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연극계에 깊은 족적을 남긴 연출가 이상우가 별세했다.
극단 연우무대와 차이무를 이끌었던 이상우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는 26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75세.
1951년생인 고인은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한 뒤, 1977년 대학 연극회 출신 동료인 정한룡, 김광림 등과 함께 극단 연우무대를 창단하며 본격적으로 연극계에 발을 들였다. 연우무대는 당시 한국 사회의 현실과 청년 세대의 고민을 무대 위에 진솔하게 담아내며 주목받았고, 그중 대표작 ‘칠수와 만수’는 1987년 제23회 동아연극상을 수상하며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았다.

이후 고인은 1995년 또 다른 극단인 차이무(차원이동무대선)를 창단하며 창작 활동의 폭을 넓혔다. 차이무는 ‘늘근 도둑 이야기’, ‘비언소’ 등 한국적 정서를 기반으로 한 작품들을 꾸준히 선보이며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특히 현실을 반영한 서사와 개성 있는 연출 방식으로 한국 창작극의 지평을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인이 이끈 극단을 거쳐 간 배우들도 화려하다. 송강호, 문성근, 유오성, 문소리, 이성민 등 현재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대표하는 배우들이 차이무에서 연기 경험을 쌓으며 성장했다. 이처럼 그는 연출가이자 교육자로서 수많은 인재를 길러낸 인물이기도 하다.
연극계에서는 고인을 두고 “현실과 예술을 연결하는 데 탁월했던 연출가”라는 평가가 나온다. 사회적 메시지를 담으면서도 관객과의 소통을 놓치지 않는 작품 세계는 오랜 시간 한국 연극의 중요한 흐름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류종숙 씨와 아들 일하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8일 오전 9시다.

한편 고인이 오랜 기간 몸담았던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은 국내 최고 수준의 공연예술 교육기관으로 평가받는다. 1993년 설립된 한국예술종합학교는 음악, 무용, 연극, 영화, 미술 등 다양한 예술 분야의 전문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국가가 설립한 예술 특수대학이다. 그중 연극원은 연기, 연출, 극작, 무대미술 등 공연예술 전반을 아우르는 체계적인 교육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연극원은 실기 중심 교육을 기반으로 학생들의 창의성과 현장 적응력을 동시에 키우는 데 중점을 둔다. 이론 수업과 함께 실제 공연 제작 과정에 참여하는 프로젝트형 수업이 활발하게 진행되며, 졸업 전부터 다양한 무대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지원한다. 이러한 교육 방식 덕분에 연극원 출신 인재들은 연극뿐 아니라 영화, 방송 등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국내외 유명 연출가와 예술가들이 교수진으로 참여해 현장 경험을 직접 전수하는 것도 특징이다. 이상우 교수 역시 이러한 환경 속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자신의 예술 세계를 이어갈 인재들을 길러냈다. 그의 별세로 한국 연극계는 한 시대를 이끈 예술가를 잃었지만, 그가 남긴 작품과 제자들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무대 위에서 그 정신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옥상 위에서 외친 소외된 자들의 절규, ‘칠수와 만수’
1986년 초연된 연극 ‘칠수와 만수’는 대만 작가 황춘밍의 소설 ‘담배꽁초’를 한국적 상황에 맞게 번안한 작품이다. 광고 도장공인 칠수와 만수가 고층 빌딩 옥상에서 전광판 작업을 하며 나누는 대화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칠수는 미군 부대 주변에서 자라 서구적 환상을 품고 있고, 만수는 장기수 아버지를 둔 연좌제의 피해자로 사회적 제약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이다.
작품의 절정은 이들이 옥상에서 장난스럽게 외친 고함이 ‘투신 자살 소동’ 혹은 ‘정치적 시위’로 오해받으면서 발생한다. 경찰과 구경꾼들이 몰려드는 상황은 소통이 단절된 우리 사회의 비극을 상징한다. 이 작품은 하층민의 고단한 삶을 해학적으로 그려내면서도, 개인의 삶을 억압하는 구조적 모순을 통렬하게 비판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80년대 군부 독재 시절의 답답한 시대정신을 옥상이라는 개방된 공간을 통해 역설적으로 표현한 수작이다.
도둑의 입으로 읽어내는 권력의 허구, ‘늘근 도둑 이야기’
1989년 ‘동숭연극제’를 통해 처음 선보인 이상우 작가의 ‘늘근 도둑 이야기’는 두 늙은 도둑이 ‘그분’의 집을 털러 들어가며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시사 풍자극이다. 평생을 감옥에서 보낸 두 도둑은 출소 후 마지막 한탕을 위해 권력자의 대저택에 침입하지만, 금고는커녕 그분의 권위를 상징하는 박물관 같은 방에서 길을 잃고 만다.
이 작품의 핵심은 도둑들이 나누는 만담 같은 대사 속에 녹아 있는 시사 풍자다. 이들은 잡다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권력층의 부패를 도둑의 시각에서 비틀어 낸다. 결국 경찰에 잡힌 뒤에도 있지도 않은 ‘배후’를 묻는 공안 당국의 취조 과정은 당시 경직된 공권력의 우스꽝스러운 민낯을 폭로한다.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음에도 시종일관 폭소를 유발하는 구성 덕분에 ‘늘근 도둑 이야기’는 대중적 생명력이 가장 긴 연극 중 하나로 꼽힌다. 권위주의를 조롱하고 법과 정의의 이중성을 꼬집는 이 작품의 미덕은 시대가 바뀌어도 변치 않는 보편적인 공감을 끌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