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허물 때 시간을 붙잡은 마을…우리나라 산업화 뿌리였던 '이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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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 철암탄광역사촌, 까치발 건물 따라 걷는 탄광촌 여행

가파른 산세 사이로 흐르는 좁은 하천 옆으로 낡은 건물들이 위태롭게 늘어서 있다. 한때 대한민국 경제 성장의 심장부로 불리며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이던 이곳은, 이제 적막함 속에서 과거의 시간을 품고 있다. 화려한 도심의 불빛 대신 투박한 시멘트벽과 빛바랜 간판이 먼저 말을 거는, 오래된 마을의 풍경이다.

철암탄광역사촌 / ⓒ한국관광콘텐츠랩-이관우
철암탄광역사촌 / ⓒ한국관광콘텐츠랩-이관우

까치발 건물이 품은 탄광촌의 시간

철암천을 따라 걷다 보면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하천 바닥에 지지대를 박고 선 독특한 건물들이다. 주거 공간이 부족했던 시절, 탄광으로 모여든 광부와 가족들은 조금이라도 넓은 방을 마련하기 위해 하천 쪽으로 기둥을 세우고 건물을 덧댔다. 그 모습이 까치의 발처럼 보인다고 해 ‘까치발 건물’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석탄 산업의 전성기를 보여주는 이 건축 양식은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삶을 이어갔는지 말해준다.

철암탄광역사촌   / 태백시-태백관광 홈페이지
철암탄광역사촌 / 태백시-태백관광 홈페이지

멀리서 보면 문을 닫은 상가들이 줄지어 선 듯하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전혀 다른 풍경이 이어진다. 겉모습은 옛 모습을 살리고 내부를 전시 공간으로 꾸민 철암탄광역사촌은 건물 자체가 유물처럼 남아 있다. 까치발 기둥은 오랜 세월의 무게를 견디며 오늘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벽면에는 주름 같은 금이 가 있고 페인트는 군데군데 벗겨졌지만, 그 흔적까지 이곳의 시간을 이루는 일부가 됐다.

철암탄광역사촌 / ⓒ한국관광콘텐츠랩-이관우
철암탄광역사촌 / ⓒ한국관광콘텐츠랩-이관우

옛 간판 너머로 이어지는 광부의 하루

내부 전시관은 당시 생활상을 공간으로 재현한다. 한양다방, 호남슈퍼, 제일제과 등 옛 간판을 단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좁은 계단과 낮은 천장이 나타난다. 광부들이 퇴근 뒤 고단함을 달래던 선술집에는 막걸릿잔을 앞에 두고 마주 앉은 인물 모형이 놓여 있다. 곧 대화가 이어질 것 같은 분위기다. 다방과 슈퍼, 제과점이 한데 모인 풍경은 탄광촌의 하루가 일터에서만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당시 광부들이 쓰던 도시락과 작업복, 안전모에 달린 작은 전등은 지하 막장에서 보냈을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철암탄광역사촌 / 한국관광공사 (촬영 : 이범수)
철암탄광역사촌 / 한국관광공사 (촬영 : 이범수)

벽면에 걸린 낡은 사진 속 젊은 광부들의 얼굴에서는 한 시대를 지탱한 노동의 무게가 읽힌다. 이 공간은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기록이자, 잊지 말아야 할 사람들에 대한 예의다. 전시관 곳곳에는 예술가들의 작품도 설치돼 있다. 석탄을 주제로 한 현대미술, 탄광촌 풍경을 담은 사진은 과거의 기억에 차분한 감성을 더한다. 좁은 복도를 따라 전시는 건물을 옮겨 가며 이어지고, 건물마다 구조가 조금씩 달라지는 점도 눈에 띈다. 필요에 따라 덧대고 고쳐 쓰던 탄광촌의 생활 방식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철암탄광역사촌 / ⓒ한국관광콘텐츠랩-이관우
철암탄광역사촌 / ⓒ한국관광콘텐츠랩-이관우

보존의 선택이 남긴 오래된 풍경

철암역 주변을 걷다 보면 정비된 도로와 횡단보도 너머로 낡은 탄광촌 건물이 마주 선다. 철암탄광역사촌 입구 기념비에는 남겨야 할지, 부수어야 할지를 논하는 사이 한국 근현대사의 유구들이 무수히 사라졌다는 취지의 문구가 새겨져 있다. 실제로 이곳은 개발과 보존의 갈림길에서 고민 끝에 살아남은 장소다. 그래서 반듯하게 새로 꾸민 관광지와는 결이 다르다. 모두 허물고 새 건물을 세우는 대신, 불편하고 낡은 모습을 남겨둔 선택이 오늘의 역사촌을 만들었다.

