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앞에 불의 기운 막는 '연못'이 있었다? 현장 가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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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복판 '보이지 않는 역사' 남지 이야기

서울 도심 숭례문 앞에는 과거 '연못'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을 듯하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지인 덕분에 최근에야 숭례문 앞에 있었던 연못의 존재를 알게 됐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조선시대 연못 '남지(南池)'다.
남지는 말 그대로 남쪽에 있던 연못을 뜻한다. 여기서 남쪽은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남문인 숭례문 앞을 가리킨다. 오늘날 숭례문 주변은 자동차와 사람들이 오가는 서울 도심 한복판이고 높은 빌딩과 도로가 이어진 서울의 대표적인 중심지다. 그래서 이곳에 한때 물이 고인 연못이 있었다는 사실은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숭례문 앞에 있었던 연못 '남지'
현재 숭례문 앞에는 '남지터'라고 적힌 표지석이 남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숭례문을 보러 지나가면서도 그 앞에 조선시대 인공 연못이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지 못한다. 10일 낮 숭례문에는 평일임에도 시민과 외국인 관광객들로 붐볐다. 그러나 숭례문에서 도로를 하나 건너서 있는 '남지터' 표지석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 이들은 보기 어려웠다.
이날 '남지터' 표지석 근처를 지나던 40대 남성 A 씨는 "직장이 근처에 있어 숭례문 주변을 자주 걸어 다니지만 남지라는 연못이 숭례문 앞에 있었다는 사실은 몰랐다"라고 말했다. 30대 여성 B 씨도 "오늘 알려줘서 처음 알게 됐다. 남지라는 이름도 처음 들었다"라고 했다.

남지를 이해하려면 숭례문이 조선시대에 어떤 문이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숭례문은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남문으로 흔히 남대문으로 불렸다. 조선은 한양을 수도로 삼으면서 궁궐과 종묘, 사직, 관아를 세우고 도성을 쌓았다. 도성에는 동서남북을 대표하는 사대문이 있었고 그 가운데 남쪽을 맡은 문이 숭례문이었다.
당시 숭례문은 성 안팎을 오가는 단순한 출입구가 아니었다. 왕의 행차가 지나고 사신을 맞이하는 길목이었으며 도성의 남쪽 관문으로서 정치적·의례적 상징성이 큰 공간이었다. 조선시대의 도성 문은 군사적 방어 시설이면서 동시에 나라의 질서와 이념을 드러내는 상징물이기도 했다.
숭례문(崇禮門)이라는 이름에도 조선의 사상 체계가 반영돼 있다.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사대문 이름은 유교적 덕목과 음양오행의 관념을 함께 담고 있다. 동쪽은 목과 인, 서쪽은 금과 의, 남쪽은 화와 예, 북쪽은 수와 지에 대응한다고 봤다. 이런 관념에 따라 동쪽 문은 흥인문(흥인지문), 서쪽 문은 돈의문, 북쪽 문은 숙정문, 남쪽 문은 숭례문으로 이름 붙여졌다.
숭례문의 이름은 예의와 질서를 뜻하는 유교적 덕목이면서 오행으로는 남쪽과 불의 기운을 상징하는 글자로 이해됐다. 따라서 숭례문은 한양도성의 남문이라는 실제 기능뿐만 아니라 남쪽의 방위와 불의 기운을 상징적으로 품은 조선시대의 문이었다.
불의 기운에 대한 조선시대 풍수지리적 인식
남지가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는 배경에는 바로 이 불의 기운에 대한 조선시대 풍수지리적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풍수지리에서는 땅의 모양과 산세, 물길, 방위를 살펴 사람이 사는 터의 길흉을 판단했다. 조선의 수도 한양은 북쪽의 백악산, 동쪽의 낙산, 남쪽의 목멱산, 서쪽의 인왕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에 자리 잡았다.
그런데 한양도성의 남쪽 멀리에는 관악산이 있었다. 관악산은 봉우리와 바위의 형상이 불꽃처럼 솟아 보인다고 여겨졌고 당시 풍수적으로 화기가 강한 산으로 해석됐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관악산의 강한 불기운이 한양도성, 특히 경복궁 등 궁궐과 숭례문 쪽으로 향한다고 봤다.

