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 하이닉스 본사에 근무하는 30살 여성의 책상에 '감자'가 있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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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에서 시작된 안정, 반도체 회사 하이닉스의 색다른 풍경

KBS2 '다큐멘터리 3일'이 이천 SK하이닉스 공장 안으로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지난 11일 '처음 만난 세계 – 이천 SK하이닉스 72시간' 편이 방영됐다. HBM이 세계 반도체 시장을 흔들고, 주가는 연일 신고가를 갈아치우는 지금. 뉴스에서 쏟아지는 화려한 숫자의 이면, 그 공장 안에서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72시간을 카메라는 따라갔다.
SK 하이닉스 직원 책상에 놓인 감자. / 유튜브 'KBS 다큐'
SK 하이닉스 직원 책상에 놓인 감자. / 유튜브 'KBS 다큐'

점심도 못 먹는 책상, 감자 한 알의 사연

이날 방송에서는 점심시간이 됐지만 자리를 뜨지 않는 SK하이닉스 사무실 한 팀의 모습이 그려졌다. 카메라가 책상 앞에서 끼니를 때우는 이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배 안 고프세요?" 서른 살 시스템 엔지니어 이지호 씨가 담담하게 답했다. "원래 퇴근하면 좀 배가 고프고, 때로는 배가 잘 안 고파요."

이유를 묻자 그는 웃으며 덧붙였다. "아직 4년차인데, 아직도 회사에서 긴장을 하는 것 같아요."

그때 카메라에 잡힌 것이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감자 한 알. 평범한 소품 같지만, 그 안에는 꽤 구체적인 고백이 담겨 있었다.

"취업하고 나서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선배님들은 바빠서 이것저것 척척 하시는데, 질문도 못 하고, 그렇다고 그냥 놀면 안 되니까 이걸 켰다 저걸 켰다 하면서 멍때리고 있는 모습이에요. 너무 감자 같아서요. 왜 이것밖에 못 하지, 그런 생각이 들 때 저걸 보고 '저 감자보다는 낫지'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사회초년생이라면 한 번쯤 겪어봤을, 그러나 좀처럼 꺼내기 힘든 이야기였다. 이 감자는 자책이 아니라 버티기 위한 도구였다.

이천 SK 하이닉스 시스템 엔지니어 인터뷰 장면. / 유튜브 'KBS 다큐'
이천 SK 하이닉스 시스템 엔지니어 인터뷰 장면. / 유튜브 'KBS 다큐'

반도체 회사에 오기까지, 그 캄캄한 시간

이 여성 직원의 이력은 단순하지 않았다. SK하이닉스 이전, 그는 IT 서비스 스타트업에서 일했다. 플랫폼을 만들고 사업을 꾸렸지만 결국 실패했다.

"엄마 아빠랑 같이 사는데, 밤에 소리가 날까봐 소주 페트병을 몰래 사 가지고 엄마 아빠 주무신지 확인하고, 방문 잠가 놓고 혼자 몰래 마셨어요. 근데 엄마는 아신 것 같아요."

이른 나이에 경험한 사업 실패. 누구에게도 제대로 말하지 못한 채 혼자 버텼던 밤들. 그 시간을 지나 그는 이천 SK하이닉스에 입사했다.

"여기 와서 보니까 엄청 큰 회사가 엄청 많은 시스템으로 굴러가고, 공장 하나도 똑똑한 사람들이 촘촘히 맡고 있으니까 든든했어요. 앞으로도 터널이 또 올 것 같긴 한데, 언젠간 올 거고, 오면 또 잘 지나가야지 하고 생각해요."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저 감자보다는 조금 낫죠."
SK 하이닉스 직원 책상에 놓인 감자, 시선집중. / 유튜브 'KBS 다큐'
SK 하이닉스 직원 책상에 놓인 감자, 시선집중. / 유튜브 'KBS 다큐'

SK하이닉스, 지금 왜 이 회사인가

다큐멘터리가 SK하이닉스를 찾은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거운 기업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AI 시대 핵심 부품으로 부상한 HBM(고대역폭메모리) 시장에서 SK하이닉스는 세계 최고 수준의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다. 엔비디아의 AI 가속기에 탑재되는 HBM 물량의 상당 부분을 SK하이닉스가 공급하면서 실적과 주가 모두 고점을 경신하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정작 그 공장 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 대중은 잘 모른다. '다큐멘터리 3일'이 들어간 건 바로 그 지점이었다. 화려한 숫자 뒤에 있는 일상, 긴장과 실수와 성장이 뒤엉킨 현장의 72시간.

반도체 공장 직원들이 실제로 사는 방식

이천 SK하이닉스 공장은 단순한 생산 시설이 아니다. 수만 명의 직원이 교대 근무로 24시간 가동되는 구조다. 클린룸 안에서의 작업은 외부와 철저히 차단되고, 개인 소지품도 엄격히 통제된다.

이런 환경 속에서 직원들이 느끼는 긴장감은 단순히 업무 강도의 문제가 아니다. 실수 하나가 수십억 원짜리 웨이퍼를 망가뜨릴 수 있는 공정 구조, 선배에게 쉽게 질문을 던질 수 없는 분위기, 자신이 뭘 모르는지조차 파악하기 어려운 초반의 혼란. 4년차인데도 점심을 넘기며 긴장한다는 고백은 그 맥락에서 읽힌다.

이천 SK 하이닉스 사무실 풍경. / 유튜브 'KBS 다큐'
이천 SK 하이닉스 사무실 풍경. / 유튜브 'KBS 다큐'
이천 SK 하이닉스. / 구글 지도

그렇게 빡빡한 환경에서도 사람들은 왜 이 회사를 택하고, 버틸 수 있는 걸까. 직원들의 답은 "든든함"이었다. 실패를 경험한 뒤 혼자 떠맡지 않아도 되는 구조, 촘촘하게 맞물린 시스템 안에 있다는 안도감. 스타트업의 자유와 불안정을 겪은 사람이 대기업 공장에서 찾은 감각이었다.

'다큐멘터리 3일'이 반도체 공장을 택한 이유

'다큐멘터리 3일'은 특정 공간에 72시간 머물며 그 안의 사람과 일상을 기록하는 장수 다큐 프로그램이다. 군부대, 119 구조대, 전통시장, 요양원 등 우리가 존재는 알지만 내부를 잘 모르는 공간을 주로 다뤄왔다.

이번 이천 SK하이닉스 편은 그 연장선에 있다. 대한민국 경제 뉴스의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 안에 들어가 본 사람은 극히 드문 공간. 반도체 공장 특유의 보안과 통제 때문에 촬영 자체가 쉽지 않았을 텐데, 방영이 성사된 만큼 그 내부를 들여다볼 드문 기회가 됐다.

'다큐멘터리 3일'이 포착한 건 생산량이나 기술 사양이 아니었다. 점심을 거르는 직원, 책상 위 감자, 실패 끝에 이 공장에 닿은 한 사람의 이야기였다. 반도체 산업을 이야기할 때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얼굴들이다.

유튜브, KBS 다큐
home 권미정 기자 undecided@wikitre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