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연일 흥행 기록을 갈아치우는 동안 관객들이 입을 모아 아쉬워하는 장면이 있다. 극 초반 청령포의 산길에 불쑥 나타나는 호랑이. 해당 장면이 관객들의 몰입을 흔들었다. 1600만을 넘으며 한국 영화사에 길이 기록될 흥행성적을 남긴 영화에 흠집을 냈다. 이제 그 호랑이가 다시 태어난다. 오는 29일 개선된 CG 버전의 '왕과 사는 남자'가 각종 OTT와 IPTV를 통해 공개된다. 극장을 떠난 지 두 달여 만에, 이번엔 다듬어진 모습으로 안방 스크린을 찾아온다.
스크린 위의 호랑이, 관객의 마음속을 할퀴다
장항준 감독이 연출한 '왕과 사는 남자는 지난 2월 4일 개봉 직후부터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다. 1457년 강원도 영월 청령포를 배경으로, 마을 부흥을 위해 유배지를 자처한 호장 엄흥도(유해진)와 왕위에서 쫓겨난 어린 선왕 이홍위(박지훈) 사이에 싹트는 인간적 유대를 그린 작품이다. 역사 속 비극을 웃음과 눈물로 버무린 연출, 유해진과 박지훈의 농밀한 연기 호흡, 전미도가 맡은 매화의 애달픈 존재감이 어우러지며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흥행 역주행을 거듭했다.
그러나 영화가 화제가 되면 될수록 한 가지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극 초반 등장하는 호랑이 장면의 CG 완성도가 영화 전체의 수준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에 "이야기와 연기는 정말 좋은데 호랑이 장면에서 집중이 깨졌다", "CG가 너무 아쉽다"는 반응이 줄을 이었다. 급기야 나무위키 평가 항목에 "영화 초반 호랑이의 CG 완성도가 크게 떨어진다"는 내용이 별도로 기재됐다.

CG의 어색함은 단순히 시각적 불편함에 그치지 않았다. 호랑이는 단순한 동물 소품이 아니었다. 청령포의 험준한 자연을 상징하는 존재이자, 어린 왕이 자신의 운명에 맞서는 결정적 장면을 이끄는 극적 장치였다. 극 중 이홍위는 마을 사람들을 위협하는 호랑이를 활로 쏴 죽이며 처음으로 왕으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 장면의 감동이 어색한 CG로 인해 반감됐다는 점에서 관객들의 아쉬움은 더욱 컸다.
주연 배우 박지훈은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해 친형이 영화를 본 뒤 전해준 반응을 소개하며 "영화 너무 잘 봤다는데, 호랑이 CG가 아쉽다더라"라 해당 논란을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시간에 쫓긴 제작 현장
CG 논란의 근원은 촉박한 제작 일정이었다. 장항준 감독과 공동 제작자 장원석 BA엔터테인먼트 대표는 SBS 라디오 '배성재의 텐'에 출연해 애초 개봉 예정 시기가 4, 5월이었다고 털어놨다. 후반 작업 도중 일반 관객을 대상으로 한 블라인드 시사회를 진행했는데 반응이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배급사 쇼박스는 흥행 가능성을 높이 보고 설 연휴에 맞춰 개봉을 2~3개월가량 앞당기는 결정을 내렸다.
그 결정이 후반 작업 팀에 재앙에 가까운 시간 압박으로 이어졌다. 장항준 감독은 "CG의 생명은 시간"이라며 "호랑이 털을 표현하려면 렌더링 시간이 어마어마한데 물리적으로 수정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호랑이의 털 한 올 한 올을 현실감 있게 구현하기 위해서는 수개월의 작업 시간이 필요하지만, 갑작스럽게 앞당겨진 개봉 일정 앞에서 CG팀은 그 시간을 얻지 못했다.

장원석 대표는 "완성도가 떨어지는 부분은 당연히 제작자나 감독의 책임"이라고 고개를 숙이면서도 "개봉 일정이 앞당겨지면서 후반 작업 시간이 부족했다"고 해명했다. 장 감독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배급사가 개봉을 결정했기 때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특유의 낙관적인 화법으로 "사람이 연기를 못했다면 치명적이었겠지만, 다행히 CG가 연기를 못해서"라며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제작사 온다웍스의 임은정 대표는 사안을 좀 더 무겁게 받아들였다. 그는 "솔직히 나도 얼마나 아쉬움이 남았겠나"라면서 "무엇보다 CG팀이 제일 아쉬울 것 같다"고 했다. 이어 "이건 오히려 관객들이 만들어 준 기회라고 생각한다. 많이 말씀해 주셔서 이제는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배급사와 나누게 됐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 같다"며 CG 수정 작업에 들어간 배경을 밝혔다.
