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신문사 기자들이 집단으로 낸 사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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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열에 찢긴 시, 등사기로 알린 진실… 1980년 광주의 기록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벌어진 지 사흘째 되던 날인 1980년 5월 20일.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은 사표를 썼다. 사장에게 바치는 사직서가 아니었다. 금남로에 뿌릴 2만 장짜리 고발장이었다.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당시 계엄군은 광주 시내에서 시민들을 진압봉으로 두들겨 패고 대검으로 찌르고 총으로 쐈다. 시위와 전혀 관계없는 행인도 물놀이하던 아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기자들은 그 현장을 눈으로 봤다. 그러나 신문에는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신군부의 검열이 모든 것을 틀어막고 있었다.
기자들이 택한 방법은 사표였다. 그냥 사표가 아니었다. 자신들이 보고도 쓰지 못한 것을 사표 위에 써서 인쇄기로 2만 장을 찍어 시민들에게 뿌렸다. 펜으로 못 한 일을 등사기로 했다.
당시 국내 언론 대부분은 ‘어용’이 된 지 오래였다. 신군부는 5·18을 '빨갱이들의 폭동'으로 보도하도록 강제했다. 계엄군이 시민들을 학살하는 동안 텔레비전은 '활기 되찾은 광주'를 내보냈다. 그 간극을 메운 것은 국내 언론이 아니었다. 북부독일방송 도쿄 지국 소속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가 택시운전사 김사복의 도움으로 광주에 잠입해 촬영한 영상이 독일 타게스샤우를 통해 전 세계에 나갔다. 힌츠페터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나는 기록했다. 한국 언론에서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진실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항쟁이 진압된 뒤인 6월 2일 전남매일신문은 2주간의 휴간 끝에 다시 신문을 냈다. 편집국 간부들은 이날 하루만큼은 기자들이 쓰는 대로 신문을 만들기로 했다. 1면에는 시를 싣기로 했다. 당시 전남고 교사였던 김준태 시인에게 오전 중으로 써달라는 연락이 갔다.
김준태 시인은 이미 두 가지 충격에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5월 21일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 때 가슴에 총을 맞아 피가 솟구치는 사람을 직접 안고 뛰었던 것이 첫 번째였다. 두 번째는 직장 동료의 아내 최미애씨의 죽음이었다. 임신 8개월이었던 최 씨는 남편을 기다리다 골목에서 계엄군의 총에 머리를 맞아 쓰러졌다. 가족들이 집으로 옮긴 뒤에도 뱃속 태아가 한참 동안 격렬하게 움직였다. 산소가 끊기자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것이다. 아무리 연락해도 병원에선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녀의 나이는 24세였다.
김준태 시인은 단칸 셋방 방바닥에 엎드려 창문으로 무등산을 바라보며 그 기억들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50분 만에 109행이 완성됐다.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였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 어떤 거대한 음악이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창문을 뚫고 내게 달려오는 저 무등산을 나는 온몸에 받으며 109행이나 되는 꽤 긴 시를 써버린 것이다."

시가 너무 적나라하다는 우려가 있었지만 김원욱 사회부장이 "많은 시민들이 죽은 마당에 시 하나 싣는 게 뭐가 문제냐"며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러나 도청 안 계엄사 검열반은 109행 중 3분의 2를 빨간 펜으로 쳐냈다. 신문에 실린 것은 33행뿐이었다.
김준태 시인은 처음부터 이를 예상했다. 검열로 잘려나가도 독자가 시의 문맥을 읽을 수 있도록 설계하며 시를 썼다고 한다. 시 전문은 인쇄 전 미리 10만 부 이상 찍혀 퍼져나갔고, 원문은 시민의 손에서 손으로 전달됐다. 그 시절 진실은 그렇게 유통됐다. 비디오테이프에 숨겨서, 등사기로 찍어서, 손에서 손으로.
