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반대편 전쟁의 나비효과… 매일 먹던 ‘이 과일’ 가격이 한 달 만에 폭등한 이유

작성일

중동 전쟁이 밥상을 위협한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의 연쇄 충격

이란 전쟁의 발발과 글로벌 물류의 가장 중요한 길목인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 장기화가 전 세계 식량 지도를 거센 속도로 뒤흔들고 있다.


서울 시내 한 대형마트에서 시민들이 장을 보고 있다. / 연합뉴스
서울 시내 한 대형마트에서 시민들이 장을 보고 있다. / 연합뉴스

중동 지역에서 터진 지정학적 충격이 전 세계 물류망과 석유화학 공급망을 타고 각 가정이 소비하는 식탁 물가에까지 직격탄을 날리는 모양새다. 현재 아시아 지역에서는 주식인 쌀값이 가파르게 치솟고 대중적인 과일인 바나나가 시장에서 사라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커진 반면, 유럽에서는 유례없는 풍작을 맞이하고도 수출길이 막혀 자식처럼 키운 감자를 무더기로 폐기하는 역설적인 고통이 이어지고 있다.


가장 먼저 충격을 받은 곳은 아시아의 핵심 식량인 쌀 시장이다. 태국산 백미 가격은 지난 5월 한 달 동안에만 무려 20% 급등하며 지난 2008년 이후 가장 커다란 월간 상승폭을 기록했다. 시카고상품거래소에서 거래되는 쌀 선물 가격 역시 같은 기간 동안 15% 올랐다. 이처럼 쌀값이 폭등한 바탕에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인한 비료와 연료 공급 마비라는 구조적인 원인이 자리 잡고 있다.


현대 농업은 석유 정제 과정이나 천연가스에서 추출한 성분을 바탕으로 만드는 화학비료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특히 농사에 필수적인 질소 비료는 천연가스 등에서 나오는 암모니아를 원료로 삼는데, 중동발 에너지 위기로 이 공급줄이 끊기자 비료 가격이 천천히 오르는 수준을 넘어 폭발해 버린 것이다. 국제미작연구소의 조사 결과 태국과 캄보디아, 필리핀 등 주요 쌀 생산국의 질소 비료 가격은 전쟁이 터진 지난 2월 이후 불과 몇 달 만에 40%에서 50%가량 치솟았다. 여기에 지구 온난화로 인한 가뭄을 몰고 오는 엘니뇨 현상까지 겹치면서 앞으로의 전망도 어둡다. 필리핀 정부는 강한 엘니뇨가 이어질 경우 전체 쌀 수확량이 최대 70만 톤까지 줄어들 수 있다고 공식적으로 경고를 보냈다.


석유화학 마비가 부른 바나나 품귀와 유럽 농가의 눈물

일본에서는 국민 과일로 불리는 바나나가 조만간 시장에서 자취를 감출 수 있다는 흉흉한 우려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바나나는 보통 장거리 해상 운송 중 상하는 것을 막으려고 현지에서 완전히 익지 않은 초록색 상태로 배에 실어 수입한다.


바나나 자료사진. / GraphinityLab-shutterstock.com
바나나 자료사진. / GraphinityLab-shutterstock.com

그 뒤 소비국에 도착하면 가공 공장에서 식물 숙성을 돕는 천연 호르몬인 에틸렌 가스를 뿌려 노랗게 익히는 과정을 거쳐 시중에 유통한다. 문제는 이 에틸렌 가스를 만드는 뿌리가 바로 원유를 증류할 때 나오는 화학 물질인 '나프타'라는 점이다. 원유 수입량의 90% 이상을 중동 지역에 목줄을 잡혀 있는 일본은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자 나프타 생산 부문에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실제로 올해 들어 일본 내 나프타 재고량은 25%나 바닥을 드러냈다.


일본바나나수입협회의 에이지 아카시 사무총장은 현재 겪고 있는 부족 사태가 지난 50년 만에 최악의 수준이라며, 가격이 크게 오르더라도 공급 자체가 완전히 끊기는 최악의 상황만은 막기 위해 온 업계가 매달리고 있다고 털어놨다. 일본의 거대 농산물 가공 기업인 파민드 역시 이 같은 물류 마비가 지속된다면 일본인들의 식탁에서 바나나가 아예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유럽 대륙 또한 중동에서 일어난 전쟁의 불길을 피해 가지 못했다. 독일의 경우 최근 8년 만에 찾아온 엄청난 감자 풍작으로 인해 거두어들인 감자 중 무려 4,000 톤에 달하는 물량을 주민들에게 공짜로 마구 나누어주는 이른바 '감자 홍수' 사태까지 벌어졌다.


수확량이 늘어나면 농가에 기쁨이 되어야 마땅하지만 현장의 속사정은 눈물바다다. 농기계를 움직일 기름값과 비료 비용은 머리가 아플 정도로 치솟아 막대한 돈을 쏟아부었는데, 정작 다 키워낸 감자를 주로 사 가던 중동 지역으로의 해상 수출길이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완전히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벨기에 감자가공협회 벨가폼의 최고경영자인 크리스토프 베르뮐런은 비료의 원료를 가득 실은 화물선들이 페르시아만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갇혀 있는 상태라고 설명하며, 판로가 막힌 유럽 농가들의 재정적 손실이 극도로 악화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같은 전방위적인 먹거리 가격 불안정은 단순히 특정 품목의 문제를 넘어 전 세계 경제 성장판을 닫아버리는 무거운 짐이 되고 있다.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한 수석 이코노미스트 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호르무즈 해협의 폐쇄는 연료와 비료, 식량 공급망을 한꺼번에 뒤흔드는 삼중고를 몰고 왔다. 해당 조사에 참여한 글로벌 금융 경제 전문가들의 94%는 앞으로 1년 동안 전 세계적인 물가 상승세가 꺾이지 않을 것으로 바라봤으며, 80%가 넘는 인원은 식료품 가격이 추가로 더 오를 것이라고 확언했다. 포럼 측은 에너지와 식량 가격의 동반 상승이 인플레이션 압박을 극도로 키우고 글로벌 경제가 성장할 수 있는 힘을 근본적으로 약화시키고 있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