배급사 쇼박스는 CG 수정 작업 사실을 공식 확인하며 "CG 회사에서 IPTV 공개 시점에 맞춰 개선된 버전을 반영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 현재 자체적으로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장항준 감독 역시 OTT 공개를 앞두고 "호랑이 CG 변경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직접 언급했다. 개봉 당시 불완전하게 세상에 나왔던 호랑이가 마침내 제 모습을 찾아가는 셈이다.
CG 작업이 얼마나 달라졌을지는 공개 이후에야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제작진이 꾸준히 "털 한 올 한 올"이라는 표현을 써온 점, 그리고 CG팀이 극장 상영이 끝난 이후에도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적잖은 변화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관객들 사이에서는 "극장 때 봤는데 OTT 버전도 다시 봐야겠다", "두 버전을 비교해보고 싶다"는 반응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29일부터 IPTV(지니TV, Btv, U+tv), 디지털케이블TV, OTT(웨이브, 애플TV, 쿠팡플레이, 왓챠, Google TV, 유튜브 등), 위성방송(스카이라이프), 웹하드 등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동시 공개된다. 극장에서 1663만 명과 함께 울고 웃었던 그 이야기가, 이번엔 소파 위에서 더 선명하게 다시 펼쳐진다. 그리고 이번엔 청령포의 호랑이도 좀 더 당당하게 그 자리를 채울 것이다.
희한하게도 CG 문제를 둘러싼 논란은 영화의 흥행에 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CG는 아쉬워도 영화 자체는 충분히 볼 만하다", "스토리와 배우 연기로 남고도 넘친다"는 반응이 더 많았는데, 그 입소문이 역주행의 동력이 됐다. 배우와 제작진의 솔직한 반응이 관객들에게 오히려 친근함으로 작용한 측면도 있었다.
역대 2위 흥행작의 무게, 그리고 배우들이 쌓아 올린 것
'왕과 사는 남자'는 개봉 이후 한국 영화 흥행의 역사를 새로 썼다. 역대 전체 박스오피스 관객 수 2위에 오르며 1663만 관객(4월 23일 기준)을 동원했고, 역대 한국 개봉 영화 매출액 1위를 기록했다. 2020년대 들어 1000만 관객을 넘긴 한국 영화 가운데 노년층부터 아동층까지 전 연령대가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작품은 이 영화가 유일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역사적 비극을 소재로 하면서도 과도한 폭력이나 자극적인 장면 없이 웃음과 감동을 동시에 전달한 덕분이다.
이 흥행의 중심에는 배우들의 연기가 있었다. 유해진은 마을 촌장 엄흥도를 맡아 에너지 넘치는 코미디와 깊은 인간적 감정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극을 이끌었다. 영화 초반 콩고물을 기대하며 유배지를 자처하는 그의 모습은 정겨운 시트콤처럼 웃음을 자아내다가, 후반부에 이르러 비극적 결말 앞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장면에서는 깊은 울림을 전했다. 영국 가디언지는 영화에 별 세 개를 부여하며 "유해진의 자신감 넘치는 연기로 구원받는 작품"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박지훈은 아이돌 출신이라는 선입견을 완전히 허물며 비운의 왕 이홍위를 섬세하게 소화했다. 연약하지만 존엄을 잃지 않는 어린 왕의 내면을 절제된 연기로 표현해 관객들로부터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전미도가 연기한 궁녀 매화는 비교적 분량이 짧음에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홍위의 곁에서 그의 아픔을 가장 가까이에서 나누는 인물로, 전미도 특유의 따뜻하면서도 깊이 있는 연기가 극의 감정선을 받쳐줬다. 이번 OTT 공개판 엔딩 크레딧에는 전미도가 직접 부른 OST '벗'이 삽입돼 여운을 더한다. 영화 속 매화의 심정을 가사에 담은 이 곡은 이미 개봉 당시부터 많은 관객에게 사랑받은 바 있다.
‘왕과 사는 남자’ 흥행 과정에서 눈에 띄는 현상이 있다. 관객 역주행이 그것이다. 통상 개봉 후 1, 2주 차에 관객이 집중됐다가 급감하는 패턴과 달리 영화는 1주 차부터 4주 차까지 오히려 주간 관객 수가 늘어나는 이례적인 곡선을 그렸다. 설 연휴를 거친 관객들이 입소문을 퍼뜨리고, 그 입소문이 3·1절 연휴에 더 많은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들이는 선순환이 이어졌다.