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식품 매장이나 편의점 매대에 서면 익숙한 과자와 라면 봉지 사이로 낯선 이름들이 눈에 띈다.

유명 맛집의 이름부터 요리 대결 프로그램에서 보았던 셰프들의 얼굴까지, 식품업계가 '셰프와의 만남'에 사활을 걸고 있다. 단순히 한 끼를 때우기 위해 사던 가공식품이 이제는 줄 서서 먹는 맛집의 요리로 탈바꿈하고 있다.
짚불 향 입은 짜장라면과 바비큐 맛 과자, 경계를 허물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우리가 흔히 알던 스테디셀러 제품들의 변신이다. 농심은 서울에서 예약하기 어렵기로 소문난 고깃집 '몽탄'과 손을 잡았다. 몽탄은 전남 무안의 전통 방식인 짚불 훈연으로 고기를 굽는 곳으로 유명하다. 농심은 다음 달 14일까지 몽탄 매장에서 '몽탄 짜파게티'를 선보인다.

이 메뉴는 단순히 짜파게티에 고기를 얹은 수준이 아니다. 몽탄의 노하우가 담긴 스모크 퓌레와 오일을 더해 입안 가득 짚불 향이 퍼지도록 설계했다. 여기에 바삭한 알새우칩을 가루 내 고명으로 올려 식감까지 챙겼다. 공장에서 찍어내던 라면이 셰프의 손길을 거쳐 하나의 근사한 외식 메뉴가 된 셈이다.
과자 업계도 예외는 아니다. 오리온은 바비큐 전문가인 유용욱 셰프와 힘을 합쳤다. 꼬북칩, 스윙칩, 예감 등 대중적인 과자에 유 셰프의 바비큐 철학을 입혔다. 꼬북칩에는 훈연 향이 배어든 시럽을 발랐고, 스윙칩은 유 셰프의 식당에서 파는 인기 메뉴인 '갈비라면'의 맛을 그대로 재현했다. 소비자들은 슈퍼마켓에서 파는 과자 한 봉지에서도 정통 바비큐의 풍미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햄버거, 1만 원대 프리미엄 시대를 열다
버거 업계의 협업은 더욱 본격적이다. 일시적인 이벤트에 그치지 않고 정식 메뉴로 자리를 잡는 추세다. 버거킹은 최근 유용욱 셰프와 함께 '스모크 비프립 와퍼'를 내놓았다. 단품 가격이 1만 원에 육박하지만, 유 셰프 특유의 훈연 기법과 버거킹의 직화 기술이 만났다는 소식에 소비자들은 기꺼이 지갑을 열고 있다.

롯데리아의 행보도 거침없다. 이찬양 셰프와 협업한 '번프비프버거'는 시각적인 즐거움까지 더했다. 오징어 먹물을 사용해 마치 불에 그을린 듯한 검은색 빵(번)을 만들고, 바삭하게 구운 치즈로 독특한 식감을 구현했다. 롯데리아는 이미 지난해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 '흑백요리사'의 우승자인 권성준 셰프와 손잡고 모짜렐라 버거를 선보여 큰 재미를 본 바 있다.
미국계 버거 브랜드인 쉐이크쉑 역시 한국 진출 10주년을 맞아 미쉐린 레스토랑의 손종원 셰프와 손을 잡았다. 손 셰프는 최근 미국 본사의 메뉴 전략 책임자를 직접 만나 한국의 맛을 살린 신메뉴 개발에 착수했다. 이 메뉴는 올해 여름 대중에게 공개될 예정이다.
왜 모두가 셰프를 찾을까?
식품업계가 이토록 셰프들에게 공을 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소비자의 변화다. 과거에는 단순히 가격이 싸고 배를 채울 수 있는 음식을 찾았다면, 지금은 '경험'과 '스토리'를 중시한다. 유명 셰프가 개발에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소비자에게는 훌륭한 이야깃거리가 된다.
실제로 성적표도 화려하다. 세븐일레븐이 정호영 셰프와 만든 우동은 출시 2주 만에 컵라면 부문 판매 1위를 차지했다. 이마트24가 박은영 셰프와 협업해 내놓은 마라샹궈 역시 즉석식품 분야에서 가장 많이 팔린 제품으로 이름을 올렸다. "유명 셰프가 이름을 걸고 만들었으니 일단 맛은 보장될 것"이라는 믿음이 구매로 이어지는 것이다.
기업 입장에서도 이득이다. 수많은 신제품이 쏟아지는 시장에서 소비자에게 눈도장을 찍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이때 셰프의 인지도와 전문성은 신제품의 위험 부담을 낮춰주는 든든한 방어막이 된다. 셰프의 개성 있는 레시피가 더해지면 기존 제품과는 확실히 차별화된 맛을 낼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누구나 누리는 '미식의 대중화'
이러한 협업 열풍은 '미식의 대중화'를 이끌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수개월 전부터 예약해야 겨우 맛볼 수 있는 유명 셰프의 요리 철학을, 이제는 동네 편의점이나 프랜차이즈 매장에서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역 맛집과의 상생도 돋보인다. 오뚜기가 춘천의 '통나무집닭갈비'와 협업해 만든 철판닭갈비 스파게티나 주먹밥 등이 대표적이다. 지역의 유명한 맛을 전국 어디서나 간편하게 즐길 수 있도록 함으로써, 지역 브랜드에는 홍보 기회를 주고 소비자에게는 새로운 미식 경험을 제공한다.
업계 관계자들은 이러한 흐름이 앞으로 더 가속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한 식품업계 관계자는 "소비자들이 식품을 고를 때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것 이상의 가치를 찾고 있다"며 "셰프의 전문성과 기업의 제조 기술이 결합한 제품들은 앞으로도 시장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우리가 먹는 짜장라면 한 그릇, 버거 한 세트가 이제는 단순한 가공식품을 넘어선다. 그 안에는 셰프의 고민과 맛집의 전통, 그리고 새로운 맛을 향한 기업의 노력이 담겨 있다.
식품업계의 이 화려한 협업은 결국 소비자에게 더 맛있고 즐거운 선택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당분간 멈추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