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 사이에 있다?... 1000평 넘는 거대 암반 위에 세워진 '이색 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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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림동 계곡의 진주로 불리는 '함양 농월정'

경남 함양 안의면에는 수백 평의 하얀 너럭바위 위로 푸른 물줄기가 쏟아지는 절경 속에 우아한 정자가 우두커니 서 있다. 예로부터 '화림동계곡의 진주'라 불리는 이곳은 많은 시인 묵객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온 장소다. 바쁜 일상에 치여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린 여행객들에게 쉼터가 돼주는 이색 명소를 소개한다.


경남 함양 농월정. 기사 내용 토대로 AI툴 활용해 제작한 자료사진.
경남 함양 농월정. 기사 내용 토대로 AI툴 활용해 제작한 자료사진.

화림동계곡 사이에 자리한 농월정이다. 조선 중기 함양 출신의 학자이자 관료였던 지족당 박명부 선생이 정계에서 물러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하며 지은 정자다. 농월(弄月)이라는 단어는 '달을 희롱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단순히 달을 가지고 논다는 가벼운 의미를 넘어 맑은 계곡물에 비친 달빛을 바라보며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의 경지를 표현한 것이다.

농월정은 2003년 원인 모를 방화로 인해 전소되는 비극을 맞이했었다. 400년의 역사가 한 순간에 잿더미로 변해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이후 2015년 함양군과 지역 주민들의 노력 끝에 원래의 모습대로 정밀하게 복원하며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농월정은 정자 자체의 건축미도 뛰어나지만, 주변을 둘러싼 거대한 천연 암반과의 조화가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정자가 자리 잡은 곳은 대략 1000평이 넘는 거대하고 평평한 바위지대인데, 이 반석의 이름 역시 농월정의 이름을 따서 '달바위(월연암)'라 부른다.

자연을 품은 '그랭이 공법'

경남 함양 농월정. 기사 내용 토대로 AI툴 활용해 제작한 자료사진.
경남 함양 농월정. 기사 내용 토대로 AI툴 활용해 제작한 자료사진.

우리 선조들은 울퉁불퉁하고 거친 암반 위에 정자를 세우기 위해 자연석의 굴곡 모양 그대로 나무 기둥 밑면을 깎아 맞추는 전통 건축 방식인 '그랭이 기법'을 사용했다. 굴곡진 초석 면을 따라 기둥뿌리에 본을 떠서 긁어내면 초석과 기둥이 빈틈없이 밀착될 수 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이층 누각 형태로 지어졌다. 누정 내부 가운데에는 온돌방 한 칸을 둬 겨울에도 머무를 수 있도록 했다. 또 사방으로는 넓은 마루를 깔아 개방감을 극대화했다.

여기에 마루 끝부분에는 우아한 곡선미가 돋보이는 계자난간을 둘러 안전함과 시각적 아름다움을 동시에 잡았다. 농월정 마루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면 탁 트인 계곡의 전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자연이 액자가 되는 차경 미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곳이다.

특히 농월정은 단독으로 봐도 좋지만, 산책로와 연계해 걸을 때 감동이 배가된다. 거연정에서 시작해 농월정까지 이어지는 '함양 선비문화탐방로 1구간(약 6km)'이다. 화림동계곡을 따라 조성된 이 길은 경사가 거의 없고 평탄한 나무 데크와 숲길로 이뤄져 있어 누구나 부담없이 걷기 좋다. 산책을 즐기면서 계곡의 청량한 물소리와 새소리가 어우러져 일상의 스트레스를 날려준다.

탐방로를 걷다 보면 거연정을 시작으로 군자정, 영귀정, 동호정 등 조선 시대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단아한 정자들을 모두 만날 수 있다. 특히 동호정 앞에는 해를 가릴 정도로 넓은 바위라는 뜻의 '차일암'이 자리해 있다. 차일암은 농월정의 달바위와는 또 다른 압도적인 규모감을 자랑한다.

정자들을 지나쳐 옛 선비들이 사랑했던 풍경 속을 거닐다 보면 마침내 종착지인 농월정에 다다르게 된다.

농월정 가는 길

농월정은 안의면 농월정길 9-1 일대에 자리해 있다. 대전통영고속도로와 인접해 차량 접근성이 뛰어난 편이다. 자차로 방문할 경우, 서상 나들목(IC)이나 지곡 나들목을 빠져나와 안의면 방면으로 약 10~15분 정도 소요된다. 농월정 국민관광지 주차장은 공간이 넓은 편이며, 주차 요금은 따로 받지 않는다.

대중교통으로 방문한다면 전국 각지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함양시외버스터미널이나 안의버스터미널로 이동해야 한다. 안의버스터미널에서 농월정으로 가는 함양군 농어촌 버스가 운행 중이지만, 시골 버스의 특성상 배차 간격이 다소 길기 때문에 출발 전 버스 시간표를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구글지도, 함양 농월정

500년 내력을 지켜온 '함양 일두고택'

함양 일두고택. 기사 내용 토대로 AI툴 활용해 제작한 자료사진.
함양 일두고택. 기사 내용 토대로 AI툴 활용해 제작한 자료사진.

농월정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자리한 일두고택은 조선 오현(五賢) 중 한 사람인 문헌공 일두 정여창 선생의 종가다. 이곳은 단순한 옛집을 넘어 영남 지방 양반 가문의 건축 미학이 고스란히 보존된 살아있는 박물관으로 불린다.

일두고택은 정여창 선생의 생가 자리에 후손들이 중건해 오늘날까지 이어온 유서 깊은 건축물이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들은 대부분 16~17세기 사이에 중건됐다. 고택이 위치한 개평마을은 하동 정씨와 풍천 노씨가 대대로 미나리 아재비 모양의 지형에 터를 잡고 살아온 집성촌이다.

오랜 세월 동안 크고 작은 전란과 화마 속에서도 종가의 형태를 온전하게 보존해 온 덕분에 현재도 독보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 고택은 굳건한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외형적 특징을 보인다. 솟을대문에 들어서기 전 대문 상단에 촘촘하게 걸려 있는 5개의 홍살 정문이 눈길을 끈다. 홍살 정문은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내린 편액이다.

이처럼 5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격동의 한국사를 온몸으로 버텨낸 일두고택은 담장 하나, 기와 한 장에도 역사가 서려 있다.

일두고택은 대지 면적만 무려 3000평에 달한다. 또 조선 시대 성리학적 유교 질서에 따른 공간 분할의 미학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고택의 중심축은 남성들의 공간인 사랑채와 여성들의 생활 공간인 안채로 나뉜다. 솟을대문을 지나 마당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사랑채는 높은 기단 위에 당당하게 올라서 있다.

사랑채가 개방적이고 웅장한 멋을 풍긴다면, 일각문을 지나 깊숙이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안채는 아늑하면서도 실용적인 구조가 돋보인다. 안채는 외부 시선으로부터 철저히 차단된 'ㅁ'자형 구조를 취하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툇마루와 작은 문들의 배치를 통해 시선을 차단하면서도 바람과 빛이 통하도록 유기적으로 연결했다. 지형과 기후에 순응하며 공간의 쓰임새를 극대화했던 조상들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구글지도, 함양 일두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