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전시처럼 보고, 산책하듯 읽는다… 요즘 독서 공간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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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접하는 방식의 변화, 경험의 공간이 된 서가
산책하듯 책을 발견하는 독특한 독서 공간

서울 송파구 잠실나루역 인근에 자리한 서울책보고. 문을 열고 들어서자 원형 서가 사이를 천천히 걷는 시민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는 책을 집어 들고 곧바로 읽고, 또 다른 이는 문장 앞에 잠시 멈춰 선다. 이곳에서 책은 단순히 구매하거나 대출하는 대상이 아니라 걷고 머물며 발견하는 경험의 일부로 제시되고 있었다.

서울 송파구에 자리한 서울책보고 '페이지 산책' 기획전 현장. / 위키트리
서울 송파구에 자리한 서울책보고 '페이지 산책' 기획전 현장. / 위키트리

최근 독서 공간은 조용히 책을 읽는 장소를 넘어 책을 매개로 취향과 감각을 발견하는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다. 책을 끝까지 읽는 방식만으로 지금의 책문화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문장과 표지, 큐레이션, 공간 경험을 통해 책을 접하는 방식은 더 다양해지고 있다.

서울책보고에서 진행 중인 봄 기획전 ‘페이지 산책’은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다. 이곳에서는 책장을 넘기기 전, 서가를 따라 걷는 순간부터 독서가 시작된다.

책장을 넘기기 전, 서가 사이를 걷다

서울책보고 봄 기획전 '페이지 산책'. / 위키트리
서울책보고 봄 기획전 '페이지 산책'. / 위키트리

서울책보고 ‘페이지 산책’은 ‘책과 함께하는 느린 산책’을 주제로 기획된 전시다. 서울책보고의 상징인 원형 서가를 중심으로 여러 출판사의 도서가 각자의 색깔에 맞춰 배치됐다.

이번 전시는 단순히 책을 진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관람객이 서가를 따라 천천히 걷고, 문장을 마주하고, 마음에 드는 책 앞에 머물도록 구성됐다. 특정 장르를 찾아가는 방식이라기보다, 지금의 감정이나 상태에 맞는 책을 우연히 발견하는 방식에 가깝다.

이를 위해 공간 구성도 하나의 산책 동선처럼 느껴지도록 설계됐다. 원형 서가를 따라 이동하다 보면 서로 다른 분위기의 책과 문장을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된다.

서울책보고 ‘페이지 산책’ 기획전에서 각 출판사별 도서가 큐레이션 형태로 전시돼 있다. / 위키트리
서울책보고 ‘페이지 산책’ 기획전에서 각 출판사별 도서가 큐레이션 형태로 전시돼 있다. / 위키트리

특히 메인 큐레이션은 출판사 김영사와 함께 구성됐다. ‘페이지 산책’이라는 큰 주제 아래 김영사의 대표 도서들이 산책 풍경에 따라 나뉘어 배치됐다. 서가마다 하나의 산책 장면을 연상시키는 소주제가 붙어 있어, 관람객은 책을 장르가 아닌 분위기와 감각으로 먼저 만난다.

이 전시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책이 놓였는가보다, 책이 어떤 방식으로 독자 앞에 놓였는가다. 관람객은 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서가 사이를 걷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마주치는 방식으로 경험하게 된다.

‘쉬는 날 읽고 싶은 책’을 고르는 방식

서울책보고 ‘데이 오프 모드’ 코너. (왼) 김민경 편집자 추천 도서, (오) 물리학자 김상욱 추천 도서. / 위키트리
서울책보고 ‘데이 오프 모드’ 코너. (왼) 김민경 편집자 추천 도서, (오) 물리학자 김상욱 추천 도서. / 위키트리

원형 서가 한편에는 이번 기획전의 주요 섹션 중 하나인 ‘데이 오프 모드(DAY OFF MODE)’ 코너가 마련돼 있었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온전히 휴식을 즐기는 날 읽으면 좋을 책을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직접 추천했다.

이 섹션에는 물리학자 김상욱, 민음사 편집자 김민경, 소설가 백명옥, 이훤 작가 등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이 참여했다. 이처럼 추천자의 직업과 취향, 휴식 방식이 책 소개에 함께 담기면서 독자는 단순히 ‘좋은 책’이 아니라 ‘누군가의 쉬는 날에 함께하고 싶은 책’을 마주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민음사 김민경 편집자의 추천 도서가 눈길을 끌었다. 최근 독자들 사이에서 ‘출판계의 아이돌’로 불리는 김 편집자는 그림책 ‘야옹이 수영 교실’을 추천했다.

이 책은 물을 무서워하는 야옹이가 친구들이 즐겁게 수영하는 모습을 보고 용기를 내 수영 교실에 등록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처음에는 물에 발을 담그는 것조차 어려워하던 야옹이는 선생님과 친구들의 응원 속에서 조금씩 두려움을 넘어선다.

귀여운 그림체와 성장 서사가 함께 담긴 이 책은 ‘쉬는 날 가볍게 펼쳐볼 수 있는 책’이라는 전시 콘셉트와도 잘 맞닿아 있었다. 김 편집자는 소개글을 통해 “정말 이것보다 귀여운 게 세상에 더 있을까 싶습니다. 내용도 무척 의미 있습니다. 모두에게 강력히 추천합니다!”라고 전했다.