강원특별자치도 태백시 철암동에 자리한 이곳은 주변의 현대적인 시설과 역사촌의 풍경이 어우러져, 가까운 거리에서도 서로 다른 시간대를 걷는 듯한 인상을 준다. 새것과 오래된 것이 나란히 놓인 장면은 철암이 지나온 변화를 한눈에 보여준다.

이곳은 별도의 입장료 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으며, 운영 시간은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다. 매월 첫째·셋째 월요일은 휴관하며, 현장 상황에 따라 세부 운영이 달라질 수 있으니 방문 전 일정을 미리 확인하면 좋다.

철암탄광역사촌   / 한국관광공사 (촬영 : 이범수)
철암탄광역사촌 / 한국관광공사 (촬영 : 이범수)

드라마 촬영지가 된 옛 탄광 부지

철암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구 한보탄광 부지가 있다. 드라마 ‘태양의 후예’ 촬영지로 알려진 뒤 많은 사람이 찾는 장소가 됐다. 극 중 가상 지역인 우르크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조성된 세트장에는 메디큐브와 태백부대 막사, 무너진 발전소 건물이 남아 있다. 광산의 거친 지형은 드라마 속 배경과 어우러져 낯선 분위기를 만든다. 세트장 곳곳에는 촬영 당시의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구조물이 남아 있어 사진을 남기며 천천히 둘러보기 좋다.

이곳에는 드라마의 또 다른 촬영지였던 그리스 자킨토스섬과의 인연을 기념하는 자킨토스관도 조성돼 있다. 검은 탄광 유적과 그리스의 푸른 바다 이미지가 한 공간에서 만나는 점이 이색적이다. 역사와 드라마, 해외 촬영지의 이미지가 겹치며 옛 광산 부지에 새로운 볼거리를 더한다. 부지 한쪽에서는 갱차가 갱도를 따라 움직이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탄광의 폐허 위에 남은 대중문화의 흔적은 이 장소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게 한다.

구문소에서 만나는 고생대의 흔적

탄광의 역사를 살폈다면 태백의 자연으로 시선을 돌릴 차례다. 철암역에서 차로 10분 거리에는 태백고생대자연사박물관과 구문소가 있다. 짧은 이동만으로 탄광촌의 근현대사에서 고생대 지층의 세계로 장면이 바뀐다. 구문소는 하천 지형 전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곳으로, 황지천의 물살이 산을 뚫고 지나가며 만든 거대한 석문이 인상적이다. 삼엽충 화석 등이 발견되는 이 일대는 지질학적으로도 가치가 크다.

구문소   / 한국관광공사 (촬영 : 김지호)
구문소 / 한국관광공사 (촬영 : 김지호)

박물관 내부는 지구의 탄생부터 고생대 생태계까지의 과정을 차례로 보여준다. 아이와 함께 들러도 이해하기 쉬운 전시가 많아 가족 일정에도 부담 없이 넣을 수 있다. 절벽 아래로 흐르는 물줄기와 암석의 결은 자연이 쌓아 올린 시간을 실감하게 한다. 탄광촌이 사람이 만든 역사라면 구문소는 지구가 남긴 기록에 가깝다. 주변 산책로를 걷다 보면 암석에 새겨진 물결무늬 화석과 소금 결정 자국 등을 관찰할 수 있다. 수억 년 전 이곳이 바다였음을 보여주는 흔적들이다.

두 강의 물길이 시작되는 도시

태백 시내 중심부에는 낙동강 1300리 물길의 시작점인 황지연못이 있다. 연못 바닥에서는 하루 5000톤 이상의 맑은 물이 솟아나고, 이 물은 영남 평야를 지나 남해로 향한다. 황 부자의 집터였다는 전설을 품은 이 연못은 도심 속에 자리해 시민과 방문객이 쉬어 가는 공간이기도 하다.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도 태백에서 빼놓기 어렵다. 금대봉 기슭의 검룡소에서는 하루 2000톤가량의 지하수가 솟아 서해로 향하는 물길을 시작한다. 숲길을 따라 약 1.3㎞ 걸으면 작은 샘이 모습을 드러낸다. 길은 비교적 완만해 천천히 걷기 좋고, 나무 그늘이 이어져 계절의 변화를 느끼기에도 좋다. 사계절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맑은 물이 이끼 낀 바위 사이로 흐르는 풍경은 태백이 품은 생명력을 보여준다.

