 대신 내부를 깎고 다듬어 공연장, 전시관, 커뮤니티 센터로 재구성했다.
T1(파빌리온)은 탱크를 해체하고 전면 유리로 벽체와 지붕을 새로 올려 매봉산의 암반과 조화를 이루는 독특한 전시 공간이 됐다. T2(공연장)는 상부를 야외무대로, 하부를 실내 공연장으로 꾸며 자연과 예술이 공존하는 무대를 선사한다. T3(탱크원형)는 석유비축기지 시절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됐으며, T4(문화복합공간)는 내부의 거대한 철제 구조를 그대로 살려 미디어 아트와 기획 전시의 독창성을 극대화했다. 마지막으로 T5(이야기관)는 비축기지의 역사를 기록한 상설 전시관으로 운영된다.
어둠 속에서 피어난 예술의 빛, 홍제유연


홍제천을 따라 걷다 보면 만날 수 있는 홍제유연은 무려 50년 동안이나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된 채 방치됐던 지하 공간이다. 1970년대 만들어진 유진상가 하부 구조는 그간 거대한 콘크리트 기둥과 어둠만이 가득한 흉물로 인식돼 왔다.
유진상가는 70년대 완공된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 건축물 중 하나다. 당시 서울 최신 건축 트렌드를 반영한 건물로, 1층과 2층은 거대한 상가였고 그 위로는 주거 공간이 자리했다. 서울시는 칙칙한 지하 하천길을 시민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대규모 미디어 아트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홍제유연은 '물과 사람이 흘러가는 예술 정원'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지하 공간의 특징인 어둠과 습기를 예술가들의 조명과 미디어 아트로 승화시켜,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로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방문객들은 콘크리트 기둥 사이로 설치된 예술 작품을 감상하며 과거의 암울했던 이미지를 비우고 창의적인 에너지를 채운다.
상처에서 피어난 전망 명소, 창신동 채석장

동대문역 뒷동네인 창신동 산자락에 올라가면 기묘한 풍경과 마주하게 된다. 거대한 아파트 단지와 빽빽한 주택가 사이에 칼로 잘라낸 듯한 깎아지른 절벽이 거대한 위용을 드러내며 솟아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총독부가 서울의 주요 석조 건축물을 짓기 위해 개발했던 창신동 채석장 터다. 옛 조선총독부 청사, 서울역사, 한국은행 본관, 경성부청(옛 서울시청)을 채운 단단한 화강암들이 모두 이 자리에서 깎여 나갔다.
이후에는 절벽 주변에 갈 곳 없는 피난민과 이주민들이 모여들어 가파른 달동네가 형성됐다. 또 1970년대부터는 동대문 시장의 활성화와 맞물려 대한민국 의류 산업을 지탱하는 배후 봉제 골목으로 변모했다. 사방에서 들리는 재봉틀 소리와 미로 같은 가파른 계단은 한국 현대사의 치열한 노동과 삶의 궤적을 고스란히 투영한다.
정부는 무조건 건물을 부수고 새로 짓는 방안 대신 역사적 상처와 노동의 가치를 보존하는 방식을 택했다. 절벽 꼭대기에는 서울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채석장 전망대와 감각적인 문화공간, 이색 카페들이 들어섰다. 거친 암벽의 질감과 낙산 성곽길 등이 어우러져 현재는 수많은 청년층이 찾는 사진 명소로 급부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