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제일 키가 큰 나라' 네덜란드보다 한국이 훨씬 극적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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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간 18cm 성장' 네덜란드인의 비결은?
같은 유전자 다른 키... 환경이 몸을 바꾼다?

침대 발치에 발이 삐죽 튀어나온다. 문틀에 이마를 찧는다. 구급차에 몸이 다 들어가지 않는다. 네덜란드인들이 자국의 평균 신장을 두고 반농담처럼 늘어놓는 불편함들이다. 세계에서 가장 키 큰 국민을 가진 나라라는 영예는 이런 일상적 불편을 동반한다. 네덜란드 성인 남성의 평균 신장은 183cm가 넘고 여성은 170cm가 넘는다. 세계 평균인 남성 173cm, 여성 161cm와 비교하면 10cm 이상 크다. 한국 성인 남성 평균(172.5cm)과는 무려 11cm 이상 차이가 난다. 일반적인 한국 성인 남성이 네덜란드에 가면 '보통 키'가 아니라 '작은 키'가 된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다. 200년 전 네덜란드 남성의 평균 신장은 166cm에 불과했다. 당시 미국인 남성의 평균이 173cm였으니, 지금과는 정반대로 미국인이 네덜란드인보다 7, 8cm나 더 컸다. 당시의 네덜란드는 유럽에서도 키가 작은 편이었다. 심지어 비슷한 시기 스웨덴 남성 평균이 169.6cm, 영국이 168.1cm, 독일이 169.5cm였다. 200년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200년 만에 18cm 자라
1810년 166cm이던 네덜란드 남성의 평균 신장은 오늘날 거의 183cm에 이른다. 200년 사이 18cm가 늘었다. 인류 역사에서도 매우 빠른 축에 속한다.
이 변화를 진화로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다. 유전적 진화가 집단 전체에 이 정도 효과를 내려면 수천 년이 걸린다. 200년은 진화적 시간 단위로는 눈 깜짝할 사이다. 답은 다른 곳에 있다.
과학자들은 크게 세 가지 요인을 꼽는다. 유제품 중심의 식단, 촘촘한 복지 시스템, 그리고 상당히 이례적인 자연선택이다. 이 세 가지가 200년에 걸쳐 서로를 강화하며 작용했다.
치즈와 우유가 키웠다
네덜란드는 유제품 소비량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우유, 치즈, 요구르트는 네덜란드인의 식탁에서 빠지지 않는 주식이나 다름없다. 역사적으로 해상 무역으로 번성한 나라답게, 다른 나라보다 훨씬 이른 시기부터 고품질 단백질과 칼슘을 안정적으로 섭취했다.

키는 성장기 뼈가 얼마나 잘 발달하느냐에 달려 있다. 칼슘과 단백질은 그 핵심 원료다. 유제품을 어릴 때부터 풍부하게 먹어온 네덜란드 아이들은 뼈 성장에 필요한 영양소를 충분히 공급받아 왔다.
비교해보면 명확해진다. 한국인의 1인당 우유 소비량은 1970년 1.6kg에서 2013년 71.6kg으로 44.8배 늘었다. 같은 기간 한국인의 평균 키도 급격히 커졌다. 영양 상태 개선이 평균 신장 증가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한국의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복지가 아이들을 키웠다
20세기 중반 이후 네덜란드는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복지국가로 자리 잡았다. 보편적 의료보험, 촘촘한 모자보건 시스템, 아동 영양 지원 프로그램이 구석구석 갖춰졌다. 네덜란드 아이들은 성장기에 만성 감염이나 영양 결핍을 겪는 일이 드물었다.
이게 왜 중요한가. 성장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이 바로 어린 시절의 반복적 감염과 영양 부족이기 때문이다. 와헤닝언대학교와 라드바우드대학교 연구진에 따르면 19세기 네덜란드에서는 장기적·반복적 질병이 성인 신장 감소와 뚜렷한 상관관계를 보였다. 특히 어머니를 잃은 어린이는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작게 자랐다. 주양육자의 부재가 영양 공급과 정서적 안정 모두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복지 시스템이 이런 위험 요인을 하나씩 제거하면서 네덜란드 아이들은 유전자가 허용하는 최대치에 가깝게 자랄 수 있게 됐다.