탄광의 기억이 담긴 태백의 맛

태백의 음식에는 광부들의 생활 문화가 스며 있다. 대표 음식은 태백 물닭갈비다. 일반적인 닭갈비와 달리 국물이 자작한데, 광부들이 지하에서 들이마신 탄가루를 씻어내기 위해 국물 있는 음식을 즐겼다는 이야기가 이어져 온다. 쑥갓과 냉이 등 채소를 넣고 라면이나 쫄면 사리를 더해 끓이는 방식은 태백에서 만나는 별미다. 국물은 칼칼하면서도 묵직해 추운 계절에 특히 찾기 좋다.

태백은 고원 지대의 서늘한 기후 덕분에 한우로도 이름나 있다. 과거 광부들이 임금을 받으면 찾던 실비식당도 시내 곳곳에 남아 있다. ‘실비’는 이익을 많이 남기지 않고 실제 비용에 가깝게 판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연탄불에 구워 먹는 등심과 갈빗살, 식사 뒤 곁들이는 소면이나 된장소면은 든든한 마무리가 된다.

메밀 음식도 태백의 정취를 담고 있다. 척박한 땅에서 잘 자라는 메밀은 강원도 사람들에게 오래전부터 소중한 식재료였다. 얇게 부친 메밀전, 김칫소를 채운 메밀전병, 투박한 손맛이 느껴지는 콧등치기국수는 부담 없이 맛보기 좋다. 고랭지 배추로 담근 김치의 아삭하고 시원한 맛도 식탁을 풍성하게 한다.

철암역 앞에서 시작되는 근현대사 여행

철암탄광역사촌은 경상북도 봉화와 강원도 태백을 잇는 영동선 철암역 바로 앞에 있어 기차로 찾아가기 좋다. 역사를 빠져나오면 곧바로 1960년대 탄광촌의 풍경이 이어진다. 열차 시간에 맞춰 동선을 짜면 철암역과 역사촌, 철암시장을 무리 없이 둘러볼 수 있다. 마을 전체가 박물관처럼 남은 이곳은 화려한 볼거리보다 차분히 걷고 살피기에 좋은 장소다. 하천을 따라 난 길을 천천히 걸으면 건물의 높이와 간격, 창문의 위치까지 당시 생활의 조건을 말해주는 단서가 된다.

철암역 / 한국관광공사 (촬영 : 이범수)
철암역 / 한국관광공사 (촬영 : 이범수)

관람 뒤에는 역사촌 건너편 철암시장을 둘러봐도 좋다. 규모는 크지 않은 편이지만 산나물, 감자떡 등 지역의 색채가 묻어나는 물건을 만날 수 있다. 역사촌 내부에는 식당이 따로 없으므로 인근 시장이나 태백 시내 식당을 이용하면 된다. 주차는 역사촌 입구 근처 공영주차장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어 편하다.

철암탄광역사촌을 떠나며 뒤돌아보면 거대한 선탄 시설이 여전히 서 있다. 석탄을 선별하고 기차에 싣던 이 시설은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검은 먼지가 날리던 시절은 멀어졌지만, 남아 있는 시설물들은 이곳이 대한민국 근대화의 한 축이었음을 묵묵히 보여준다.

누군가에게는 가난했던 시절의 기억이고, 누군가에게는 뜨거웠던 청춘의 무대였을 이곳은 우리가 지나온 길을 돌아보게 한다. 화려한 장식은 없지만 태백의 공기처럼 깊이가 있는 여정이다. 까치발 건물 아래로 흐르는 철암천의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오래된 마을이 품은 삶의 결이 천천히 다가온다. 태백의 여행은 그렇게 검은 석탄의 기억과 맑은 물의 시작을 함께 걷는 시간으로 남는다.

철암탄광역사촌 / 구글 지도
home 양주영 기자 zoo123@wikitre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