맞은편에는 물리학자 김상욱의 추천 도서도 놓여 있었다. 그는 자신이 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을 추천했다. 이 책은 우주와 인간이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 조망하며, 차갑게 느껴질 수 있는 우주를 물리학자의 시선으로 따뜻하게 풀어낸다.

결국 ‘데이 오프 모드’는 이번 전시의 방향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치다. 책을 반드시 공부하거나 완독해야 하는 대상으로 두기보다 쉬는 날의 기분과 지금 마음에 따라 가볍게 꺼내볼 수 있는 대상으로 제안하기 때문이다.

커피 한 잔과 빈백, 책을 머무르게 하는 장치들

빈백에 앉아 독서를 즐기고 있는 시민들 모습. / 위키트리
빈백에 앉아 독서를 즐기고 있는 시민들 모습. / 위키트리
서울책보고 ‘페이지 산책’ 기획전에 마련된 문학동네 동시집 전시. / 위키트리
서울책보고 ‘페이지 산책’ 기획전에 마련된 문학동네 동시집 전시. / 위키트리

서가 뒤편에는 시민들이 편하게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었다. 푹신한 빈백에 기대앉은 시민은 커피 한 잔을 옆에 두고 책장을 넘겼다. 혼자 조용히 책을 읽는 사람도 있고, 함께 온 이와 책을 골라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민도 있다.

서가 안쪽 카페로 향하는 길목에는 문학동네 동시집 코너가 자리했다. 문학동네는 이번 전시에서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이를 위한 동시’를 주제로 큐레이션 서가를 구성했다. 아기자기한 제목과 표지는 지나가던 시민의 발걸음을 자연스럽게 붙잡았다.

이처럼 ‘페이지 산책’은 책을 읽는 행위 자체보다 책과 가까워지는 과정을 강조한다. 책을 고르고, 문장을 보고, 잠시 앉아 쉬고, 다시 서가를 걷는 시간이 하나의 독서 경험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이곳에서 독서는 더 이상 책상 앞에서만 이뤄지는 일이 아니라, 공간 안에서 천천히 시작되는 경험으로 확장된다.

“읽어야 하는 책보다, 스며드는 책을 만나길 바랐다”

김서연 서울책보고 기획콘텐츠운영팀 과장은 이번 전시가 봄이라는 계절감과 서울책보고의 공간적 특성에서 출발했다고 밝혔다.

김 과장은 “‘페이지 산책’은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많은 분들이 바깥으로 나들이를 떠나듯, 책을 읽는 시간 역시 더 가볍고 편안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된 기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독서가 종종 ‘무언가를 배워야 하는 시간’처럼 받아들여진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는 목적이 분명한 독서보다, 서가에 머물며 천천히 자신의 속도로 쉬어가는 경험을 만들고자 했다.

김 과장은 “서울책보고 공간 자체가 긴 서가를 따라 걸으며 책을 발견하는 구조”라며 “‘산책하듯 책 사이를 걷는 경험’을 하나의 전시 테마로 연결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지난 14일 오후 서울책보고 원형 서가 사이에서 시민들이 책을 읽고 있다.     / 위키트리
지난 14일 오후 서울책보고 원형 서가 사이에서 시민들이 책을 읽고 있다. / 위키트리

전시명에 담긴 ‘산책’의 의미도 같은 맥락이다. 김 과장은 산책을 “어디에 도착하기 위한 행위라기보다, 천천히 걸으며 풍경을 바라보고 스스로의 호흡을 회복하는 시간”으로 봤다.

그는 독서 역시 산책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반드시 많은 책을 읽거나 정답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문장에 오래 머물고 예상치 못한 책을 발견하며 자신의 감각을 환기하는 경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번 전시는 ‘읽어야 하는 책’보다 ‘지금의 나에게 편안하게 스며드는 책’을 만나는 경험에 집중했다. 각 서가에는 하나의 산책 장면처럼 느껴지는 소주제가 붙었다. 독자가 책을 장르가 아니라 분위기와 감정의 흐름에 따라 마주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서가에는 문학, 에세이, 마음챙김, 철학, 교양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이 함께 놓였다. 다만 전시는 장르별 분류보다 감정과 분위기의 흐름에 초점을 맞췄다.

그는 “독자들이 책의 장르보다 지금 자신의 감정이나 상태에 따라 서가를 천천히 거닐 수 있도록 구성한 점이 이번 전시의 특징”이라고 강조했다.

서울책보고. / 뉴스1
서울책보고. / 뉴스1

서울책보고가 시민들에게 제공하고 싶은 독서 경험도 단순한 열람이나 구매에 머물지 않는다.