이처럼 특정한 지세가 지나치게 강하거나 부족하다고 여겨질 때 풍수에서는 그것을 보완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했다. 이를 '비보'라고 한다. 당시 비보는 터의 약점을 보충하고 흉한 기운을 누르기 위해 나무를 심거나 연못을 만들고 건축물의 위치와 형태를 조정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숭례문 앞 남지도 이런 비보의 관점에서 설명된다.
남쪽 관악산의 화기를 물의 기운으로 다스리기 위해 숭례문 앞에 인공 연못을 팠다는 것이다. 불을 물로 누른다는 풍수지리적 논리에 따라 한양도성의 남문 앞에 물을 담은 연못을 조성해 불의 기운을 완화하려고 했다는 해석이다.
당시 숭례문 앞 남지는 경관을 아름답게 하기 위한 연못만은 아니었다. 도성의 안녕을 기원하고 궁궐과 나라의 중심부를 불의 재난으로부터 지키려는 상징적 방어 장치였다. 특히 목조 건축물이 많았던 조선시대에 불은 매우 두려운 재난이었다. 궁궐과 도성의 주요 건물은 나무로 지어졌고 한 번 큰불이 나면 국가 운영의 핵심 공간이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이런 현실적 두려움과 풍수지리적 믿음이 결합하면서 남지는 숭례문 앞에 놓인 '물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숭례문 현판이 세로 방향으로 걸려 있는 이유는?
숭례문은 관악산의 화기를 막으려는 풍수적 해석이 덧붙어 전해진다. 숭례문의 현판은 다른 성문 현판과 달리 세로로 걸려 있다. 이에 대해서는 관악산의 화기를 맞불로 막기 위해 현판을 세로로 달았다는 해석이 전해지고 있다. 이는 불의 기운을 물로만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불의 기운으로 불을 다스린다는 개념과 연결된다.

이와 관련해 풍수지리학자인 지종학 대한풍수지리학회 이사는 최근 방송된 KBS2TV 교양 프로그램 '2TV 생생정보'에서 "서울에서 제일 화기가 강한 곳은 관악산"이라며 "거기에 가 보면 왜 그곳을 화산이라 불렀는지 중요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 이사는 "(관악산 불의 기운을 막기 위해) 숭례문 앞에 남지라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라며 "숭례문의 현판을 보면 다른 (사대문의) 현판은 가로로 배치했는데 숭례문의 현판만 (불의 기운을 막기 위해) 세로로 배치했다"라고 말했다.
지 이사는 숭례문의 '숭(崇)'은 불꽃을 상징하는 상형문자이며 '례(禮)'는 오행에서 '불'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즉 '숭례' 두 글자를 보면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화치화(以火治火)라고 불을 불로써 막겠다는 뜻이었다"라고 했다.
경복궁이 있는 서울 광화문 앞의 해태상도 이 이야기와 함께 전해진다. 해태는 상상 속의 동물로 옳고 그름을 가르고 재앙을 막는 신수로 여겨졌다. 조선시대에는 해태가 정의와 공정의 상징으로도 이해됐고 불을 막는 존재로도 해석됐다. 광화문 앞에 놓인 해태상은 경복궁의 정문을 지키는 상징물인 동시에 풍수지리적으로는 관악산에서 뻗어 온다는 화기를 막는 장치로 설명되곤 했다.
관악산 화기로부터 경복궁 지키는 풍수지리 장치들
당시 관악산의 불기운이 숭례문과 도성 중심부를 거쳐 경복궁으로 향한다고 봤기 때문에 그 길목에 물의 상징인 숭례문 앞 남지와 불을 막는 신수인 해태상을 배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처럼 남지와 숭례문, 광화문 해태상은 풍수지리의 시각에서는 일종의 상징적 방어선으로 연결된다.
오늘날 남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1900년을 전후해 숭례문 주변 성곽을 헐고 도로를 확장하는 가운데 남지는 메워지고 대부분 사람의 기억 속에서도 사라졌다. 현재는 길가에 표지석만 덩그렇게 남아 있다.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재인 숭례문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웅장한 문루와 복원된 성곽, 주변 광장에는 눈길을 주지만 그 앞에 있었던 연못의 존재까지 떠올리지는 못한다. 그래서 남지는 서울 한복판에 표지석으로만 남겨진 '보이지 않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