시가 나가자 계엄사가 편집국을 급습했다. 김준태 시인은 23일간 몸을 숨겼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더 이상 숨어다닐 수 없다"며 집으로 돌아간 지 5분도 안 돼 연행됐다. 보안대 옥상으로 끌려가 밤새 문초를 당하고 20일 만에 풀려났지만 사표는 이미 수리된 뒤였다. 시 게재를 밀어붙인 김원욱 사회부장도 함께 해직됐다. 전남매일신문은 그해 11월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전남일보와 통합되며 폐간됐다.
올해 김준태 시인은 32회 김용근교육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기념사업회는 "군사독재의 억압 속에서도 민족과 민주, 인간 존엄의 가치를 교육과 문학 현장에서 온몸으로 실천해 온 참교육자"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시상식은 지난 15일 광주학생교육문화회관에서 열렸다.
18일은 5·18 민주화운동 46주기다. 이날 이재명 대통령은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수록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기념식은 복원된 옛 전라남도청 앞 5·18 민주광장에서 열렸다. 1980년 5월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해 총을 겨눴던 바로 그 자리다.
<김준태 시인의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전문>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
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
우리들의 아들은
어디에서 죽어 어디에 파묻혔나
우리들의 귀여운 딸은
또 어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있나
우리들의 혼백은 또 어디에서
찢어져 산산이 조각나 버렸나
하느님도 새떼들도
떠나가버린 광주여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들만이
아침저녁으로 살아남아
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아아 통곡뿐인 남도의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해와 달이 곤두박질치고
이 시대의 모든 산맥들이
엉터리로 우뚝 솟아 있을 때
그러나 그 누구도 찢을 수 없고
빼앗을 수 없는
아아, 자유의 깃발이여
살과 뼈로 응어리진 깃발이여
아아, 우리들의 도시
우리들의 노래와 꿈과 사랑이
때로는 파도처럼 밀리고
때로는 무덤을 뒤집어쓸지언정
아아, 광주여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무등산을 넘어
골고다 언덕을 넘어가는
아아, 온몸에 상처뿐인
죽음뿐인 하느님의 아들이여
정말 우리는 죽어버렸나
더 이상 이 나라를 사랑할 수 없이
더 이상 우리들의 아이들을
사랑할 수 없이 죽어버렸나
정말 우리들은 아주 죽어버렸나
충장로에서 금남로에서
화정동에서 산수동에서 용봉동에서
지원동에서 양동에서 계림동에서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아아, 우리들의 피와 살덩이를
삼키고 불어오는 바람이여
속절없는 세월의 흐름이여
아아,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구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넋을 잃고 밥그릇조차 대하기
어렵구나 무섭구나
무서워 어쩌지도 못하는구나
(여보 당신을 기다리다가
문 밖에 나가 당신을 기다리다가
나는 죽었어요......그들은
왜 나의 목숨을 빼앗아갔을까요
아니 당신의 전부를 빼앗아갔을까요
셋방살이 신세였지만
얼마나 우린 행복했어요
난 당신에게 잘해주고 싶었어요
아아, 여보!
그런데 나는 아이를 밴 몸으로
이렇게 죽은 거예요 여보!
미안해요, 여보!
나에게서 나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나는 또 당신의 전부를
당신의 젊은 당신의 사랑
당신의 아들 당신의
아아, 여보! 내가 결국
당신을 죽인 것인가요?)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을 뚫고 나가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다시 넘어오는
이 나라의 하느님 아들이여
예수는 한 번 죽고
한 번 부활하여
오늘까지 아니 언제까지 산다던가
그러나 우리들은 몇백 번을 죽고도
몇백 번을 부활할 우리들의 참사랑이여
우리들의 빛이여, 영광이여, 아픔이여
지금 우리들은 더욱 살아나는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튼튼하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아아, 지금 우리들은
어깨와 어깨 뼈와 뼈를 맞대고
이 나라의 무등산을 오르는구나
아아, 미치도록 푸르른 하늘을 올라
해와 달을 입맞추는구나
광주여 무등산이여
아아,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
꿈이여 십자가여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젊어져갈 청춘의 도시여
지금 우리들은 확실히
굳게 뭉쳐있다 확실히
굳게 손잡고 일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