김 과장은 “예전에는 책문화 공간이 책을 읽거나 구매하는 장소의 의미가 강했다면, 지금은 사람들이 자신의 취향과 관심사를 발견하고 공유하는 ‘경험의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독서는 본래 개인적인 행위지만, 최근에는 전시와 북토크, 프로그램, 체험 요소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는 경험으로도 확장되고 있다. 책문화 공간이 단순히 책을 보관하거나 판매하는 장소를 넘어, 책을 매개로 사람과 취향이 만나는 장소가 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또 책을 접하는 진입장벽을 낮추는 역할도 중요하다고 봤다. 김 과장은 “꼭 독서를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공간을 구경하다 우연히 책에 관심을 갖게 되거나 프로그램 참여를 계기로 자연스럽게 독서와 가까워지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이어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공간 형태의 변화라기보다, 책과 독자가 만나는 방식 자체가 다양해지고 있다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서울책보고. / 뉴스1
서울책보고. / 뉴스1

김 과장은 이번 전시가 바쁜 일상 속 작은 쉼의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그는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속도를 늦추고 싶을 때, 서울책보고에서 천천히 책 사이를 산책하듯 걸어보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꼭 특별한 목적이 없어도 괜찮다”며 “예상하지 못했던 책 한 권이나 문장 하나가 생각보다 오래 마음에 남는 순간이 있다. 이번 ‘페이지 산책’ 전시가 많은 분들에게 그런 작은 쉼의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독서의 패러다임 변화... ‘완독’에서 ‘경험’으로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 마련된 '서울야외도서관 광화문책마당'에서 시민들이 책을 읽고 있다.  / 뉴스1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 마련된 '서울야외도서관 광화문책마당'에서 시민들이 책을 읽고 있다. / 뉴스1

서울책보고 ‘페이지 산책’이 보여주는 변화는 단순히 전시 형식의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책을 대하는 방식 자체가 ‘완독’에서 ‘경험’으로 넓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의 독서는 한 권을 끝까지 읽고 내용을 이해하는 행위에 가까웠다. 서점과 도서관 역시 책을 고르고, 조용히 읽는 공간의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최근의 책문화 공간은 조금 달라지고 있다. 책을 읽기 전 표지와 소개글을 먼저 살피고 공간에 머물며 자신의 취향과 감각에 맞는 책을 발견하는 방식이 중요해지고 있다. 특히 어떤 공간에서 책을 마주하는지는 개성을 드러내는 방식이 된다. 이처럼 책은 지식을 얻는 도구를 넘어, 자신의 관심사와 감각을 표현하는 매개가 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의 배경에는 빠르고 자극적인 디지털 콘텐츠 소비에 대한 피로감도 자리한다. 짧은 영상과 실시간 알림에 익숙한 일상 속에서 책은 오히려 속도를 늦추는 매체가 된다. 조용한 공간 안에서 한 문장에 머물고 자신의 호흡을 되찾는 행위는 디지털 콘텐츠와 다른 감각을 제공한다.

결국 독서의 변화는 책을 덜 읽게 됐다는 위기론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책을 만나는 입구가 넓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문장과 한 공간, 한 번의 머무름을 통해 책과 가까워지는 방식은 이제 새로운 독서 경험으로 자리 잡고 있다.

멋진 공간보다 중요한 것, 다시 책을 펼치게 하는 힘

서울 청계천에서 열린 서울야외도서관. / 뉴스1
서울 청계천에서 열린 서울야외도서관. / 뉴스1

물론 경험형 독서 공간이 긍정적인 면만 갖는 것은 아니다. 책이 전시와 공간 경험의 일부가 될수록 책의 내용보다 공간의 분위기나 시각적 요소가 먼저 소비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책이 사진을 찍기 좋은 배경이나 감각적인 소품으로만 남는다면, 공간이 가진 의미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전시와 체험이 실제 독서로 이어지는 구조다. 보기 좋게 배치된 책을 넘어 시민이 자연스럽게 책을 펼치고 문장을 읽고 다시 책을 찾게 만드는 장치가 필요하다. 짧은 독서 모임, 북토크, 작가와의 만남 등 다양한 공간 경험을 독서 경험으로 이어주는 방법이 될 수 있다.

결국 경험형 독서 공간의 성패는 ‘얼마나 멋진 공간인가’보다 ‘얼마나 자연스럽게 책을 다시 펼치게 하는가’에 달려 있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독서가 낯선 사람도 부담 없이 들어와 한 권의 책과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될 때 이러한 변화는 더 큰 의미를 갖는다.

한 문장 앞에 멈추고, 서가 사이를 걷고, 우연히 발견한 한 권을 마음에 담는 일 역시 오늘날 독서의 한 방식이 되고 있다. 이 같은 공간의 확장은 독서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책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다. 뚜렷한 목적 없이 공간을 찾은 시민도 전시를 둘러보다 한 권의 책을 발견할 수 있고, 짧은 문장 하나를 통해 독서에 대한 부담을 낮출 수 있다.

걷고, 보고, 머물고, 대화하며 책과 가까워지는 방식도 독서가 될 수 있다. 어떤 날에는 서가 사이를 걷다 마주친 한 문장만으로도 충분하다. 독서가 다시 시작되는 순간은 꼭 책상 앞이 아니라, 천천히 머물 수 있는 공간 안에서도 찾아온다.


home 이서희 기자 sh0302@wikitre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