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락과 섬진강을 잇는 생태계의 보고가 있다. 거대한 평사리 황금 들녘을 병풍처럼 두르고 서 있는 이곳은 소설 '토지'의 무대로 알려지며 많은 이의 발길을 머물게 한다.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 산책로와 평화로운 물결은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더할 나위 없는 안식처를 제공한다.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들판 한복판에 자리한 동정호는 하동의 필수 여행 코스로 자리를 잡았다.
동정호라는 이름은 중국 후난성에 위치한 거대 호수인 둥팅호에서 유래했다. 서기 660년 나당연합군의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백제를 침공하러 가던 중 악양의 풍광을 마주했다.
소정방은 지리산 줄기가 감싸 안은 지형과 들판의 너른 모습이 중국의 악양 및 동정호와 닮았다고 여겼다. 그는 이곳의 지명을 악양이라 명명하고 호수 역시 동정호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예로부터 동정호는 평균 수심이 약 1m 정도로, 깊지 않았으나 청둥오리와 붕어가 공존하는 천연의 생태 공간이었다. 세월이 흐르며 호수 주변이 논으로 개간돼 면적이 줄어드는 부침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하동군은 2015년부터 대대적인 생태 보전 사업을 벌여 호수 면적을 5만 6000㎡까지 다시 넓혔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동정호는 고대부터 이어져 온 상징성을 간직한 채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동정호, 경남 3호 지방정원 등록
7일 악양 동정호가 경남도 제3호 지방정원으로 공식 등록됐다.
하동군은 동정호가 지닌 생태적 가치와 지역 역사·문화가 어우러진 공간으로서 잠재력, 그동안 하동이 추진해 온 체계적 정원 조성 노력을 종합적으로 인정받아 지방정원으로 등록됐다고 설명했다.
이로써 동정호는 2021년 '거창창포원', 지난달 '월아산 숲속의 진주'에 이어 경남에서 세 번째로 지방정원에 선정됐다.
지방정원은 지자체가 조성·운영하는 공공정원으로 면적 10만㎡ 이상, 녹지 비율 40% 이상 확보와 함께 편의시설, 전담 조직, 관련 조례 등 엄격한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군은 동정호의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전통·문화정원, 토지와 꽃 정원, 왕버들숲정원, 녹차정원, 습지정원 등 다양한 테마 공간을 조성했다.
향후에는 기존 습지 환경을 최대한 보존하며 탐방로와 휴식 공간을 정비하고, 자연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할 계획이다.
생명을 품은 습지에서 만나는 느림의 미학

동정호는 섬진강과 지리산 육상 생태계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한다. 호수 일대에는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인 금개구리와 남생이가 서식하는 등 자연의 건강함을 보여준다. 특히 매년 2월 말이면 인근 산에서 내려온 두꺼비들이 집단으로 산란하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하동군은 동정호를 생태 습지원으로 확대 조성해 두꺼비와 산개구리의 산란지를 보호하고 있다. 이처럼 동정호는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아이들에게는 살아있는 생태 교육의 장이 되고 어른들에게는 생명의 경이로움을 일깨우는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동정호는 섬진강이 범람하며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배후습지다. 배후습지는 강이나 호수, 바다 같은 물가의 뒤쪽에 형성된 습지를 뜻한다. 큰 물줄기 바로 옆은 아니지만, 그 물의 영향을 받아 항상 축축하거나 물이 고이는 낮은 땅인 셈이다.
계절마다 피어나는 꽃들의 향연
호수를 따라 약 1km 이어진 산책길에는 메타세쿼이아 나무들이 줄지어 서서 시원한 그늘을 제공한다. 호수 한가운데 놓인 출렁다리와 전통 양식의 악양루는 사진작가들의 단골 출사지이기도 하다. 특히 호수 위를 떠다니는 듯한 나룻배 포토존은 동정호만의 평화로운 분위기를 상징한다.