키 큰 남자가 더 많이 낳아
가장 흥미롭고 논쟁적인 요인이 여기 있다. 바로 ‘자연선택’이다.
영국 왕립학회 학술지 '프로시딩스 B'에 2015년 실린 연구는 네덜란드 북부 3개 주 주민 9만4516명을 대상으로 1935년부터 1967년까지 30년에 걸쳐 신장과 출산율의 관계를 분석했다. 결론이 재미있다. 키 큰 남성이 키 작은 남성보다 평균적으로 더 많은 자녀를 뒀다. 효과의 크기는 크지 않았지만 통계적으로는 매우 유의미했다.
키 큰 남성은 첫 자녀를 갖는 시기가 키 작은 남성보다 늦었음에도, 최종적으로는 더 많은 자녀를 남겼다. 여성의 경우 평균 키 여성의 출산율이 가장 높았다. 즉, 키 큰 유전자가 세대를 거듭할수록 집단 내에서 조금씩 더 많이 퍼져나갔다.
흥미롭게도 미국에서는 이 패턴이 나타나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오히려 평균 키 남성이 가장 많은 자녀를 뒀다. 왜 네덜란드에서만 이런 패턴이 나타났는지는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연구자들은 이 자연선택이 영양·복지 개선의 효과를 보조하는 방식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자연선택만으로 200년간의 신장 증가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뮬레이션 연구에 따르면 자연선택만으로 이 증가를 설명하려면 평균보다 훨씬 큰 남성이 보통 남성보다 8배 더 많은 자녀를 낳았어야 한다.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
네덜란드인도 더는 안 큰다
세계 최장신 국가의 신장 증가는 이미 멈췄다. 네덜란드 응용과학연구기관(TNO)이 2013년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1997년 이후 네덜란드 어린이와 청소년의 평균 신장이 더는 늘지 않고 있다. 1955년부터 2009년까지 청소년 1만2000여 명을 추적한 결과, 2009년의 평균 최종 신장은 남성 183.8cm, 여성 170.7cm로 1997년과 거의 같았다.
오히려 최근에는 네덜란드 어린이들이 부모 세대보다 약간 작아지는 추세마저 감지되고 있다. 원인은 아직 불명확하다. 식단 질의 저하인지, 아동 비만의 증가인지, 아니면 단순히 유전적 최대치에 도달한 것인지 알 수 없다고 연구자들은 말한다. 관련 연구가 계속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인의 키는
한국의 사례는 네덜란드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더 극적이다.
영국 임페리얼칼리지 엘리오 리볼리 공중보건 학장이 이끄는 연구팀이 전 세계 200개국의 100년간 신장 변화를 분석한 결과, 한국 여성의 평균 키는 1914년 142.2cm에서 2014년 162.3cm로 100년 사이 20.1cm가 커져 증가 폭 세계 1위를 기록했다. 100년 전만 해도 200개국 중 다섯 번째로 키가 작은 나라였던 한국 여성이 2014년 기준 55번째로 키가 큰 나라로 뛰어올랐다. 한국 남성의 신장 증가 폭 15.1cm도 이란(16.5cm), 그린란드(15.4cm)에 이은 세계 3위였다. 순위로는 150위에서 51위로 급등했다.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 놀랍다. 서울대 의대 연구팀이 조선시대 유골 116구에서 채취한 넙다리뼈를 분석한 결과, 조선시대 남성 평균 신장은 161.1cm, 여성은 148.9cm였다. 이 수치가 15세기 초부터 19세기 말까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반면 같은 시기 서구 국가들의 남성 평균 신장은 네덜란드 166.7cm, 스웨덴 169.6cm, 영국 168.1cm, 미국 173.4cm로 한국보다 훨씬 컸다. 조선시대 한국인은 세계적으로도 키가 작은 편이었다.
그러다 20세기 들어 상황이 역전됐다. 1960년대 산업화와 함께 영양 상태가 개선되며 키 성장이 가속화됐고, 지난 100년간 세계 최고 속도로 키가 컸다. 1979년 산업통상자원부 국가기술표준원의 첫 조사 당시 한국 남성 평균 키는 166.1cm였지만 2021년 172.5cm로 6.4cm, 여성은 154.3cm에서 159.6cm로 5.3cm 늘었다.
그래도 네덜란드와는 11cm 차이
세계 최고 속도로 컸음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와의 격차는 좁혀지지 않고 있다. 한국 성인 남성 평균 172.5cm는 아시아 최상위권이지만, 183.78cm인 네덜란드와는 11cm 이상 차이가 난다. 한국 여성(159.6cm)과 네덜란드 여성(170.36cm)의 격차도 10cm를 넘는다.
간극이 왜 좁혀지지 않을까. 인간의 키는 유전과 환경이 모두 영향을 미친다. 개인 간 키 차이에 대한 유전의 영향은 상당히 큰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영양·의료·위생 환경이 개선될 경우 집단 평균 신장은 수십 년 사이에도 크게 변할 수 있다.
임페리얼칼리지 연구의 공동 저자 제임스 벤담은 "개인의 유전이 키에 큰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일단 전체 인구의 평균만 넘어서면 유전의 역할은 덜 중요해진다"며 "같은 환경에서라면 대부분 인구가 대략 비슷한 신장까지 성장한다"고 말했다. 다만 연구자들은 집단마다 평균적인 유전적 배경 차이가 존재할 가능성은 인정하면서도, 환경 개선이 신장에 미치는 영향 역시 매우 크다고 본다.
같은 유전자, 다른 키: 남북한 비교
한반도 내에서 신장을 가르는 가장 극적인 비교는 남북한 사이에 있다. 유전적 배경이 매우 유사한 집단인데도 수십 년의 경제적 격차가 신체에 고스란히 새겨졌다.

성균관대 스베켄디크 교수의 탈북민 조사에 따르면 탈북 남성의 평균 키는 같은 나이대의 남한 남성보다 평균 3~8cm 작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세대로 좁혀 보면 북한 20대 남성의 평균 신장은 최저 163~166cm 수준으로 추정된다. 2024년 전직 주 쿠바 북한대사관 참사 리일규는 "해외에서 아이를 키우기만 해도 5~10cm는 자란다"고 증언했다. 유전자는 같은데 환경이 신체를 갈라놓은 것이다.
한국인 키 성장, 이미 둔화됐다
한국 역시 신장 증가가 서서히 둔화하고 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20대 남성의 평균 신장 증가 속도가 뚜렷이 느려졌다. 이웃 일본은 이미 줄어드는 추세다. 일본 국립성장의료연구센터 연구에 따르면 일본인의 평균 신장은 1978~1979년을 정점으로 이후 조금씩 감소하고 있다. 저출생 체중아 증가가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한국은 아직 그 단계까지는 아니지만 증가 속도 자체가 미미해졌다. 연구자들은 한국이 영양·의료 환경 개선으로 얻을 수 있는 신장 증가분의 상당 부분을 이미 달성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달리 말하면, 한국인은 이미 자신들의 유전자가 허용하는 한계에 꽤 가까이 다가간 셈이다.
키는 아이들 돌봄에 대한 기록
신장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있다. 평균 신장은 단순히 '얼마나 큰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회가 어린이들에게 얼마나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라는 것이다.
네덜란드가 세계 최장신 국가가 된 것은 수백 년의 해상 무역으로 쌓은 풍요, 20세기에 구축한 촘촘한 복지 시스템, 그리고 어쩌면 키 큰 유전자가 세대를 거쳐 퍼져나가도록 작동한 사회적 선택의 결과물이다. 한국이 100년간 세계 최고 속도로 커진 것은 전쟁의 폐허에서 고도 성장으로 치달은 경제 발전의 생물학적 증거다.
숫자로 보면 명확하다. 한국인은 조선시대에 비해 남성이 약 15cm, 여성이 약 20cm 가까이 커졌다. 유전적 배경이 매우 유사한 집단이 먹고 사는 환경이 달라지자 이 정도로 달라졌다. 반면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크다는 네덜란드는 지금 아이들이 부모 세대보다 조금씩 작아지고 있다. 키는 결국 그 사회가 어린이를 어떻게 먹이고 돌봤는지에 대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