동정호의 가장 큰 매력은 계절마다 달라지는 풍경에 있다. 봄에는 호숫가 주변으로 벚꽃이 흩날리며 화사한 시작을 알린다. 여름이 오면 수국길을 따라 형형색색의 유럽 수국이 만개해 호수를 수놓는다. 6월과 7월 사이의 동정호는 푸른 물빛과 대비되는 화려한 수국 덕분에 방문객이 가장 많은 시기이기도 하다. 유럽 수국은 일반 수국보다 개화 기간이 길고(6~8월) 꽃송이가 탐스러운 것이 특징이다.
가을이 깊어지면 호수 한쪽의 핑크뮬리 섬이 분홍빛 구름을 내려앉힌 듯한 장관을 연출한다. 억새와 코스모스가 가을바람에 몸을 맡기는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마저 차분하게 만든다.
섬진강 물길 따라 닿는 평사리의 길목
동정호로 향하는 길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 중 하나로 꼽히는 19번 국도와 연결된다. 하동읍에서 구례 방향으로 향하는 이 길은 섬진강의 유려한 곡선을 따라 이어진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하동공용버스터미널에서 악양행 농어촌 버스를 타면 약 20분 내외로 도착할 수 있다. 평사리 정류장에서 하차하면 탁 트인 들판과 함께 동정호의 입구가 눈앞에 펼쳐진다.
자차 이동 시에는 네비게이션에 동정호 혹은 악양 생태공원을 입력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하동 최참판댁

주변 관광지와의 연계성도 매우 뛰어나다. 동정호 인근에는 박경리 작가의 대하소설 '토지'의 실제 배경인 최참판댁이 위치해 있다. 섬진강이 굽이쳐 흐르고 드넓은 평사리 들판이 한눈에 들어오는 이곳은 한국 문학의 성지로 불린다.
조선 후기 전통 한옥의 구조를 충실히 따르며 지어진 14동의 건물은 과거 양반가의 생활상과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을 입체적으로 전달한다.
최참판댁은 실제 역사 속 인물의 고택이 아니라 소설 속 주인공 서희와 그 일가의 삶을 현실로 불러낸 공간이다. 박경리 작가는 평사리의 너른 들판을 보고 이곳을 소설의 무대로 낙점했으며, 하동군은 소설 속 묘사를 바탕으로 2004년 현재의 한옥 단지를 준공했다.
이 집은 안채, 사랑채, 별당, 사당 등 조선 시대 전형적인 상류 주택의 면모를 갖추고 있으며 소설의 서사적 깊이를 시각적으로 증명한다. 문학 작품이 지역의 지형과 문화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소설의 인기에 힘입어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로도 사랑받고 있다. 영화 '관상', '궁합' 등 한국적 미학이 필요한 영상물들이 이곳을 배경으로 삼았다.
집안 곳곳에 놓인 절구, 가마솥, 디딜방아 같은 소품들은 실제 사람이 살았던 것 같은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최참판댁의 건축 구조는 조선 시대 유교 사상과 가옥의 위계를 반영하고 있다. 솟을대문은 양반가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며, 대문을 지나면 바깥주인이 거처하며 손님을 맞이하던 사랑채가 등장한다. 사랑채 누마루에 앉으면 평사리 들판과 섬진강, 형제봉까지 이어지는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사랑채 뒤편으로는 안채와 별당이 자리해 은밀하면서도 정갈한 분위기를 풍긴다. 소설 속 서희가 머물던 별당은 연못과 어우러져 가장 아름다운 장소로 손꼽힌다.
최참판댁 단지 상단부에는 박경리 문학관이 위치해 있어 작가의 생애와 집필 기록을 살펴볼 수 있다. 또 작가가 생전에 사용했던 만년필, 안경, 국어사전 등 유품과 함께 '토지'의 친필 원고 일부가 전시돼 있다.
최참판댁은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된다. 입장료는 성인 2000원, 청소년 및 군인 1500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